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호 목사
김민호 목사

우리는 태어나서 한 번도 경험하지 못한 세계적 판데믹 사태 속에 있다. 판데믹(pandemic)이란 세계적으로 전염병이 창궐하는 상태를 뜻한다. 중세기를 강타했던 흑사병은 유럽 총인구의 30~60%를 죽음에 몰아넣었다. 당시 유럽은 남녀노유, 빈부귀천을 넘어 아무도 이 공포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었다. 때문에 판데믹 공포는 정치, 사회, 종교적으로 엄청난 파장을 몰고 왔다. 사람들은 흑사병 공포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했다. 이 과정 속에서 애꿎은 여자들을 마녀로 몰고, 유대인들을 흑사병의 원흉으로 여겨 유대인 혐오가 극에 달했다. 신학적으로는 채찍으로 자해하고 고행하는 풍조와 종교적 각성도 생겼다.

분명한 사실은 흑사병 이전과 이후, 인류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됐다는 점이다. 경제체제는 지주가 소작농을 착취하던 전통적 자본주의에서, 프로테스탄트 윤리와 정신이 주도하는 근대 자본주의 체제로 전환됐다. 정치제도는 ‘왕이 곧 국가’로 대표되는 봉건군주제도에서 ‘법이 곧 왕’ 되는 법치주의가 고개를 드는 계기가 됐다. 법이 왕 역할을 하는 정치 체제는 개혁파 언약신학이 그 초석을 이루었다(러터포드의 법과 왕 참조). 이처럼 유럽 전체를 휩쓸었던 전염병은 유럽 역사의 대전환점(great turning point)이 됐다. 흑사병 이후의 변화를 이상규 교수는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약 2년 반 만에 인구의 3분의 1이 죽었으니 그것이 남긴 사회적 변화는 가히 혁명에 비견될 수 있을 것이다. 어떤 이들은 제1차 세계대전과 비교하기도 한다. 인구가 감소하자 자연히 인건비가 상승했고, 부와 권력을 누리던 지주들은 파산했으며, 중세의 특징이던 봉건주의도 붕괴됐다. 정치나 경제적인 면뿐 아니라, 사회 전반에 변화가 나타났다.”1)

물론 유럽을 휩쓴 판데믹의 외연만 보면 너무 끔찍하다. 그러나 그 과정 속에는 인간의 무능함과 사악함을 드러내시며, 회개케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보게 된다.

과학주의 관점으로 모든 것을 해석하는 분들에게 이런 주장은 수용하기 어려울지 모른다.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흑사병은 신(神)에 의한 자연 발생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쟁 승리를 위해 감염된 시체를 활용한 생화학 전쟁의 산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원인이 어디에 있었든지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 안에 있다. 이렇게 보는 것이 기독교 신앙을 가졌다고 하는 사람들의 전제다. 인간은 악한 의도로 행동하고 파괴했지만, 하나님은 모든 것을 협력하여 선을 이루신다.

우리의 문제로 넘어가자. 작금의 인류는 세계적 판데믹으로 망연자실 상태에 있다. 전 세계 경제는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전염병으로 극심한 침체에 떨어졌다. 경제적 문제뿐 아니다. 정치와 문화의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고 있으며, 사람들의 정서도 우울함과 패배 의식에 잠식되고 있다. 과거 역사의 한 장면을 보는 듯하다.

이런 상황 속에서 교회는 어떤 태도를 견지해야 하겠는가?

교회는 자기 본연의 자리를 지키고 의연해야 한다. 세상을 향해 전능하신 하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탁월함과 구별됨을 보여 줘야 한다. 애석하게도 작금의 교회는 세상과 아무런 구별됨 없다. 세상과 마찬가지로 혼란과 불안에 빠져 있다. 그 대표적인 증거로 신앙의 생명이라 할 수 있는 공예배를 너무도 쉽게 타협했다. 우리는 고난과 위기 때일수록 예배의 자리를 지키고 주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위로와 안식을 추구했어야 했다. 주님께서 공급해주시는 평안과 안식 안에 있을 때 비로소 의연할 수 있음을 보여야 했다.

물론 교회가 전염병의 발원지라는 오명을 쓰지 말아야 한다. 이 문제는 각 교회가 예배 시간 거리두기, 마스크 착용, 식사 조리를 금지, 철저한 방역으로 얼마든지 극복할 수 있다. 아니 극복됐다. 교회를 통한 감염률이 1.5%에 불과하다는 통계(3월 27일 기준)는 그 증거가 된다. 예배가 결코 질병 감염 요인이 될 수 없으며, 예배당은 가장 안전한 장소 가운데 하나라는 것이 증명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교인들의 예배 출석률은 50%에서 적게는 22~30%로 급감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기독교인들은 과연 무엇을 의지하며, 무엇을 통해 위로와 평안과 안전을 추구했는지 묻고 싶은 통계다.

그러면 우리는 코로나 사태 이후를 어떻게 대비해야 하겠는가?

무엇보다 자기 점검과 회개가 필요하다. 자기반성과 회개가 없다면 다시 이런 문제가 발생했을 때, 동일한 절망에 빠질 것이다. ‘한 번 실수는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라는 말이 있다. 부지중에 갑자기 당한 실패에 너무 낙심하지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동일한 실수를 반복하는 것은 어리석음과 불신앙의 태도다.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하리라”(잠 29:1)는 말씀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이번 판데믹 사건은 하나님께서 교회를 향한 책망이다. 교회가 얼마나 예배를 등한시했는지, 얼마나 위선적으로 예배했는지 보여준 하나님의 행위다. 목회자들부터 예배의 가치를 너무 등한시 여겼다. 모든 교회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상당수 교회가 예배를 오락처럼, 문화생활처럼 만들어버렸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어쩌면 말라기 1:10의 말씀이 우리에게 해당되지 않는가 두렵기까지 하다.

“만군의 여호와가 이르노라 너희가 내 제단 위에 헛되이 불사르지 못하게 하기 위하여 너희 중에 성전 문을 닫을 자가 있었으면 좋겠도다. 내가 너희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너희가 손으로 드리는 것을 받지도 아니하리라”

다음으로 권하고 싶은 것은 교회의 숫자보다 정체성 회복에 집중해야 한다는 점이다. 교회의 존재 목적은 무엇인가? 지옥 갈 사람 천국 보내는 것인가? 예배가 불경건과 신성모독적인 사람들로 넘치더라도 한 명이나마 더 구원받으면 감수할 수 있는 것인가? 전도가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도해야 한다. 그러나 전도 이전에 추구해야 할 우선순위가 있다.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 지어다”(벧전 1:16)는 명령이다. 또 “그리스도를 위하여 너희에게 은혜를 주신 것은 다만 그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받게 하려 하심이라”(빌 1:29)는 말씀도 기억해야 한다.

기독교 신앙은 다른 어떤 것으로 얼마든지 대치할 수 있는 문화생활이 아니다. 인간이 존재하는 근본 목적이다. 물론 예배를 너무 주일 공예배에 치중하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처럼 이것도 행하고 저것도 버리지 말아야 한다. 공예배 없이 삶의 예배는 상상할 수 없다. 공예배 없는 삶의 예배, 삶의 예배 없는 공예배는 동전의 앞뒷면과 같기 때문이다. 일상 삶 속에서 그리스도를 위해 고난받는 일이 가능하려면 공적 예배를 위해 고난받는 일도 얼마든지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판데믹 이후를 준비하기 위해 교회가 다시 정비해야 할 기초 중의 기초다. 비록 적은 수라도 다시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하는 예배자를 세우는 데 힘써야 한다. 처음에는 힘들다. 그러나 이렇게 성도들이 한 명씩 세워지면 얼마 가지 않아 견고한 교회가 된다. 또다시 제2의 판데믹과 유사한 상황이 오더라도 교회는 의연할 것이다. 아니 도리어 세상 사람들에게 위로와 안정과 평안을 주는 정체성을 감당하게 된다. 예배의 회복만 이루어지면 포스트 코로나19는 위기가 아니라 기회로 주신 하나님의 섭리임을 간증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미주

1) https://www.christiantoday.co.kr/news/330040 이상규,「중세 흑사병은 하나님의 징계였을까」

김민호 목사(회복의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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