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선규 목사
▲이선규 목사(대림다문화센터 대표·대림중국교포교회 담임)

[기독일보=칼럼] 지난주에 반찬나누미 사역에 함께하는 지역의 교회 목회자 내외가 서울 근교의 섬을 방문하였다.

해안가를 걸으며 수많은 세월동안 씻기고 할퀸 자 갈 밭을 걸으며 혹시 쓸모 있는 수석을 만날 수 있을까하고 시선을 집중하고 있는 동안 목적지에 먼저 가있는 일행들의 혼자 논다는 칭원을 듣기도 하였다. 기분은 좀 언짢았어도 수석보다 더 귀중한 진리의 대어를 낚은 기분이었다.

1942년 초 겨울 오스트리아 당국은 수 백 명의 유대인을 체포한다. 그 중에는 빅터 프랭클 이라는 젊은 심리학자도 포함되었는데 그는 곧 체포 될 것을 예상하고 당시 가장 중요한 물건을 숨기느라 고민을 하게 된다.

경찰들이 집으로 도착하기 직전 그는 자신의 코트 안에 그가 쓴 원고를 숨겨 넣고 바늘로 꿰매게 된다. 이때 쓴 원고가 21세 세기의 큰 반향을 일으키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하면 이 돌들에도 의미를 부여 할 수 있지 않을까?

예수님께서도 수제자 베드로의 고백 “주는 그리스도”시라는 고백을 들으시고 “너는 베드로”라는 곧 ‘반석’ 이라는 이름을 주시며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고 말씀 하시지 않으셨던가?

미켈란젤로 같은 조각가는 대리석을 보면서 하나님을 찾았다고 하는데 그 이야기를 시인 릴케는 돌덩어리에 지나지 않는 인간에게서 성모 마리아나 아리마대 요셉 같은 의로운 사람을 찾고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 같은 분을 찾는다는 이야기이다.

돌의 특징은 굳고 강한데 있고 불변에도 있다. 예수님은 불의를 책망 하시고 정의를 외치시는 데는 돌과 같이 강하였고 어제나 오늘 이나 영원토록 변치 않는 진리의 본체이시므로 어떤 환경 에서도 반석과 같이 흔들리지 않는 산돌이 되었다고 성서는 증언한다.

사람은 보기에 따라 선량해 보이기도 하고 별 볼일 없는 존재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위대한 창조적인 사람들은 그 별 볼일 없는 돌덩어리 같은 사람에게서 성자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하고 의로운 사람의 가능성을 간과 할 수 있는 것이 시인 릴케의 주장이기도 하다.

사람은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존재라는 말이다. 그러기에 사도 바울과 같은 살인적인 반 기독자를 180도 전향을 시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선택하시기도 하였다.

한국에서도 이미 장 알려진 벤허라는 영화가 있다. 이 작품을 쓴 이는 왈레스라는 작가이다. 그는 아브라함 링컨의 노예해방 전쟁에 참전했던 육군 대장 출신으로 평소에 기독교의 위선과 결함에 대해 매우 비판적이었다.
그는 이 종교의 허구성을 폭로하려는 목적으로 성경을 읽기 시작한다. 적을 이기려면 적을 알아야하기 때문이라고 할까? 그런데 이상한 변화가 일어났다. 자기 자신에게서 위대한 변화를 체험하게 되었고 이 작품을 쓰게 된 것이라고 한다.

눈에 들어오는 해변에 널브러져 있는 돌 모양이 제 각각이다. 크고 작은 돌, 모난 놈, 잘 다듬어 진 놈, 뾰족하게 생긴 놈들 한 결 같이 제 각각이다. 자기 위치를 알고 있는 듯 자기 위치를 모르고 남의 자리를 탐내는 인간들의 오만을 꾸짖는 듯하다.

머리가 꼬리에 굴복하는 것도 자멸의 덫이 되지만 꼬리가 자기 분수도 모르고 날 뛰는 것은 더더욱 구제 불능의 상태로 전락하고 만다. 너도 이 돌들처럼 네 분수를 알고 처신하라는 주님의 음성이 들려오는 듯하다.

산곡에 가만히 암반으로 누워있는 것은 죽은 돌이요 자기를 찾아오는 객들에게 시원한 물 한 모금을 줄 수 없다면 죽은 돌이 되는 법. 한국교회는 ‘등치 큰 죽은 돌이 되어가고 있는가?’ 아니면 ‘지나가는 과객에게 생수를 공급하는 산돌인가?’라는 주님의 물음에 답해야 할 때이다

“한국교회여 쓸모 있는 돌로 거듭나야 한다”라는 주님의 음성이 들려온다.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선규목사 #이선규칼럼 #이선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