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아씨들>이 기독교적인 작품?
<천로역정>과 <작은 아씨들>
네 자매가 싸워야 할 적(敵)
조의 목표는 선머슴이 아니다

최휘운
최휘운 독서논술 교사

루이자 메이 올컷(Louisa May Alcott)의 소설 <작은 아씨들>은 지금까지 7번이나 영화화되었다. 1917년부터 2019년까지 100년이 넘도록 영화화되고 있는 것이다. 기독교적인 작품이 영화화될 때는 반갑기도 하지만 걱정이 앞설 때가 많다. 기독교적인 면은 자주 제외되거나 재해석 대상이 되곤 하기 때문이다. 이 <작은 아씨들(Little Women, 1868)>은 시작부터 친기독교적이다. 그러나 영화들은(2019년작, 1994년작, 1949년작. 다른 작품들은 확인하지 못했다) 이 부분부터 삭제하고 시작한다. 원작을 읽지 않고 영화만 봐 온 이들은 작품을 다르게 인식할 수밖에 없다. '작은 아씨들이 기독교적인 작품이라고?' 하는 분들이 분명 있을 것이다. 그래서 영화들이 부지런히 삭제해 온 부분들 얘기를 좀 해 보려고 한다.

<작은 아씨들>의 서문은 이렇게 끝난다.

- 존 번연의 글을 루이자 메이 올컷이 다시 씀

시작부터 반가운 이름이 등장한다. <천로역정>으로 유명한 존 번연(John Bunyan)이다. <작은 아씨들>의 네 자매는 어렸을 때부터 천로역정 놀이를 하며 놀곤 했다(제1장의 제목이 '순례자 놀이'다). '멸망의 도시'로 정한 지하실에서부터 '천상의 도시'로 꾸민 집 꼭대기까지 올라가는 놀이다. 함께 이 시절을 회상하던 중 막내 에이미는 그것이 어릴 때나 어울렸던, 이제는 그만둘 때가 된 놀이인 것처럼 말한다. 그때 어머니가 하는 말, 그리고 둘째 조의 반응은 이 책의 주제를 보여 준다.

"나이를 먹었다고 해서 못할 건 없단다. 우리는 언제나 어떤 식으로든 이 놀이를 하면서 살고 있으니까. 우리의 짐은 바로 여기 있고, 우리의 길은 앞에 놓여 있으며, 선함과 행복에 대한 바람은 길잡이가 되어 우리를 어려움과 실수를 지나 평화로운 곳으로 데려가 주거든. 평화로운 곳이 진정한 '천상의 도시'지. 자, 나의 어린 순례자들아, 너희는 장난이 아니라 진심으로 다시 시작하면 된단다. 아버지가 집에 돌아오시기 전까지 너희가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 보는 거야."

이에 대한 조의 반응은 이랬다.

"오늘 밤 우린 '절망의 수렁'에 있었는데, 어머니가 오셔서 책에서 '구원자'가 그랬듯이 우릴 꺼내 주신 거야. 우린 기독교인답게 임무를 다해야 해. 우리가 어떻게 하면 좋을까?"

이것이 바로 <작은 아씨들>의 핵심이다. 남북전쟁에 참전한 아버지를 기다리며 순례의 길을 가는 네 자매의 이야기. 아버지는 나이가 많아 굳이 참전하지 않아도 됐지만 자원하여 군목(軍牧)이 되었고, 그런 아버지를 존경하는 딸들은 어머니와 함께 힘든 시기를 이겨 나간다. 아버지의 편지에 대한 딸들의 반응은 앞으로 어떤 이야기가 펼쳐질 것인지를 잘 보여 주는데, 아버지의 요구는 의무를 성실히 이행하고 마음 속의 적(敵)과 용감히 싸우라는 것이었다.

"난 정말 이기적인 아이야! 하지만 아버지가 실망하시지 않게 더 잘하려고 노력할 거예요!" (막내 에이미)

"난 겉모습에만 너무 신경 쓰고 일하기 싫어했지만, 앞으로는 될 수 있는 한 그러지 않을래." (첫째 메그)

"나는 아버지가 부르신 대로 '작은 아씨'가 되도록 노력할 거야. 거칠게 함부로 굴지 않을 테야. 이제는 다른 데 있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은 접고, 여기서 내 의무를 다할 거야." (둘째 조)

(셋째) "베스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파란 군용 양말로 눈물을 닦고는 힘을 다해 뜨개질을 했다. 시간을 낭비하지 않고 가장 가까이 있는 일부터 하면서, 시간이 지나 행복한 시절이 다시 왔을 때 아버지가 좋아하실 모습이 되겠노라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네 자매는 이렇게 힘써 각자의 싸움을 펼친다. 그리고 1년 후 돌아온 아버지로부터 위로와 격려를 받는다. 돌아온 아버지는 딸들의 싸움에 대해 각각 평가를 내려 주는데, 그 내용을 다 밝히기엔 너무 길다. 그래도 조 얘기는 조금 해야 하는 것이, 조를 영원한 선머슴으로 기억하는 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아버지의 평가는 이랬다.

"머리는 짧아졌지만 일 년 전 내가 떠날 때의 '선머슴 조'가 아니구나. ··· 상스러운 말도 안 하고, 전처럼 바닥에 벌렁 눕지도 않으니 말이다. ··· 표정은 더 부드러워져서 아버지는 그 얼굴을 보는 게 좋단다. ··· 또 동생을 어머니처럼 보살펴 줄 줄도 알고. ··· 믿음직스럽고 성실하고 상냥한 아가씨가 되었으니 만족스러워."

조의 반응은 어땠을까?

"조의 날카로운 눈빛이 잠시 흐려졌고, 벽난로의 불빛에 비친 여윈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조는 아버지의 칭찬을 들을 자격이 조금은 있다고 생각했다."

이 이야기는 네 딸의 성장을 보여 주기도 하지만, 항상 본보기가 되는 어머니의 모습도 잘 보여 준다. 네 딸들은 그런 어머니를 매우 존경하고 사랑하는데, 어머니는 자신이 굳건할 수 있는 비결을 이렇게 밝힌다.

"내게 도움이 필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이는 건 아버지보다도 좋은 친구인 하나님이 위로해 주시고 붙잡아 주시기 때문이야. 조, 이제 인생의 고난과 유혹이 시작될 거고, 그런 게 아주 많을지도 몰라. 하지만 네가 아버지의 힘과 사랑을 믿듯 하나님의 힘과 사랑을 느낄 수 있다면 모든 것을 극복하고 잘 해낼 수 있을 게다.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믿을수록 그분이 더 가까이 느껴질 거야. 그러면 인간의 힘과 지혜에 의존하는 마음은 줄어들겠지. 하나님의 사랑과 보살핌은 지치지도 변하지도 않고, 빼앗기는 일도 없이 평생 동안 평안과 행복과 힘의 근원이 될 거야. 이것을 믿고 모든 근심, 소망, 죄, 슬픔을 하나님께 털어놓으렴. 엄마한테 털어놓은 것처럼 말이야."

여기까지 읽고 나면 '이 작품이 매우 기독교적인 작품이구나!' 하고 생각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작품을 <천로역정> 같은 작품으로 생각한다면 실망할 수 있다. 친기독교적인 건 확실하지만, 기독교의 깊은 면까지 보여 주는 건 아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체벌에 찬성하지 않는다든지(잠 13:24), 에이미가 로마가톨릭 신자에게 신앙의 조언을 받는 장면 등은 아슬아슬한 마음이 들게도 한다("아름다운 것을 사랑하는 에이미는 성모님의 상냥한 얼굴을 아무리 바라보아도 싫증이 나지 않았고 그러는 동안 마음이 따뜻해졌다. ··· 에스더가 은 십자가가 달린 묵주를 주었지만, 에이미는 벽에만 걸어 놓고 사용하지 않았다. 개신교도가 기도할 때 이런 물건을 쓰면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완벽한 책은 있을 수 없으니 감안해서 읽도록 하자.
여기에 작품 속 기독교 이야기를 다 꺼내 놓은 것은 아니다. 나머지는 원작에서 직접 확인해 보시길···.
아래는 둘째 조가 지은 시(詩)다. 의무에 지친 이들에게 바친다.

거품의 노래
-조세핀 마치

설거지통 여왕이여, 흰 거품이 높이 떠오르는 사이
나는 즐겁게 노래하네.
빡빡 씻고 헹구고
행주를 짜서
맑은 공기 속으로 나가 너니
햇살 좋은 하늘 아래서 나부끼네.

우리의 마음과 영혼에서
한 주의 때를 씻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물과 공기의 마법으로
우리도 그처럼 순결해진다면
지상에 영광의 씻는 날이
있으련만!

쓸모 있는 인생길에서
마음의 평화가 피어날 것이며
분주한 마음은 슬픔이나 근심이나
우울을 생각할 짬이 없으니
우리가 용감하게 비질하면
불안한 생각이 씻기리.

내게 나날이
할 일이 주어져 다행이네.
일은 건강과 힘과 소망을 안겨 주니
나는 명랑하게 말하리.
"머리여, 생각하라. 가슴이여, 느껴라.
하지만 손이여, 그대는 늘 움직여라!"

최휘운(독서논술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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