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지윤 박사
강지윤 박사

사람은 태어난 이후 자신을 바라봐주는 부모에 의해 자신의 자아를 어떻게 바라보게 되는지가 결정된다. 미러링(거울반영), 이 작고도 커다란 리액션 때문에 자라서도 사람들 앞에서 계속해서 자신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자신감 없게 살며 불행감을 느끼게 된다.

“넌 왜 그 모양이야?”
“그 정도로 공부해서 좋은 직장에 취직이나 하겠어?”
“너 자꾸 먹다가는 돼지같이 살찐다.”
“형 좀 본받아라. 커서 뭐가 되려고 저래.”

생각없이 하루에도 수없이 아이들이 듣게 되는 평범한 부모들의 말이다. 자신이 그런 말을 했다는 사실도 모를 정도로 무의식적으로 그런 말을 한다. 그것은 아마도 자신의 부모에게 들었던 말이 내면에 담겨있다가 자기도 모르게 흘러 나오기 때문일 것이다.

실수를 용납해주며 용기를 주었던 부모를 가진 사람은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고 나아간다. 그러나 실수할 때마다 핀잔을 들었거나 꾸중을 들었다면 조그만 실수에도 심한 수치심을 느끼며 그 자리에 주저앉게 된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부모가 준 말의 상처 때문에 조금도 성장하지 못한 채 부모를 원망하며 수치스러운 감정에 몸서리치면서 그 자리에 웅크리고 있어야겠는가. 당신은 이제 일곱 살도 열 살도 아니다. 당당히 성인이 되었고 자아를 스스로 책임을 질 수 있는 독립적인 존재가 되었다.

내면화 되어 얽혀있는 수치심은 묻어놓을수록 커지기 때문에 반드시 해결하면서 살아가야 한다. 아무리 해결해도 오랫동안 학습된 감정의 기억 때문에 모든 수치심을 몰아내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깊은 곳에 묻혀있는 아주 원초적인 ‘나의 수치심의 이유’를 찾아내고 해결해야 한다.

수치심이 크게 자리잡고 있는 사람일수록 불안과 열등감이 크다. 불안이 크니 당연히 분노가 크다. 그리고 그 분노가 쉽게 타인을 향할 수 있다.

불특정 다수에 대한 혐오감과 분노가 ‘다양한 묻지마 범죄’를 양산하기도 한다. 대놓고 범죄를 저지르지 않더라도 몰래 숨어 익명으로 연예인의 기사에 악플을 달아서 상처를 주거나 소극적 분노나 악의적인 부정적 평가를 해서 상대방이 상처받는 모습을 보며 쾌감을 느끼는 변태적인 이상성격자가 되기도 한다.

코로나 블루가 길어지고 일상화 되면서 우리는 더욱 타인에 대한 경계와 혐오감을 키우게 되었다. 이런 때일수록 타인에 대한 긍휼과 공감을 잊어버리면 안된다. 사람은 모두 연약하며 완벽하지 않기 때문이다.

수치심은 자신과 타인에 대한 기준을 몹시 높게 만들어 쉽게 비난하고 비판하게 한다. 그러면서 더욱 큰 부끄러움 속에 자신을 숨기게 된다.

요즘 TV프로에서 많이 하는 노래경연대회는 1등과 탈락자를 구분하게 되는데, 이를 몹시 불편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떨어진 사람들의 수치스런 감정에 자신의 감정을 이입하면 훨씬 불편하고 비참한 상태가 되기도 한다. 어떤 사람은 등수와 상관없이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를 열렬히 응원하기도 한다.

탈락자의 얼굴에 스치는 절망감과 비참한 느낌이 비록 찰나라 할지라도 나 역시 가슴 아프다. 그 사람이 포기하지 않고 계속 도전해서 언젠가는 잘나가는 가수가 되길 응원하는 마음도 생긴다.

사회는 경쟁구도로 이루어져있고 학교에서는 등수로 학생을 구분한다. 어쩔 수 없이 생긴 변별력을 위한 시스템들이 수치심을 만들기 전부터, 인간 내면에 형성되고 자리잡은 수많은 부정적 감정 중에 하나가 수치심이다.

이 수치심의 원초적인 모습들을 조금씩이나마 덜어내지 않으면 이 세상에 사는 것이 버겁고 숨 막히고 힘겹게 느껴지게 된다. 그러면 이 수치심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떤 가수가 이렇게 말했다. “저는 00씨가 상을 타면 너무 배가 아플 것 같았어요. 그래서 저도 도전했어요....” 이 말을 들은 사람들은 그 사람의 말에 폭소를 터뜨렸다. 그런 말을 하기가 쉽지 않다. 자신의 열등감과 못난 모습을 드러내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그 가수가 솔직하게 자기노출을 하는 건강하고 자존감 높은 사람으로 보였다. 수치심을 벗을 수 있는 가장 쉽고도 어려운 방법은 자기노출이다.

열등감과 수치심을 노출하는 것이 쉽지는 않다. 개그맨들이 자신의 콤플렉스를 희화화하며 사람들에게 웃음을 주는 것을 자주 보게 된다. 신체적 수치심, 정신적 수치심, 사회적 수치심, 정서적 수치심, 수많은 수치심은 노출할수록 신기하게도 자신이 느끼는 수치심의 강도가 작아진다. 그리고 그런 사람에게 사람들은 방어적인 태도를 풀고 편안해하기 시작한다.

모든 수치스러운 느낌과 규정에는 타인의 기준과 시선이 있다. 키가 작거나 몸이 뚱뚱하거나 눈이 작거나... 어느 때부터인가 tv가 미의 기준이 되어 버렸다. 브라운관 안에서 예쁘게 비쳐져야 미인이며 미남이 된다. 영상 문화가 없던 시기에는 그래도 각자의 개성에 의해 아름다움의 기준이 지금보다는 다양했던 것 같다.

타인이 설정해 놓은 높은 기준으로 자신의 신체를 대비하며 끝없이 수치심을 키우는 아동기 청소년기의 아이들은 그 수치심을 채 해결도 하기 전에 공부와 학벌에 대한 기준으로 평가받고 인간 자체로서의 존엄함은 제대로 키우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자신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타인에 대해서는 공격적인 태도만 키우게 되었다.

심리상담에서 아주 중요한 것이 ‘자기노출’이다. 수십년간 숨겨놓았던 자신만의 수치를 상담실에서 조금씩 노출시키면서 때로는 상담자에게 심한 저항을 느끼게 되고 상담자가 자신을 싫어한다고 느끼기도 한다. 왜 자신을 수치스럽게 하냐고 대놓고 화를 내며 증오심을 표출하는 경우도 있다.

그런데 그 살얼음판 같은 과정을 거치는 동안 수치심의 치유가 조금씩 일어나는데, 수치스럽게 여겼던 것들이 어느 순간부터 아무 것도 아니었다는 것을 통찰하게 되면서 부터다. 그리고 다른 사람에게도 흔히 있는 동일한 감정이라는 깨달음이 오랫동안 자신을 괴롭힌 수치심에서 비로소 놓여나게 한다.

장자크 루소가 이렇게 말했다.

“모든 사람은 벌거벗고 가난하게 태어나며, 삶의 비참함, 슬픔, 병듦, 곤란과 모든 종류의 고통을 겪게 마련이며 종국에는 모두 죽게 된다. …인간을 사회적으로 만드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인간의 연약함이며, 우리 마음을 인간애로 이끌고 가는 것은 우리들이 공유하는 비참함이다.”

자신이 결코 완벽할 수 없으며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는 자기수용의 과정이 깨달음의 과정과 함께 자신을 성장시킨다. 어른이 되고 노인이 되어도 이러한 약한 모습의 자기자신을 수용하지 못하면, 자신보다 약자를 공격하거나 조종하는 사람이 되고 만다.

우울증이나 불안증 같은 심리적 정신적 질병의 뿌리에는 수치심이 매달려 있다. 기억도 나지 않는 어린시절부터 최근까지, 비교 당하고 비판당하며 용납되지 못했던 자아에서부터 수치심은 분열되고 확산되어 지금까지 자신을 지배해 왔다.

이제는 자신의 수치심의 원초적 이유를 들추어보며, 타인의 기준과 평가가 완벽하지 않다는 사실도 알아야 한다. 또한 그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사실도 통찰해야 한다. 그리고 지금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주고 아껴주고 존중해 주어야 한다. 그래야 타인의 시선에 휘둘리지 않고 ‘나’로서 존재하며 ‘나’인 것을 감사하며 행복하게 살 수 있게 된다.

주님께서도 우리에게 완벽해지라고 하지 않으셨다. 우리는 주님을 닮아가도록 조금씩 조금씩 나아가면된다. 강박적인 수치심은 퇴보와 퇴행만을 부르므로 지금의 나를 수용하고 기도하며 나아가면 된다.

강지윤(한국목회상담협회 감독, 심리상담학 박사)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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