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NCCK 총무 김영주 목사
NCCK 前 총무, 한국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원장 김영주 목사. © 기독일보DB

예수 탄생의 계절이다. 모두들 예수를 맞이하기 위해 분주하다. 이제 예수탄생은 먼 갈릴리의 한 작은 마을 나사렛에서 몇몇 사람들이 알았던 사건이 아니라, 온 세상의 사람들이 알고 축하하는 큰 사건이 되어 있다. 교회는 말할 것도 없고 거리는 화려한 불빛으로 장식되고, 크리스마스 캐럴 노래가 흘러나고 있다.

성탄절은 한해를 마무리하는 계절인 12월 말이라는 시기와 맞물려 우리 모두를 들뜨게 하고 있다. 그동안 미뤄 왔던 감사의 마음을 표시하고 모두들 각종 모임이 조직되고 나름대로 분주하다. 지난 한주 간 나 역시 약간은 들뜬 마음으로 여러 모임에 참여했다. 친한 벗들과의 만남. 정치지도자와의 만남, 시민사회 지도자들의 모임, 교계지도자들과의 만남, 세미나를 비롯한 교계 행사 등에 참여하였다.

그 모임들에 참여하면서 나를 붙잡고 있었던 생각은 '곧 크리스마스인데 우리 한국사회와 교회는 예수님을 기쁜 마음으로 받아드리고 환영할 준비가 되어있는지?' 이었다. 유감스럽게도 그곳에는 예수님의 자리를 배려한 노력이 없어 보였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내 눈에는 그렇게 보였다.

좀 더 발칙한 생각을 하자면 " 만약 내가 예수라면 어디로 갈까."라는 질문이다.

지난 주간 우연히 만난 박사 한분이 생각난다. 그분은 본래 천주교인이었는데 개신교 신앙인으로 전환한 분이다. 최근 그분이 속해있는 교회의 목사가 법원으로부터 자격 상실이라는 판결을 받아 교회의 분쟁이 커지고 있어 교회에 출석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한 지식인의 고민 뿐 아니라, 양식 있는 기독교인들의 고민일 것 같아 안타까웠다.

한국교회는 예수님을 교회라는 울타리 안에 감금하고 있다는 지적은 과한 것인가. 예수는 그들의 언어의 장식이 되고 생활 방편이 되고, 산업이 되어있고, 집단의 이익을 보호해 주는 이데올로기가 되어 있었다.

유진 피터슨의 지적처럼 한국교회는 '소비자중심의 교회'가 되고 있다. 나 자신 오랜 세월동안 예수 믿고 살아왔지만, 아직까지도 기독교문화가 어색하다. 간디의 말처럼 '예수님이 가르치신 것을 그리스도인들만 모른다.'는 말이 뼈아프다.

칼릴 지브란은 「모래 물거품」이라는 시에서 이렇게 말했다.

'백년마다 한번씩/ 나사렛 예수와/ 기독교인들의 예수는 삼나무 숲속에서 만납니다./ 그들은 오래동안 이야기를 나눕니다./ 언제나 나사렛 예수는 이렇게 말하며 사라져 갑니다./ 나의 친구여, 우리가 결코 일치할 수 없음이 참으로 두려운 일입니다.'/

늘 주변부 신앙인으로 살아왔다고 변명하며 기독교를 비판하기에는 너무 구차하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마리아를 생각해본다. 천사의 전언 "기뻐하여라. 은혜를 입은 자여, 주님께서 그대와 함께 하신다" 을 들고는 무척 당황해 한다. "나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이런 일이 있겠습니까?"라고 대답한다. 누가는 마리아의 입을 빌려 예수의 탄생은 당시 이스라엘의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기대했던 메시아의 오심과 전적으로 다르다는 것을 설명하고 있다.

아마 누가 자신도 자신이 믿고 있는 메시아 탄생이 나사렛의 한 초라한 여인으로부터 시작되고 있다는 사실을 매우 곤혹스럽게(?) 여기고 있는 것은 아닐까? 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래서 예수탄생의 장소를 나사렛에서 다윗의 동네인 베들레헴으로 옮겨 놓고 아기 예수가 하나님이 그의 백성들을 보호하신다는 상징인 구유와 왕적인 권위를 나타내는 강보에 싸였다고 표현한 것이리라. 그리고 목자들이 구유를 방문한 사실을 설명하면서 목자 출신인 다윗과 연관시키고 있다.

(누가는 예수가 탄생했다는 사실보다 오히려 마리아가 새로이 태어난 아이를 어느 곳에 두었느냐를 말하는 데 더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마리아가 첫 아들을 낳아서 포대기에 싸서 구유에 눕혀 두었다.' / 소는 그 임자를 알고 나귀는 그 주인의 구유를 알건마는 이스라엘은 깨닫지 못 하는도다.(사1:3) / 강보는 가난의 표식이나 이스라엘의 메시야가 그의 백성들 가운데서 버림받은 자가 아니라, 잘 영접되고 보호받는 자라는 표식이다.)

그 점은 오늘의 또 다른 본문인 이사야서를 예수 탄생의 예언으로 인용되고 있다는 점을 보아도 짐작할 수 있다. 유명한 메시아 곡의 가사가 된 구절이 되기도 한 것인데 이는 다윗의 후손인 히스기야왕의 대관식에 즈음하여 공표된 예언시라고 이해되고 있다.

"한 아기가 우리를 위해 태어났다. 그는 우리의 통치자가 될 것이다. 그의 이름은 놀라우신 조언자, 전능하신 아버지, 평화의 왕이라 불릴 것이다. 그의 왕권은 점점 더 커지고 나라의 평화도 끝없이 이어질 것이다."

당시 사람들이나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 나사렛의 한 작은 마을에서 수줍게 태어난 예수의 탄생을 받아들이기에는 무언가 허전한 것 같다.

그러나 기적처럼 우리를 앞도하면서 나타나서 모든 사람들이 알아보며 그렇게 승복할 수밖에 없는 모습으로 오시는 그런 메시아는 없다. 예수는 마리아가 느꼈던 당황스러움으로 우리에게 오실 것이다. 그분을 맞이하는 것은 어쩌면 처녀가 남편과 상관없는 아기를 잉태해서 키워야 하며, 그 아이가 성장해서는 세상의 기득권과 적대적 관계를 형성하는 아슬아슬한 장면을 목도하게 되어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하며 마침내 가슴을 후며 파는 아픔을 안겨주는 십자가 처형을 바라보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성탄의 절기에 우리는 예수님을 모셔야 한다. 예수께서 오실 수 있도록 잘 준비해야 한다. 그리하여 주가 내 안에 거하고 내가 주안에 거하는 신비한 합일을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우리 모두 작은 예수가 되어 "더없이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주님께서 좋아하시는 사람들에게 평화로다." 라는 천사의 찬양이 실현되는 신비한 경험이 있는 성탄절이 되었으면 한다.

디도서는 하나님의 구원의 은혜를 받은 그리스도인의 자세를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그 은혜는 우리를 교육하여, 경건하지 않음과 속된 정욕을 버리고, 지금 이 세상에서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게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복된 소망 곧 위대하신 하나님과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이 나타나기를 기대합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위하여 자기 몸을 내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를 모든 불법에서 건져내시고 깨끗하게 하셔서 선한 일에 열심을 내는 백성으로 삼으시려는 것입니다.'

다른 길은 없다. 오늘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세상에서 신중하고 의롭고 경건하게 살아야 한다.

이 말씀은 빌립보서의 말씀으로 대체할 수 있다.

' 마지막으로, 형제자매 여러분, 무엇이든지 참된 것과, 무엇이든지 경건한 것과, 무엇이든지 옳은 것과, 무엇이든 순결한 것과, 무엇이든 사랑스러운 것과, 무엇이든지 명예로운 것과, 또 덕이 되고 칭찬할 만한 것이면, 이 모든 것을 생각하십시오. 그리고 여러분은 나에게서 배운 것과 받은 것과 듣고 본 것들을 실천하십시오. 그리하면 평화의 하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실 것입니다.(빌립보서 4:8-9)

성탄의 절기에 우리 모두 내가 주안에 주가 내안에 거하는 신비를 경험하는 은총이 임하시길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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