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라디아 교회는 바울이 첫번째 선교 여행에서, 특히 선교 여행 중 병이 깊어져 밖에 내다 버려도 누가 뭐라 하지 않을 정도로 건강과 몰골이 아주 심각했던 상태에서 전도한 교회다. 하지만 갈라디아의 이방인들은 이사야서 53장의 고난 받는 종의 모습처럼, 전혀 볼품 없고 심히 초라하고 연약해진 사도 바울의 겉모습이 아니라 그가 가진 복음을 알아보고 귀하게 받아들였다. 그들은 질그릇이 아니라 질그릇 속에 담긴 보화에 주목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이 전한 복음으로 구원 받고 변화되었고, 성령으로 충만한 자들이 됐다. 그리고 이방 땅이었던 갈라디아에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가 세워지게 됐다.

바울은 갈라디아에서의 아름다운 추억을 가슴에 깊이 담고 있었기에 몰리고 쫓기고 무시당하고 박해당하는 가운데서도 무려 세 번이나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선교여행을 할 힘을 얻었다. 바울에게는 거부 당하는 고통보다 가뭄에 콩나듯 하더라도 성령 안에서 일어나는 영접의 기쁨, 전도와 영혼 구원의 기쁨이 더 컸다. 그 소중한 경험을 안겨준 곳이 바로 갈라디아 교회였다. 바울에게 갈라디아 교회는 특히 의미 있고, 소중한 추억이 있는 교회였다. 

그런데 이 갈라디아 교회의 성도들 중 일부가 거짓 형제들의 유혹에 넘어가 사도 바울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바울의 사도직에 대해, 그리고 바울이 전한 복음에 대해서 문제를 삼았다. 오늘날로 치면, 바울이 무허가 신학교 출신에 목사 안수도 안 받았고 이단적인 복음, 가짜 복음을 전했다고 공격한 것이다. 바울에게 배신도 이런 배신이 없었다. 바울도 믿었던 도끼에 발등을 제대로 찍히다 보니 격해져서 갈라디아서를 써서 보냈다. 그래서 갈라디아서는 1장 시작부터 다른 서신들과 달리 안부를 묻는 인사말도 없이 강력한 어투로 보내진 아주 전투적인 서신이다. 

사도 바울은 원래 회심 전에는 초대교회를 지독하게 박해하기로 유명한 사람이었다.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요주의 인물 1순위였다. 사람을 태워죽일 듯 뜨거운 햇빛이 작열하는 중동의 대낮에 초대교회 교인들을 잡아들이겠다면서 사막을, 광야를 가로질러 다녔던 사람이다. 정말 불 같은 성격의 사람이었다. 그런 바울의 성품을 갈라디아서를 읽어보면 어느 정도 느낄 수 있다.

하지만 사도 바울은 서신의 마지막인 6장에서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한다. "형제자매 여러분, 어떤 사람이 어떤 죄에 빠진 일이 드러나면,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사는 사람인 여러분은 온유한 마음으로 그런 사람을 바로잡아 주고, 자기 스스로를 살펴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여러분은 서로 남의 짐을 져 주십시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이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실 것입니다."(갈 6:1-2, 새번역)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성령의 열매로도 온유를 말했으며, 예수님도 자신에 대해 나는 온유하다고 하셨다. 그리스도인 안에는 반드시 온유함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바울은 사람이 죄에 빠지면 바로잡되, 온유하게 바로잡으라고 한다. 혈기로, 분노로 바로잡으려고 하지 말라는 것이다. 아이도 잘못된 언행에 대해 혈기로, 분노로 바로 잡으려고 하다가 오히려 아이를 망치는 부모들이 너무나 많다. 온유함이 사라지면, 바로잡혀지지 않고 더 빗나간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성령의 사람이라면, 그 안에 반드시 온유함이 있어야 한다. 거칠고 폭력적인 언행을 일삼는 그리스도인들은 자신이 성령 안에 거하고 있는지 아닌지 점검해보아야 한다. 사도 바울도 거칠게 갈라디아 교회를 바로잡으려 했다면, 오히려 문제만 더 키웠을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자신을 공격하는 갈라디아 교회를 온유하게 바로잡았다. 

그리고 바울은 자신을 돌아보라고 한다. 상대의 범죄를 보면서, 상대의 실수를 보면서 그를 정죄하거나 판단만 하기보다, 내 안에는 그런 문제가 없는지 돌아보라는 것이다. 내 안에도 이미 범죄할 수 있는 문제가 있을 수도 있지만, 그것을 전혀 보지 못하고 살 수 있다. 그러다 나도 죄를 범하고 심각하게 무너질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다른 사람의 눈에 티를 빼내기 보다 내 눈에 있는 들보를 빼내라고 하셨다. 다른 사람을 정죄하고 판단하기만 하고, 자신을 돌아볼 줄 모르는 이들은 반드시 크게 넘어지게 되어 있다. 그의 눈에 있는 들보가 그의 인생을 망칠 것이다.

바울은 마지막으로 다른 사람의 짐을 져주라고 한다. 이것은 정죄의 마음이 아니라 대속의 마음, 속죄의 마음을 가지고 살라는 것이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것에 대해 "그러므로 예수도 자기 피로써 백성을 거룩케 하려고 성문 밖에서 고난을 받으셨느니라. 그런즉 우리는 그 능욕을 지고 영문 밖으로 그에게 나아가자"(히 11:12-13)고 했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대속의 마음, 속죄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상대의 짐을, 상대의 죄를, 우리의 모든 죄와 짐을 모두 자신의 것으로 여기셨다. 그리고 그것을 지고 십자가에서 모두 대가를 지불하고 갚으셨다. 바울은, 히브리 기자는 그리스도의 제자들도 반드시 그러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라 하면서도 그저 다른 사람에 대한 정죄와 심판만 일삼고, 욕하고 공격하기만 하는 것은 올바른 모습이 아닌 것이다. 그 안에 성령이 없는 것이고, 예수의 십자가가 없는 것이다. 

지금의 한국사회와 한국교회는 온갖 죄와 갈등과 분열, 다툼으로 가득하다. 특히 사람들은 혈기와 분노로 서로를 바로잡겠다고 하면서 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사회와 교회를 더 혼란스럽게만 만들고 있다. 그래서 이 시대는 온유한 그리스도인, 다른 사람보다 자신부터 바로잡는 그리스도인, 그리고 예수님처럼 대속의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을 부르고 있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의 사람들을 따라가지 말고 성경의 가르침으로 돌아가 성경의 가르침대로 살아야한다. 그것이 세상의 어둠을 밝히고 부패를 없앨 수 있는 빛과 소금이 되는 길이다. 너무나 뻔한 이야기인 것 같지만, 그 뻔한 걸 하지 않아서 오늘날 사회와 교회는 죽음으로 질주하고 있다. 성경은 우리에게 길이요 등이요 빛이 된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않고 자기 생각대로, 세상 논리대로 살아가고 있다. 여호와께로, 성경으로, 십자가로 돌아오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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