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영 목사
▲기장총회 전남노회 이기영 목사. ©한국기독교장로회

1. 에큐메니칼 공의회 역사

주전 4년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 길고 긴 구약시대는 막을 내리고 신약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사역,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의 신앙과 신학적 의미를 이해했던 사도들과 제자들에 의해 로마에 의해 지중해 등지로 퍼져가면서 원시그리스도교회는 시작되었습니다. 여기서 간단히 교회의 시기를 구분하여 보겠습니다.

그리스도 승천 이후 사도들과 제자들이 생존해 복음전파와 교회를 세워가고 <요한계시록>이 기록 되었던 주후 100년까지를 ‘원시그리스도교회’ 시기라고 합니다. 그리고 주후 100년부터 313년 로마의 황제 콘스탄틴(Constantine)이 그리스도교를 공식적으로 로마국교로 인정했던 시기까지를 ‘초대교회’, 그리스도교 최고의 신학자 어거스틴(St. Augustine)의 등장까지의 시기를 ‘고대교회’, 어거스틴 이후부터 1517년 로마 가톨릭의 사제였던 독일의 마틴 루터(Martine Luther)가 비텐베르크 성당문 앞에 ‘95개 반박문’을 내걸었던 시기를 ‘중세교회’라고 합니다. 그 이후로부터 로마가톨릭, 동방정교회, 개신교회를 주축으로 교회는 분열과 발전을 거듭하는 시기를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공의회의 역사에서 중요한 점은 니케아 공의회를 제1차 에큐메니칼 공의회로 지정하면서 교회역사에서 ‘에큐메니칼’이란 단어가 공식적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오이쿠메네(oikoumene)에서 유래했습니다. 이 말의 어원은 oikos(집)인데, 이로부터 oikonomia(집안 살림살이)란 말이 나왔고, 이로부터 economy와 ecology(생태학)란 말이 나왔습니다.

이 말의 사전적 의미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온 세상’(the whole inhabited world)입니다. 그리스-로마세계(the Greco-Roman World)에서 이 ‘오이쿠메네’는 사람들이 거주하는 온 세상, 문명세계, 혹은 희랍-로마문화영역, 나아가서는 로마제국을 의미했습니다. 신약성서에선 이와 같은 세속적인 의미로 15회 가량 사용되었고, 2.3세기에 이르면 이 용어가 ‘사람들이 살고 있는 온 세상’ 속에 지역별로 흩어져 있는 세계교회를 가리키는 것으로 사용되었고, 4세기에서 5세기 동안에는 지중해세계의 보편교회를 지칭하는 것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교회의 역사는 교회들의 분열의 역사요 일치 추구의 역사입니다. 교파들마다 성경에 대한 이해가 다르고 교리들과 직제들과 사회참여의 방법들이 다릅니다. 그러나 성경과 전통은 우리들에게 다양성(多樣性)속에서 통일성(統一性)을 제시합니다. 구약의 구속사(救贖史)를 배경으로 하는 신약의 ‘하나님나라의 복음이야기’와 ‘삼위일체 하나님과 하나님나라’는 성경의 통일성에 해당하고, 이를 중심으로 하는 다양한 이야기들과 메시지들이 있고, 이것에서 비롯되는 다양한 교파들과 그들의 신학들의 통일성과 다양성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께서 기도하신 대로 다양성 속에서 통일성을 이룸으로써, 역사와 창조세계를 하나님께 화해케 하는 과제(골1:20절과 엡1:10)을 수행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상과 같은 성경에 나타난 에큐메니즘은 ‘신앙과 직제’(faith and order), ‘생활과 봉사’(life and work), 그리고 ‘복음전도와 세계선교’의 성경적 근거입니다.

세계교회협의회(World Council of Churches)는 1948년 네델란드 암스텔담에서 ‘인간의 무질서와 하나님의 경륜’이라는 주제로 창립총회가 개최되었습니다. 제2차, 미국 에반스톤 세계대회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 세상의 희망’, 제3차, 인도의 뉴델리 대회(1961년)는 ‘예수 그리스도- 세상의 빛’, 제4차, 스웨덴의 웁살라 대회(1968년)는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리라’, 제5차, 케냐의 나이로비 대회(1975년)는, ‘자유케 하시며 하나되게 하시는 예수 그리스도’, 제6차, 카나다의 뱅쿠버 대회(1983년)는 ‘예수 그리스도 세상의 생명’, 제7차, 호주의 캔바라 대회(1991년)는 ‘오소서 성령이여, 만물을 새롭게 하소서’, 제9차, 브라질의 포르트 발레그레 대회(2006년)는 ‘하나님, 당신의 은혜 안에서 세상을 바꾸소서’ 그리고 제10차, 한국 부산대회(2013년)는 ‘생명의 하나님, 우리를 정의와 평화로 이끄소서’ 라는 주제로 열렸습니다. ( 참조)

오늘의 메시지는 ‘주의 나라로 임하소서’ 입니다.

2. 세계역사 속의 세가지 대표적인 꿈

세계역사 속에는 크게 세 가지의 대표적인 꿈이 있고, 그리고 그 꿈을 꾸어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처음 사람은 고대 희랍의 철인 플라톤(Platon)입니다. 플라톤의 꿈은 공화국(共和國)이란 책 속에 담겨있습니다. 여기서 플라톤은 이상적(理想的)인 국가가 무엇인가를 꿈꾸고 있습니다. 이상적인 국가, 그것은 ‘미덕(美德)’을 사는 국민 하나 하나이고, ‘정의(正義)’가 이루어지는 사회일거라고 제안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은 ‘자기통제(自己統制)’ 를 잘 할 줄 아는 ‘미덕’의 사람들이며, 이 미덕을 갖춘 사람들이 한데 뭉쳐서 사는 사회에는 ‘정의(正義)’가 실현되는 사회일거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이상국가(理想國家)에는 이 미덕(美德)과 정의(正義)를 잘 살려나갈 세 계급의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세 계급의 사람은 각기 자기 안에 있는 미덕을 따라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첫째 계급은 ‘지혜의 덕’을 가진 사람이며, 이 사람들은 바로 다스리고 지배하는 지배계급이라고 했습니다. 왕(王)은 지혜(智慧)의 덕을 가진 사람이어야 했습니다(현인정치(賢人政治)).

두 번째 계급은 ‘용기(勇氣)’의 덕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 사람들은 나라를 지키는 군인(軍人)들이라 했습니다. 그러나 세 번째 계급은 ‘자신(自身)을 잘 자제할 줄 아는 덕(德)’을 가진 국민이라고 불렀습니다. 법(法)을 잘 지키는 국민이라는 뜻입니다. 지혜를 가진 왕과 용기를 가진 군인과 자제할 줄 아는 국민이 서로 얽히어 조화(調和)를 이루는 곳, 플라톤은 그것을 비로서 이상국가(理想國家)라고 했습니다.

플라톤의 이상국가의 꿈이 약2,000년이 흘러오던 1518년, 깊은 감화를 받은 또 하나의 꿈꾸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영국 Oxford에서 교육받은 변호사, 영국(英國)재상(宰相)을 지낸바 있는 정치인, 그러나 왕의 부당한 명령 앞에 불복종했다는 이유로 감옥에서 사형당한 토마스 모어(Thomas More), 그는 죽고 1518년 유토피아(Utopia-이상향)라는 유명한 글을 남겼습니다.

남쪽나라의 한 섬, 있지도 않은 섬의 생활을 그는 꿈꾸었습니다. 모든 재산은 공동으로 하는 사회, 10년마다 살고 있던 집들을 서로 바꾸어 사는 사회, 모든 의복은 제복(制服)으로 만들어 입고 다니는 사회, 일하는 시간은 6시간, 그리고 그 섬에는 종교의 자유가 있다는 꿈의 나라였습니다.

바로 이 토마스 모어Thomas More)의 이상향(Utopia)의 꿈은 약 400년 후 맑스(Karl Marx,1818-83)와 엥겔스(Friedrich Engels,1820-95)라는 두 사람에게 무한한 자극을 주었습니다. 공산당(共産黨) 선언(宣言)이라는 글에서 이 두 사람은 ‘계급 없는 사회’라는 꿈을 약속하고 나셨습니다. 이 역사가 완성되는 새 사회라는 약속이었습니다.

계급 없는 사회, 그것은 모든 재산을 공동소유로 하여 강력한 세금제도를 실시하며, 상속권을 가지지 못하게 하여 이민(移民)온 자나 반대자의 재산은 몰수하며 은행, 교통, 농지(農地)는 국유화(國有化)하여 모든 사람들은 노동의 의무를 가지는 사회라는 약속이었습니다. 이 약속 앞에 매혹되었던 사람들은 허다히 많았습니다. 그 중에 하나는 니콜라이 레닌(Nikolai Lenin, 1870-1924)이었습니다. 맑스가 꿈꾸는 이상국가를 소련에서 완성해 보겠다는 레닌은 1917년 10월 혁명으로 소련을 뒤집어 놓았습니다. 이후로 전세계는 계급 없는 사회를 건설한다는 이유로 ‘칼’을 쓰는 공산주의의 등장에 놀라움과 두려움을 경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꿈 자체를 부정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없는 공평(公平)한 사회, 그런 미래를 싫어할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방법과 용어(用語)는 다르다 해도 오늘 우리도 도시와 농촌 사이의 격차 없는, 부자와 가난한 자, 계층간의 격차 없는 새 사회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플라톤의 공화국의 꿈은 지금까지 ‘꿈’으로 남습니다. 토마스 모어가 꿈꾼 남쪽나라 한 섬이란 이 땅에 존재해 본적이 없습니다. 더욱이 칼 맑스의 꿈을 소련 땅에 심기 시작했다는 소련 공산주의 그것은 오늘날도 수많은 생명들을 공산주의 이념(理念)속에 노예로 묶었으며, 인간에게 주어진 기본적인 자유마저 다 빼앗아가 버린 공포의 왕국이 되었을 뿐입니다. 결국 1990년 끝장이 났고 소련과 동구권의 붕괴를 가져왔고, 1989년 11월 9일 베르린 장벽이 무너지는 놀라움을 겪었습니다. 성 어거스틴의 말을 빌리면 ‘폭력의 나라- 아벨을 쳐 죽인 가인의 왕국을 남겨 놓은 것뿐입니다.’ 오고 오는 미래의 세대에 심오한 역사의 교훈이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3. 예수의 하나님 나라 선포

요단강에서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은 나사렛 예수는 하나님나라 운동을 시작하기에 앞서 먼저 제자들을 불러 모았습니다. 그는 갈릴리 해변에서 베드로 형제를 위시하여 네 명의 제자를 선택한 다음(막1:16-20), 얼마 후에는 열 두 명의 제자를 선발하여 그들에게 귀신을 내어쫓을 수 있는 카리스마적 권세를 부여하고, 두 명씩 짝지어 파송 합니다(막3:13-19). 그들의 사명은 이스라엘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예수처럼 하나님나라가 임박했음을 선포하고, 그 증거로써 귀신을 내쫓고 병자를 치료하는 일입니다.

예수는 열 두 명의 제자들을 동역자(partner)로 선발하고, 그들과 더불어 하나님나라 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열 둘이 고대 이스라엘의 열 두 지파를 상징하는 숫자임을 감안할 때, 예수의 하나님나라 운동은 고대 이스라엘의 회복에 대한 당시 이스라엘 민중의 종말론적 희망과 꿈을 담고 있음이 분명합니다. 제자를 ‘선발하고’ ‘파송하는’ 행위(막3:14)는 고대 이스라엘 공동체의 예언자 집단에서 발견되는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열 두 제자를 선발하여 파송하는 데서 우리는 예수의 예언자적 자의식(自意識)을 엿볼 수 있습니다.

예수는 복음을 전파하시며 말씀하셨습니다. “때가 찼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시오”(막1:14). “이 때부터 비로소 전파하시며 회개하시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습니다(마4:17)라고 말씀하셨다.” 마태와 마가는 이로써 예수의 메시지 전체를 요약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의 설교의 주제였습니다. 그의 비유의 주제도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예수는 산상설교에서도 행복한 사람은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한 자”라고 말씀하셨고(눅6:20, 마5:1). 인생의 참된 목적도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하는 일”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6:39). 예수께서 잡히시기 전에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하신 위로의 말씀도 하나님나라에 대한 것이었습니다(막14:25). 이처럼 예수의 설교는 하나님의 나라로 시작하여 하나님의 나라로 끝났습니다. (전경연 외4지음<신약성서 신학> 1997, 대한기독교 서회)

하나님나라는 예수의 말씀과 행위로서 현재에 나타난다고 하셨습니다. “맹인이 보며 못 걷는 사람이 걸으며 나병환자가 깨끗함을 받으며 못 듣는 자가 들으며 죽은 자가 살아나며 가난한 자에게 복음이 전파된다 하라”(마11:5-6)고 세례 요한에게 알리라고 합니다. 그리고 지금 현재 이 사건이 일어나고 있으니 걸려 넘어지지 않는 사람이 복되다고 하십니다.

또 예수는 하나님의 나라가 언제 오느냐고 묻는 바리새인에게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오는 것이 아니고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 못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그대들 안에 있습니다”(눅17:20)고 하셨습니다. 이와 같이 예수는 신국(神國)이 객관적으로 임하는게 아님을 분명히 했습니다. 오히려 그의 말씀과 행위로써 오늘 현재라는 시간(時間)을 이해했고 ‘오늘의 시간’을 궁극적 미래의 결정이 되어지는 현재가 되게 했습니다. 예수는 당신의 인격에서 하나님나라의 현재를 보셨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축복은 종말에까지 연기될 수 없고 각개인은 ‘지금 여기서’(now and here) 하나님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나라를 선포하실 뿐만 아니라 그의 생명 속에 지참하신 분입니다. 하나님나라가 나타내는 새 생명, 능력, 기쁨, 화평, 의로움 등의 역사가 예수의 생명 안에서 시작되고 살아 움직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초대교회 공동체의 증언은 하나님나라가 예수 안에 현존(現存)하고 그분과 더불어 이미 시작되었다고 증언했습니다. –교회는 예수의 주권에 따라 하나님나라에 참여하면서 그 나라의 실재(實在)인 예수 그리스도를 증언하는 새 백성, 새 이스라엘입니다.

새 이스라엘이 된 그리스도인이 증언해야 할 하나님나라는 하나님의 주권(主權)과 지배(支配)가 충분히 들어나는 나라요 하나님의 영광이 빛처럼 비취는 나라입니다. 아버지의 뜻이 아버지의 구원하시는 거룩한 의지(意志)가 지배하고 영화롭게 들어나는 곳이 곧 하나님의 나라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예수의 주권으로 말미암는 하나님나라의 시민으로써 정의롭고 거룩하며 겸손하며 책임적인 삶으로 항상 예수와 함께 동행하는 은총의 삶을 향유하기를 바랍니다. 오늘의 교회는 세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현존(現存)입니다.

4. 이상향(理想鄕)의 역사적 성찰

신약성서의 증언하는 하나님나라는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의 선물이며, 하나님 자신이 친히 관여(關與)하고 하나님의 주권과 지배의 상황으로 인도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나라는 인간의 어떤 형태로나 땅 위에 건설하는 이상적 세계와는 다른 것입니다. –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Platon, Thomas More, K. Marx 등은 새 세계의 도래(到來)를 제도(制度)와 조직(組織)의 눈으로 보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성서가 증언해주는 새 세계의 도래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의 안에 계시는 하나님의 역사로 일어나고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처럼 핵무기 경쟁의 시대, 제4차 산업혁명의 시대, 테러와의 전쟁, 자연재해와 정치 경제의 심한 경쟁 속에서 예측불허의 불확실성의 시대에 세계의 운명(運命)을 앞에 놓고 그리스도인들이 과연 할 수 있는 일들이 무엇일까요? 삼층천(三層天)적인 세계관 시대에나 있을 법한 존 번연이 쓴 <천로역정(天路歷程)>에 나오는 기독도(基督徒)처럼 장차 망할 이 도시왕국을 떠나 저 하늘나라로 도피하는 길일까요? 그렇다고 Platon이나 Thomas More가 말하는 것처럼 새 세계를 인간이 만드는 제도(制度)와 조직만으로 이룩해 본다는 바벨탑을 쌓는 일일까요? 물론 둘 다 아닌 것 같습니다.

오히려 역사의 현실이 견딜 수 없을 만큼 답답하고 비관적이었던 바로 그 삶 속에 오고 있는 하나님나라! 인간변혁을 통해 펼치시는 하나님의 구원의 손길을 보는 신앙의 눈, vision, “여호와의 영 곧 지혜와 총명의 영이요 모략과 재능의 영이요 지식과 여호와를 경외하는 영이 강림하시는” 나라이며, “공의(公義)로 정직(正直)으로 세상의 겸손한자를 판단할 것이며… 공의로 허리띠를 삼고 성실로 몸의 띠를 삼으리라”(사11”2-4).

우수(憂愁)의 도식(圖式)을 도입하여 역사를 기술해 간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는 이렇게 단언한 바 있습니다. “갈대아(메소포다미아)문명이 한 바퀴 일어났다가 굴러 넘어가는 시대의 깊은 우수를 체험한 이들 가운데 아브라함 같은 높은 영성(靈性)을 가진이가 났고, 이집트문명의 수레바퀴가 일어났다가 굴러 넘어가는 때에 역사의 비극을 경험한 이들 가운데서 영성을 겸비한 모세가 났습니다. 또 바빌론 문명의 바퀴가 넘어가는 시절에 예언의 최고봉을 장식한 무명의 예언자 제2 이사야가 났으며, 헬레니즘의 비극이 종막에 전무후무한 선교자 바울이 활략 했습니다. 또한 로마제국의 영원한 도시 로마가 게르만의 알라릭의 말발굽에 유린 당하고, 그 불길에 무섭게 타오르는 시절에 로마의 마지막 영성의 결실자 성 어거스틴 을 산출한 것입니다. 시대의 우수(憂愁)를 이렇게 경험할수록 사람들의 영은 더 높은 경지(境地)로 승화(昇華)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놀드 토인비는 “최고의 영도자(領導者)인 나사렛 사람 예수와 같은 종교가로서 한 개인 한 사람의 심령에 근본적인 변화를 일으키는 방법인 ‘서로 봉사하고 사랑하는’ 방향으로 사람들을 향도(嚮導)하며 시대의 방향을 이끌지 않으면 현대 서방문명이 당면하고 있는 난국을 타개할 길이 없다”고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토인비의 역사성찰의 혜안을 깊이 높이 넓게 vision을 갖고 앞으로 활용해 가시기를 바랍니다.

5. 마치면서; Thy Kingdom Come! 주의 나라로 임하소서!

위와 같이 기도하는 우리는 신국(神國)을 전적으로 타계적인 다른 세계라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동시에 이 세계역사 속에서 인간이 실현하는 이상적 복지하회, 이상적 윤리왕국이라고 생가 해서는 안됩니다. 주의 나라는 하나님이 그리스도안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나라요, 거기에 우리를 초청하시는 세계입니다. 우리가 그 초청된 나라로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은 회개(metanoia, repentance)뿐이며 그 외 다른 것일 수 없습니다.

‘주기도문’은 두 가지를 간구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에 대하여, 또 하나는 인간에 관하여 간구합니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계십니다. 무슨 뜻입니까? 예수가 계신 그곳에 하나님나라가 있습니다. 예수는 어디에 계신가요? 예수를 모신 여러분 각자의 마음 속에 있으며, 예수를 모신 여러분 가정에 있으며, 예수를 모신 우리교회 모임 속에 계시며, 예수는 살아계시는 이 삶의 현장에 계시고, 예수의 영이 거하는 곳에 주의 나라는 현존하는 것입니다.

인간에 대하여 간구함의 일용할 양식을 비롯, 죄지은 자 용서와 우리 죄를 사하소서. 시험에 들지 않게 하소서. 악에서 구하소서 역시 주의 나라가 임하소서 의 기원입니다. 주기도 는 주의 나라가 오늘 저희 속에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이다 의 기원이며 우리가 이 땅에서 이 생명이 다하기까지 반복하여 드려야 할 기도입니다.

주의 나라는 의와 화평과 성령 안에서 누리는 기쁨(롬14:17)이며 하나님의 능력이 들어나는 세계이며(막9:1, 고전4:20), 하나님의 영광과 생명이 넘치고 충만한 세계입니다(요1:14). 주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으로 세상을 스쳐 지금도 우리가운데 지나가고 있습니다. 주의 나라는 의와 진리와 사랑, 평화로 유통하는 예수의 주권이 다스리는 나라입니다.

21세기! 어두워가고 심히 어려운 이 한반도에 주의 나라로 임하소서. 현재 북핵 문제를 둘러싼 국제정세는 마치 100년 전처럼 북한, 중국, 러시아의 대륙세력과 한국, 미국, 일본의 해양세력의 대치인 듯 합니다. 한국사회가 서로의 종교를 존중하며 세계 여러 민족의 역사와 문화를 이해할 때 우리는 작지만, 세계 속에서 우뚝 서며 언젠가 우리의 한 형제인 북한과도 하나가 될 날이 올 것으로 믿게 성령 역사하여 주소서. 이것이 세계 모든 종교가 말하는 사랑의 실천일 것이라 믿나이다. 우리 한국이 바로 이러한 사랑의 출발점이 되어 한반도가 세계 평화의 중심이 되는 날이 올 것을 위하여 기도합니다.

오늘의 탄핵정국을 역사의 주권자이신 주님이 도우시고 인도하여 주소서. 탄핵 건은 이제 법의 영역으로 넘어갔으니 그 바통을 받은 헌법재판소와 특검에서 ‘전문성’을 가지고 절차적 민주주의와 삼권분립의 나라다운 나라로 새 면모를 갖추게 하옵소서.

주의 이름으로 적은 자에게 냉수 한 그릇 대접할 때 신국(神國)이 지나가는 것을 믿사오니, 곤고하고 억눌리고 실망과 좌절에 잡힌 자들의 현장에 주의 나라로 임하소서. 어두운 삶의 현장에서 아픔을 겪고 있는 이들에게 자유와 환희, 사랑의 속성을 익명의 그리스도인들의 삶에서 구원의 역사의 선(線)이 지나고 있음을 보게 하소서. 주의 나라의 증언자 평화의 일꾼으로 살게 하소서. 주의 나라가 임하소서!

/글=기장총회 제공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장총회 #에큐메니칼 #이기영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