[질문]

신자로서 기도와 말씀 읽기는 의무이자 당연한 것이죠. 하지만 교회 훈련을 하면 십일조는 필수인데 십일조를 왜 안 드리느냐 돈이 아깝느냐 다시 채워주실 하나님을 믿지 못하느냐 라고 하니까 저의 믿음이 안 좋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헌금은 감사함으로 드려야 되는데 의무적으로라도 드리는 게 안 드리는 것보다 나은가요? 드리면서 아깝다고 생각이 들어도 드리는 게 나은가요? 십일조를 낼 수 있는 믿음을 달라고 기도는 하고 있지만 십일조 때문에 내가 아직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드네요. 순전히 십일조는 다른 헌금과는 액수 자체가 틀리니까요. 제가 학생이지만 몇 만원은 아깝지가 않은데 십만 원 근처로 한 번에 헌금을 내려하면 아깝게 느껴지는 게 사실입니다 잘 사는 것도 아니라서 항상 욕심으로 하고 싶은 거, 먹고 싶은 거 참고 사는 상황입니다 십일조를 잘 내고 계시는 분은 어떻게 해서 그렇게 잘 내실 수 있는 건가요? 글을 읽어보니 십일조는 구약에서는 제사장들의 생계를 위해 내는 것이고 신약에서는 십일조를 폐하지 않았다고 나와 있는데 그 말은 내야 되는 말인 것 같긴 한데 기도와 말씀을 안 읽는 자는 무늬만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는데 십일조도 안하면 무늬만 기독교인인가요?

[답변]

박진호 목사
박진호 목사

십일조에 대한 성경적 가르침은 신약 시대에도 폐지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물론 처음 십일조를 하기는 힘들지만 일단 하기 시작하면 신앙 성장에 아주 큰 유익이 됩니다. 신앙이 성숙한 자는 십일조를 별다른 어려움과 주저 없이 잘 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렇다고 그러지 못하는 질문자가 무늬만 기독교인이라는 뜻은 결코 아닙니다.

제사보다 상한 심령을

먼저 “십일조를 의무적으로라도 드리는 게 안 드리는 것보다 나은가요?”라고 질문하셨지만 그 답은 당연히 ‘아니다’ 입니다. 헌금뿐 아니라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것은 진심으로 감사해서 혹은 기쁨으로 자원하며 헌신하는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하나님은 의무적으로 바치는 것은 전혀 받지 않으십니다.

“사무엘이 가로되 여호와께서 번제와 다른 제사를 그 목소리 순종하는 것을 좋아하심같이 좋아하시겠나이까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 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나으니.”(삼상15:22) “감사로 제사를 드리는 자가 나를 영화롭게 하나니 그 행위를 옳게 하는 자에게 내가 하나님의 구원을 보이리라.”(시50:23) “주는 제사를 즐겨 아니하시나니 그렇지 않으면 내가 드렸을 것이라 주는 번제를 기뻐 아니하시나이다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시51:16,17)

희생 제물을 의무적 형식적으로만 바치는 이스라엘 백성더러 성전 마당만 밟고 간다고 즉, 실제로 당신께서 받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되 너희의 무수한 제물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뇨 나는 수양의 번제와 살진 짐승의 기름에 배불렀고 나는 수송아지나 어린 양이나 수염소의 피를 기뻐하지 아니하노라 너희가 내 앞에 보이러 오니 그것을 누가 너희에게 요구하였느뇨 내 마당만 밟을 뿐이니라.”(사1:11,12) 급기야는 성전 문을 닫았으면 좋겠다고 한탄 하셨고(말1:10), 실제로 그렇게 했습니다.

그 까닭은 이스라엘이 “성회와 아울러 악을 행하는 것을”(사1:13) 하나님이 견디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이 기도하면서 “손에 피가 가득”(사1:15)하기에 응답하지 않는다고도 했습니다. 그들은 온갖 죄악을 저질렀을 뿐 아니라 제사장 나라로서 모든 민족에게 복의 근원이 되어 여호와 하나님을 알게 할 소명을 등한히 했습니다. 그 대신에 자신들의 현실적 안락과 풍요만을 위해서 여호와 하나님과 함께 우상 신들도 음란하게 함께 섬겼습니다. 질문하신 것처럼 단순히 경제적인 부담이 되어서 십일조를 드리기 힘들어 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습니다.

그럼에도 간과해선 안 될 진리는 하나님은 신자에게 절대로 어떤 신앙 행위도 강요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강요에 의해서 마지못해 행하는 것은 순종이 아닙니다. 아담에게 선악과 명령을 주실 때에도 완전히 그의 자유의지에 맡겼지 않습니까? 율법을 준수하는 것도 기쁨과 감사와 함께 기꺼이 행해라고 했습니다. 마치 복(福)과 화(禍)둘 중에 하나를 받을 수 있는 전제 조건처럼 제시되었지만 아닙니다. 이미 하나님의 언약 백성으로 선택 받았기에 거룩한 율법을 수여 받은 백성답게 거룩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사는 것 자체가 복인 것입니다.

신약시대에도 하나님의 그 원리는 변하지 않습니다. 아니 변할 리가 없습니다. “예수께서 눈을 들어 부자들이 연보궤에 헌금 넣는 것을 보시고 또 어떤 가난한 과부의 두 렙돈 넣는 것을 보시고 가라사대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가난한 과부가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 저들은 그 풍족한 중에서 헌금을 넣었거니와 이 과부는 그 구차한 중에서 자기의 있는바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 하시니라.”(눅21:1-4) 가난한 과부의 헌금액수는 분명 부자들보다 적었으나 주님은 가장 많이 넣었다고 말합니다. 진정으로 감사하고 헌신하는 마음으로 기꺼이 넣었기 때문이며, 그런 마음 없이는 생활비 전부를 넣을 수도 없습니다.

십일조 낼 수 있는 믿음을 달라는 기도(?)

또 “십일조를 낼 수 있는 믿음 달라고 기도는 하고 있지만 십일조 때문에 내가 아직 예수님을 믿지 못하고 있구나라는 생각이 드네요”라고 하셨습니다. 이런 기도는 더 깊이 따져봐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우선 예수님의 십자가 구원의 진리를 모르고 하나님과 등을 지고 있을 때 구원을 얻는 믿음은 하나님이 선물로 주십니다.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2:8) 인간 스스로 하나님을 믿고자, 아니 알고자 하는 마음조차 없고 세상의 죄악과 쾌락과 짝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아니고는 하나님의 일을 알지 못하고 예수를 주라 시인할 수도 없습니다.

반면에 성령님의 간섭으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 앞에 완전히 항복하고 인생의 목적과 방향이 바뀐 후로 믿음으로 순종하여 행하는 일은 신자의 책임 하에 맡겨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방적 강권적 도우심이 없는 것은 아니나 아주 비상한 경우가 아니면 그러지 않습니다. 그보다는 신자가 자발적으로 순종을 해야 그런 도우심이 임합니다.

믿음의 성숙이 단순히 기도하고 말씀만 보고 있다고 이뤄지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신자가 된 후에는 믿음은 순종과 시련을 먹고 자란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일단 믿음으로 시련과 부닥쳐 싸워나가고 하나님 계명을 실제로 순종해 나가면서 그 영적 전투에서 피곤치 않게끔 힘을 주고 바른 방향으로 인도해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단순히 기도했다고 그런 마음으로 바꿔 주는 것은 아니라는 뜻입니다.

대표적 예로 여리고성 사건을 들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아무 일도 않고 하나님이 공짜로 승리를 준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은 전쟁 경험이 전혀 없으며 무기도 변변찮은 오합지졸입니다. 오랜 노예 생활만 했기에 강인한 체력을 지녔을지 몰라도 말입니다. 반면에 여리고는 당시로는 철옹성으로 유명합니다. 그런데 아무 대비 없이 침묵으로 줄지어서 성을, 그것도 칠일 간이나 돌며 행진하라고 합니다.

말하자면 적의 기습에 무방비 상태로 완전히 자기들을 노출해서 돌라는 전략적으로 따져 빵점짜리 명령입니다. 믿음으로 일단 순종하지 않고는 안 됩니다. 행동으로 옮기기 전까지는 순종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도무지 말도 안 되지만 일단 실행하면 하나님의 놀라운 권능과 은혜가 주체하지 못할 정도로 부어집니다. 그 전에 요단강을 건널 때에도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이 그 센 물결 속에 일단 발을 디디자 물이 갈라졌지 않습니까?

십일조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나 너희의 온전한 십일조를 창고에 들여 나의 집에 양식이 있게 하고 그것으로 나를 시험하여 내가 하늘 문을 열고 너희에게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붓지 아니하나 보라.”(말3:10) 더러운 제물에 화가 나서 성전 문을 닫았으면 좋겠다고 한탄하신 하나님이 같은 선지자 말라기를 통해 십일조를 바치라고 합니다. 그럼 정말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부어주시겠다고 약속했습니다. 아이러니 하게 보이지만 그러니까 더더욱 정말로 진지하고도 심각하게 생각해야 할 말씀입니다.

이를테면 하나님이 당신의 이름을 걸고 신자더러 당신과 내기해 보자고 한 셈이니까 말입니다. 문제는 온전한 십일조여야 합니다. 의무적 형식적으로 내는 것이 아닙니다. 또 십일조만 내면 응당 복을 받을 수 있거나 받아야 한다는 식의 하나님과 거래하는 마음도 아닙니다. 정말로 받은 것에 감사해서, 또 그 부담이 큰 액수를 아무 보상 바라지 않고 온전히 드리는 마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 앞에서 생활비 전부를 바친 과부의 마음입니다.

질문자께서 지금 학생 신분에 하고 싶은 다른 일도 못하고 가뜩이나 검소하게 희생하며 살면서 큰 액수의 십일조로 바치려니 응당 주저와 부담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진정으로 바치고 싶은 소원은 있지만 선뜻 실행하기 힘들 것입니다. 그렇더라도 한 번이라도 행동으로 옮기는 순종의 본을 보이면 하나님의 권능과 은혜를 반드시 체험시켜 주신다는 뜻입니다. 큰 액수를 바치고 남는 돈으로 충분히 더 풍성하게 즐겁게 감사함으로 살아갈 수 있음을 확실하게 체험시켜 주십니다. 그런 체험이 바탕이 되면 다음에는 십일조를 잘 하게 됩니다. 나아가 십일조를 하면서 영적으로 얻는 유익은 말할 수 없이 큽니다.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방식은 사람마다 다 다르지만 정말로 믿음이 한층 업그레이드 됩니다.

무늬만 그리스도인이란?

십일조 헌금
©Pixabay
마지막으로 “기도와 말씀을 안 읽는 자는 무늬만 기독교인이라고 생각하는데 십일조도 안하면 무늬만 기독교인인가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그렇게 따지면 세상의 모든 기독교인 전부가 무늬만 기독교인일 것입니다. 십일조를 하지 않기 때문이 결코 아닙니다. 하나님이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바대로 온전히 살고 있는 신자는 저를 필두로 아무도 없기 때문입니다.

무늬만 기독교인이라는 뜻은 속은 전혀 기독교인이 아닌데 겉으로만 그런다는 뜻입니다. 이런 가장 기본적인 정의(定意)에 비추어도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먼저 기독교인이란 어떤 사람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시고 그분의 뜻에 순종하면 사는 자입니까? 물론 그렇습니다. 그럼 그리스도를 주인으로 모신다는 뜻부터 살펴야 합니다. 주님이 나를 대신해 십자가에 죽으시며 나의 모든 죄 값을 담당했기에 하나님이 나를 의롭게 받아들여주셨다는 그 은혜를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를 대신해 죽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내 죄를 내 스스로 도무지 구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럼 신자다운 첫째 요건은 자기는 평생을 두고도 죄의 권세에서 완전히 자유롭게 되지 못하는 불완전한 존재임을 겸비하게 인정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를 믿고 나서도 여전히 알게 모르게 죄를 짓고 있음을 인정한다는 것입니다. 이전에는 자신의 도덕적 양심과 자기 의지력만으로 의롭게 되려고 노력했다면 그렇게 해선 도무지 선해질 수 없다는 사실을 철두철미 깨닫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날마다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 자신의 죄를 입술로 자백하며 미쁘신 그분의 용서를 받는 것이 신앙생활의 첫 걸음입니다. 이제부턴 자신의 영혼을 거룩하게 소생시켜 주시는 성령님의 권능을 힘입는 데에 자기 의지력을 먼저 사용하는 것입니다. 말씀과 기도에 전무하면서 성령의 인도에 따라서 죄와 피 흘리기까지 거룩한 싸움을 지속하며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나가는 것이 신자의 일생인 것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여전히 죄의 본성이 자기를 묶으려 하는 가운데 스스로는 그 힘을 완전히 이길 수 없으니 성령의 도우심을 언제 어디서나 간구하는 자가 그리스도인입니다. 예수를 믿었으니 완전히 의로워졌고 앞으로 어떤 죄도 이겨낼 수 있다고 자신한다면, 최소한 꼭 그렇게 되어야만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믿는다면 아직은 그리스도인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른다는 뜻입니다. 예수님 당시의 바리새인들처럼 사람들은 의롭다고 칭찬할지 몰라도, 하나님 보시기엔 율법적, 기계적, 형식적, 위선적 의인일 뿐입니다.

따라서 가장 그리스도인다운 속은 자신이 아직도 예수님의 긍휼 없이는 한시도 거룩해질 수 없는 연약한 죄인임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럼 겉으로는 그 죄를 다 없애고 거룩해져야 겉도 그리스도인다워진 것입니까? 아닙니다. 속과 겉이 같으면 됩니다. 속이 거룩하지 않으니 겉으로도 그 점을 솔직히 인정하는 것입니다. 속이 거룩하지 않은데 겉을 거룩하게 하는 것이야 말로 겉만 그리스도인인 것입니다.

“만일 우리가 죄 없다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만일 우리가 범죄하지 아니하였다 하면 하나님을 거짓말 하는 자로 만드는 것이니 또한 그의 말씀이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요일1:8-10) 요한은 죄 없다 하는 것이 거짓말 즉, 속과 겉이 다른 것이라고 합니다. 이 말씀은 처음 예수를 믿을 때뿐만 아니라 믿은 후 성화에 더 적용되어질 수 있습니다.

바울도 동일한 뜻으로 말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한 법을 깨달았노니 곧 선을 행하기 원하는 나에게 악이 함께 있는 것이로다 내 속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즐거워하되 내 지체 속에서 한 다른 법이 내 마음의 법과 싸워 내 지체 속에 있는 죄의 법 아래로 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을 보는도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 내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그런즉 내 자신이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기노라.”(롬7:21-25) 속 마음으로는 하나님의 법을 지키고 싶지만 아직 완전히 그렇게 실천할 수 없으므로 오직 그리스도의 성령의 법을 쫓겠다고 했습니다.

따라서 아직은 여러 사정으로 십일조를 하지 않기에 괴롭다는 이런 질문을 하게 된 것 자체가 가장 그리스도인다운 모습입니다. 자신의 있는 모습 그대로 예수님께 나아가 도움을 구하는 모습입니다. 반면에 십일조를 않기에 그리스도인이 아니라고 판단 정죄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그리스도인답지 못한 것입니다. 그야말로 무늬만 그리스도인입니다.

그럼에도 분명히 아실 것은 율법이 이루지 못하는 경건의 의를 성령의 도우심으로 이룰 수 있습니다. 물론 평생을 두고도 그리스도처럼 완전하게는 될 수 없지만 최선을 다해서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 자라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성경은 자라라고 했지 그리스도처럼 되어라고는 요구하지 않았습니다. 천국에 가야 그렇게 될 것입니다.

예수를 구주로 모심으로써 믿은 후 죄의 형벌까지 다 사면 받았다고 해도 그런 은혜를 더하려고 죄에 더 거할 수는 없습니다.(롬6:1) 그러는 중에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나를 대신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생각하며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워야 합니다.(히12:3,4) 또 미처 고백하고 회개하지 못한 죄나, 아직도 벗어버리지 못한 썩어져가는 옛 습관이 있다면 하나님께 심판이 아닌 징계도 받을 수 있습니다.(히12:8) 그러니까 더욱 성령의 인도를 받아서 성화에 힘을 써야 합니다.

가장 중요한 계명은?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예수님은 신자가 반드시 순종해야 할 두 계명으로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을 꼽았습니다. 정작 신자가 심각하게 여겨야 할 것은 과연 지금 이웃 사랑을 얼마나 어떻게 실천하고 있느냐는 것이어야 합니다. 시련과 환난 중에 고통당하는 불쌍한 이웃, 사탄에 미혹되어 예수를 알지 못하는 영혼들을 진정으로 주님의 사랑으로 섬기고 있어야 합니다.

바꿔 말해 자신이 무늬만 그리스도인이 아닌지 점검할 기준도 정작 이 말씀이라는 뜻입니다. 이 말씀에 비추어보면 신앙 양심에 꺼리지 않을 자는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그러니 더더욱 성령의 도우심을 바라고 부단히 우리에게 맡겨진 소명을 잘 감당해야 할 것입니다. 단순히 십일조, 기도, 말씀 같은 종교적 행위를 얼만 열심히 했느냐 여부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자가 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해는 마셔야 합니다. 십일조, 기도, 말씀을 하지 말거나 게을리 해도 이웃 사랑만 열심히 하라는 뜻은 절대 아닙니다. 그것은 자선사업이지 신앙활동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웃 사랑을 잘 하기 위해서 더 열심히 해야 합니다. 나아가 그러는 것이 이웃 사랑이라는 목표를 달성하려는 훈련과 준비의 과정으로 그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모든 종교적 행위부터 이웃 사랑을 실제로 실천하는 방식이어야만 합니다.

십일조의 경우를 예로 들어봅시다. 하나님이 십일조를 제정한 의도가 단순히 당신께 받은 것의 1/10을 감사의 뜻으로 바치라는 것이 아닙니다. 기업이 없는 레위인의 생계, 가난한 자의 구제, 성전의 수리 등이 십일조 헌금의 사용용도입니다. 그 목적에 진심으로 동의하고 적극적으로 자원해서 동참하는 뜻으로 십일조를 하라는 것입니다.

말하자면 십일조 제도 자체가 잘못이거나 이제 더 이상 요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십일조를 성경의 뜻대로 운영하지 않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최근에 미국의 한 교회가 십일조를 돌려주면서 이웃에게 직접 구제하라고 당부한 뜻을 잘 살펴야 합니다. 십일조는 신자의 종교적 헌신 여부를 판단하는 요식 행위가 아닙니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가장 중요한 계명을 실천하는 아주 효과적인 방식입니다. 만약 교회가 십일조를 단순히 교회의 양적 성장만 추구하기 위해 강요, 요구, 권면한다면 과감히 나서서 성경적 이웃 사랑의 목적으로 개혁하자고 당당히 말해야 합니다.

십일조에 대한 저의 다른 글에서도 밝혔지만 십일조의 가장 기본적인 의미부터 잘 아셔야 합니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혹 이를 미워하며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며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하느니라.”(마6:24) 십일조는 신자가 자신의 주인이 누구인지 하나님 앞에 분명하게 보이는 표식이 됩니다. 하나님만이 내 인생의 주인, 소망, 목적임을 고백하는 신앙적 헌신입니다.

돈이 인생살이에서, 신자의 경우도 마찬가지임, 중요치 않다는 뜻이 절대 아닙니다. 신자도 열심히 일하여 돈을 많이 벌어야 합니다. 그러나 인생의 목적을 자신이 풍요나 궁핍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데 두느냐, 재물의 풍요로 일신상의 안락에 두느냐 둘 중 하나를 분명히 하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런 고백과 헌신의 의미로, 또 앞에서 말한 이웃 사랑과 하나님 나라 확장이라는 십일조의 목적에 진정으로 동의하지 않는다면 하지 않아도 됩니다. 단순히 종교적 의무로 바치면 순종이 아니라 제사에 불과하기에 하나님은 받지도 않으십니다. 또 십일조를 바치지 않는다고 해서 무늬만 그리스도인인 것도 아닙니다. 지금도 자라가고 있는, 여러 부분에서 자랄 것이 많이 남은 그리스도인일 뿐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이런 질문을 했다는 자체가 그리스도인이 확실함을 증명하기 때문입니다.

2013/8/31

* 이 글은 미국 남침례교단 소속 박진호 목사(멤피스커비우즈한인교회 담임)가 그의 웹페이지(www.whyjesusonly.com)에 올린 것을 필자의 허락을 받아 게재한 것입니다. 맨 아래 숫자는 글이 박 목사의 웹페이지에 공개된 날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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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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