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석균 목사
홍석균 목사

본문 : 히브리서 12장 12-17절

본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시 배경을 알아야 하는데, 1세기 그리스도인들은 로마에게 극심한 박해를 받았다. 그래서 히브리서 저자는 구약의 믿음의 선진들을 일일이 소개하면서 우리도 그들처럼 믿음의 경주를 인내로 경주하자고 권면한다. 저자는 권면에서 멈추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이 경주에서 이탈한 자들에 대해서는 하나님께서 징계할 것이라고 경고하고 있다. 여기서 왜 저자는 ‘징계’라는 카드를 꺼내 들고 박해에 처한 성도들을 설득하려고 했는가? 가뜩이나 로마의 박해가 고통스러운데, 징계라는 말은 너무나도 가혹하게 들린다. 그러나 당시 징계의 단어가 나온 배경을 알기 위해서는 당시 1세기 기독교인들에게 퍼져 있는 암묵적인 질문을 이해해야 한다. 바로 신정론에 관한 질문이었다. ‘왜 하나님은 우리의 고난 가운데 침묵하시는가?’ 더 나아가 ‘하나님은 과연 존재하시는 분이신가?’ 라는 질문이 대두되었다. 그 질문에 대한 답변이 징계였다. 여기서 징계라는 단어를 오해하기 쉽다. 왜냐하면 체벌(punishment)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징계는 “자녀 만들기”(bring up)라는 양육의 개념이다. 너희가 단순히 체벌을 받지 않기 위해 버티라고 하는 코치와 선수의 관계 속에 개념이 아니다. 아버지와 자녀의 관계에서만 비롯된 것이다. ‘힘을 내렴. 이길 수 있단다. 너는 내 아들이잖아.’라고 외치는 아버지의 외침이다. 아버지가 아무리 엄격하고 가혹하다 할지라도 아버지의 양육은 사랑에 뿌리가 있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한 맥락 속에 히브리서 기자의 구체적인 가르침이 소개되어 진다. 14절에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 그런데 여기서 강조점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표면적으로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라고 생각한다. 일반적으로 모든 문장은 동사에 주안점을 두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래 히브리 기자가 강조한 것은 화평함과 거룩함을 따르기는 하는데, 모든 사람과 ‘더불어 하라’는 뜻이다. 또 주목해야 할 것은 모든 사람을 말할 때 단순히 불특정 다수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적 공동체 구성원” 전체를 말하는 뜻이다. 1세기 당시 초대교회 공동체는 신실하게 믿음을 지켜왔다. 그러나 박해가 지속되면서 조금씩 균열이 생기고 와해되기 시작했다. 그래서 그만 ‘모이기를 폐하는 사람들의 습관처럼 하지 말고’ 라는 말까지 나오게 된 것이다. (히 10:25) 당시 핍박이 얼마나 가혹했는지, 믿음으로 살아가는 그들의 삶은 달라지는 것이 없었다. 자고 나면 공동체의 형제들이 소리 없이 사라져 싸늘한 시체가 되어 돌아오기도 했다. 또는 내부 고발자에 의해서 교회 내에서 반목과 갈등이 생겼다. 이렇게 믿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생각하지 않았겠는가? 그때 저자는 이럴 때일수록 모든 사람과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으로 이겨내도록 강력히 촉구하고 있는 것이다.

오늘날 이 시대는 공동체성 상실의 시대이다. 개인주의와 이기주의로 점점 사람들은 메말라 가고 있다. 그러나 어디서 공동체성을 느낄 수 있을까? 어디서 회복이 일어날 수 있을까? 교회를 통해서만 가능한 일이다. 누군가를 밟아야지 살아남을 수 있는 이 시대에 교회는 함께 살자고 말한다. 더 빼앗아서 자기 소유를 삼고자 하는 시대에 교회는 나누고 베풀자고 말한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았지만 함께 울어주고 함께 웃을 수 있는 공동체는 교회밖에 없다. 이것이 교회의 화평함과 거룩성이다. 수련회 때만 되면 영적으로 눌리는 한 자매가 있었다. 집회만 시작되면 구르고 소리를 질렀다. 다들 불편해할 수 있었지만 몇몇 자매가 밤새도록 같이 있어 주었다. 축사를 하거나 안찰을 한 것도 아니다. 자매를 어루만져 주면서 “내 딸아. 내 딸아.” 밤새 기도해 주었다. 결국 회복 되었다. 그 모습을 보고 청년들이 눌려 떠는 지체들을 두려워하지 않게 되었다. 지금 겪고 있는 환난이나 박해가 있는가? 혼자 하면 잠깐은 이겨낼 수 있다. 그러나 오래 못 가고 금방 지친다. 그러나 함께하면 조금 더디 가지만 오래 갈 수 있고, 길게 갈 수 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신앙을 위협하는 거대한 세파에 공동체의 화평함과 거룩함으로 넉넉히 이겨내길 축복한다.

그렇다면 히브리서 기자가 이렇게 공동체성을 강조하는가? 공동체성을 파괴하는 자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15절에 “너희는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하는 자가 없도록 하고 또 쓴 뿌리가 나서 괴롭게 하여 많은 사람이 이로 말미암아 더럽게 되지 않게 하며” “쓴 뿌리 나서 다른 작물들까지 황폐하게 만든 것이다.” 그들의 모습을 장자권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버린 에서로 비유하면서 배도를 경고한 것이다. 순간을 위해서 영원한 것을 팔아버린 대표적인 주자이다. 거룩은 전염성이 있다. 그러나 죄에도 전염성이 있다. 공동체를 세우는 것은 어렵고 시간이 많이 걸린다. 그러나 공동체를 허무는 것은 쉽고 순식간이다. 화평을 깨고 있는가? 교회의 질서를 깨고 있는가? 아무리 성경공부를 하고 직분을 받아도 공동체를 깨는 것은 하나님의 관계를 깨는 것과 다름없다. 오늘날 사단은 우리의 목에 칼이 들이대며 ‘예수를 믿을래, 안 믿을래?’ 선택하라고 하지 않는다. 오늘날 사단의 전략은 공동체를 충동질 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피 값으로 세운 공동체를 허무는 것이다. 사역자와 성도들을 이간질하고 성도들 사이에 수군수군하게 만든다. 작은 것에 섭섭병(?)에 들게 해서 마음을 갈라놓는다. 오늘 본문은 공동체의 팀워크를 깨고 질서를 깨는 것이 배도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늘 시대마다 박해는 있어야 왔다. 시대마다 사단은 공동체를 해하려고 했다. 그러나 오히려 더욱 진리의 빛을 비추고 복음의 기치를 높이 들어 승리하시는 교회 되길 축복한다.

홍석균 목사(한성교회 청년부디렉터)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독교 종합일간지 '기독일보 구독신청 바로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