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오늘의 말씀 : 요 9:13-23
13 그들이 전에 맹인이었던 사람을 데리고 바리새인들에게 갔더라
14 예수께서 진흙을 이겨 눈을 뜨게 하신 날은 안식일이라
15 그러므로 바리새인들도 그가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를 물으니 이르되 그 사람이 진흙을 내 눈에 바르매 내가 씻고 보나이다 하니
16 바리새인 중에 어떤 사람은 말하되 이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아니하니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라 하며 어떤 사람은 말하되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러한 표적을 행하겠느냐 하여 그들 중에 분쟁이 있었더니
17 이에 맹인되었던 자에게 다시 묻되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 대답하되 선지자니이다 하니
18 유대인들이 그가 맹인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지 아니하고 그 부모를 불러 묻되
19 이는 너희 말에 맹인으로 났다 하는 너희 아들이냐 그러면 지금은 어떻게 해서 보느냐
20 그 부모가 대답하여 이르되 이 사람이 우리 아들인 것과 맹인으로 난 것을 아나이다
21 그러나 지금 어떻게 해서 보는지 또는 누가 그 눈을 뜨게 하였는지 우리는 알지 못하나이다 그에게 물어 보소서 그가 장성하였으니 자기 일을 말하리이다
22 그 부모가 이렇게 말한 것은 이미 유대인들이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 그들을 무서워함이러라
23 이러므로 그 부모가 말하기를 그가 장성하였으니 그에게 물어 보소서 하였더라

2. 시작 기도
아버지! 육체의 고통으로 나를 치심은 겸비케 하려 함이나이다.
먹는 것을 소화시키지 못하는 고통보다 말씀을 온전히 얻어먹지 못한 완악함이 더 고통이옵니다.
날마다 말씀 앞에 나아가는 일이 형식에 매인 일상이 될까 두렵습니다.
또다시 일과 그 성과로 안정을 찾으려하고, 그것을 무화과 잎으로 삼으려하는 비참한 자를 보옵니다.
나도 용납할 수 없는 나를 용납하실 이는 오직 당신뿐이옵니다.
이 새벽, 벌거벗은 자 되어 아들을 힘입어 당신께 나아가오니 불쌍히 여기사 받아주소서.
내 영혼을 소생시켜 주시고 새롭게 하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3. 본문 주해
예수께서 날때부터 맹인된 자를 고쳐주셨다.
사람들이 눈뜬 자에게 가서 그 진위여부를 물었다.
그들은 눈뜬 자의 증거를 듣고 그를 바리새인들에게 데리고 갔다(13절).

예수께서 진흙을 개어 바르고 눈을 뜨게 해 주신 날은 안식일이다(14절).
바리새인들은 눈뜬 자에게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를 물었다.
그는 '그 사람이 내 눈에 진흙을 개어 발랐고 내가 눈을 씻었더니 보게 되었다'고 대답하였다(15절).

이에 바리새인들 사이에 분쟁이 일어났다.
어떤 이들은 '그 사람이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다'라고 하였다.
반면 어떤 이들은 '죄인이 어떻게 그런 표적을 행할 수 있느냐'고 하였다(16절).

이에 바리새인들은 눈뜬 자에게 다시 물었다.
"그 사람이 네 눈을 뜨게 하였으니 너는 그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눈뜬 자가 대답하였다. "그는 선지자이다"(17절).

유대인들은 그가 눈뜬 사실을 믿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부모에게 사람을 보내어 물었다(18절).
"이 사람이 나면서부터 맹인이었다는 당신의 아들이요? 그런데 어떻게 지금 보게 되었소?"(19절).

그의 부모가 대답하였다.
"이 사람이 우리 아들인 것과 나면서 맹인이었던 것을 우리가 아나이다. 그러나 그가 지금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 또 누가 그의 눈을 뜨게 하였는지 그것은 모르오. 그에게 물어보시오. 그가 장성했으니 자기 일을 말할 것이오"(20-21절).

그의 부모는 유대인들이 무서워 이렇게 말하였다.
이는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회당에서 쫓아내기로 이미 결의해놓았기 때문이다(22절).
그래서 눈뜬 자의 부모는 '그가 장성했으니 자기 일을 말할 것이오'라고 대답하였다(23절).

예수께서 날 때부터 맹인 된 자를 고쳐주셨다. 이 표적은 안식일에 일어났다.
그는 침을 뱉어 진흙을 개어 맹인의 눈에 발라주고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고 하였다.
맹인이 그대로 하였더니 보게 되었다.

맹인을 치유한 예수의 행동은 당시 안식일규정을 범하였다.
생명이 위태롭지 않는 한 안식일에 병 고치는 일은 금지되었다.
또한 침을 바르는 행위, 진흙을 개는 행위, 진흙을 바르는 행위 등이 모두 금지되었다((Y. Shabbath 14:14d, 17-18; 7:2).
이로 보건대 예수의 치유행동은 모두가 안식일 규정을 위반하였다.

그로 인해 바리새인들 사이에 논쟁이 벌어졌다.
눈을 뜨게 한 자의 행동은 안식일 규정을 범하였으므로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자가 아니다. 그는 죄인임에 틀림없다.
그런데 죄인이 어떻게 이런 표적을 할 수 있느냐? 그래서 그는 죄인이 아니다.

딜레마에 빠진 바리새인들은 다시 눈뜬 자에게 '너는 그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고 물었다.
이에 눈뜬 자는' 그가 선지자이다'라고 대답하였다.
그의 대답은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를 향해 하는 말의 뜻과 동일하다(4:19).
곧 눈뜬 자는 그 여인과 마찬가지로 예수를 경이로움과 존경심을 가지고 대하고 있다.

그러나 유대인들(바래시인들)은 안식일을 범한 예수를 인정할 수 없었다.
눈뜬 자의 말을 믿지 않고 그의 부모에게 사람을 보내어 물었다.
그가 아들인 것과 그가 날 때부터 맹인된 것과 어떻게 해서 눈을 뜨게 되었는지를 물었다.
그러나 그의 부모들은 직답을 피하고 눈뜬 아들에게 물어보라고 하였다.
이는 그의 부모가 회당에서 쫓겨나는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다.
유대인들은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하면 회당에서 쫓아내기로 결의하였다.

선천성 맹인의 치유는 선천적으로 소망이 없는 자에 대해 베푸신 은혜이다.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고 모든 사람에게 사망이 임하였다(롬 5:12).
이에 모든 사람은 아담 안에서 날 때부터 죽은 자요 영적인 소경이다.

그는 영원을 알지 못하며 다만 사모하는 존재이다(전 3:11).
그것은 깊은 층의 목마름으로 표현되며 그곳을 알기까지 안식하지 못한다.
영원을 아는 것은 영생을 얻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와 사귐을 아는 것이다.
영원에 무지한 자는 스스로 영생을 얻지 못하며 영원을 알지 못한다.
빛이 비추나 어둠이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1:5).

선천성 맹인의 눈뜸은 창세전 약속된 영원한 생명의 부여를 표상한다.
이로써 영생 얻은 자는 사망에서 생명으로, 절망에서 소망으로 옮기어진다.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그에게 비추어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이 그 마음에 비추게 된다.

예수 그리스도는 굳이 안식일에 이 일을 행하셨다.
이는 바리새인들이 종교적 규례로 정한 안식일법이 얼마나 허구인지를 밝히는 것이다.
참된 안식은 영생 얻은 자가 영원의 아버지 품에 거할 때 주어지는 것이다.
"그런즉 안식할 때가 하나님의 백성에게 남아 있도다. 이미 그의 안식에 들어간 자는 하나님이 자기의 일을 쉬심과 같이 그도 자기의 일을 쉬느니라"(히 4:9-10).

지금까지 유대인들은 생명의 말씀을 들었다.
창세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아들의 복종과 아버지의 사랑, 그래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주신 일, 영원한 생명을 얻는 길에 대해 말씀을 들었다.
그들에게 빛이 비추어졌으나 그들은 깨닫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여전히 눈 먼 자로 남아 있다(41절 참고).

그런데 눈먼 자가 눈 뜬 자를 시비하며 심문하고 있다.
사람이 만든 종교적 체제와 전통으로 진리로 자유케 된 자를 옭아매고 위협하고 있는 것이다.
눈뜬 자의 부모들은 종교적 체제가 두려워 대답을 회피한다.
그러나 눈 뜬 자, 진리 안에서 자유케 된 자는 당당하게 주께서 자기에게 행하신 일을 밝힌다.

이 시대 교회 안에 사람이 만든 종교체제가 강고하다.
그것들은 신자들에게 편리하고 유용한 역할을 하나 진리에 눈멀게 만든다.
특히 기독교 진리의 본체인 알파와 오메가에 대해 무지하게 하여 결국 세속의 즐거움을 따르게 만든다.
기독교 진리의 알파는 그 기원으로서 창세전 아버지와 아들과의 관계이다.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17:5).
기독교 진리의 오메가는 영생 얻은 자가 알파의 세계에 참여하는 영생의 삶이다.
"아버지여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아버지께서 창세 전부터 나를 사랑하시므로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17:24).

그러나 작금의 교회와 종교체제는 진리의 알파와 오메가를 외면한다.
그대신 인간이 규정한 신학과 전통, 프로그램, 체제가 편만하게 성행되고 있다.
교회 안에서는 영생의 진리가 부재한 채 종교체제가 옳다고 하면 그것을 맹신한다.
그래서 많은 신자들은 진리를 알고 진리 안에서 자유케 하는 신앙은 거부하고 강압적인 체제 안에서 안정을 희구한다.

진리 안에서 자유할 것인가? 강압된 종교체제에서 안정을 구할 것인가?
이는 일찍이 도스토옙스키가 '카라마조프의 형제들'에서 제기한 질문이다.
소위 '대심문관'의 이야기인데 무신론자 이반이 경건한 신학생인 동생 알료사에게 들려운 우화이다.

어느 날 예수가 마을에 나타났고 사람들은 그가 직감적으로 예수인 것을 알아보았다.
그를 본 사람들은 감격하고 무릎을 꿇고 그의 은혜를 찬양하였다.
그러나 그 도시의 최고 종교지도자인 대심문관이 군사를 보내 예수를 체포한다.
그를 성전의 캄캄한 끝 방에 가두었다.

엄청난 존경과 공포의 대상인 대심문관이 예수 앞에 나타나 그를 심문한다.
그 역시 자기 앞에 서 있는 이가 예수라는 것을 알고 이런 말을 한다.
'당신이 누구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당신이 누구이든지 나는 내일 당신을 처형할 것이다. 왜냐하면 당신은 결코 우리들 앞에 다시 나타나서는 안돌 사람이기 때문이다'
'당신은 사람들에게 (진리 안에서) 자유를 가져다 주었다. 하지만 사람들이 정말 원하는 것은 그런 자유가 아니라 안정이며 복종이다. 그래서 우리는 종교체제를 만들어서 사람들에게 자유를 빼앗고 안정을 주었다. 이제 사람들은 스스로 생각하기보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을 생각하며 우리가 옳다고 하는 것을 옳다고 믿는다. 이 체제는 다 완성되었다. 그런데 왜 당신은 다시 나타나서 우리가 힘써 만든 제도(체제)를 뒤흔들고자 하는가?. 그래서 당신은 처형되어야 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은 진리가 주는 자유보다 체제가 주는 안정을 원한다.
그것은 엄밀히 말해서 기독교를 믿는 것이 아니라 종교를 신봉하는 것이다.

이 시대 목사는 그 자신이 먼저 진리를 알고 진리 안에서 자유해야 한다.
그리고 강고한 체제 안에서 안정을 원하는 신자들을 진리로 이끌어야 한다.
지난 목요일, 제주에서 김광식목사님과 팀장님이 목사님들 앞에서 그런 절절한 고백을 하였다고 한다.
목사님들이 성도로 하여금 진리를 알게 하고 진리 안에서 기뻐하는 삶을 살도록 해야 한다고.
그러기 위해서 목사님들이 먼저 생명의 복음을 알고 누려야 한다고 말이다.

콘크리트 벽처럼 강고한 종교체제!
그리고 그 안에서 안정을 찾고자 하는 수많은 무리들!
그들은 눈뜬 자의 부모처럼 그런 체제에게 쫓겨나는 것이 제일 두렵다.
어떤 목사들은 신자들이 진리를 알아도 무시해버리고, 기존의 종교체제속에 자신을 가두어버린다.
성도 역시 진리를 아는 것은 뒷전이며 종교체제에 적당히 타협하며 적당히 안정하며 종교행위를 즐긴다.
안식일법으로 진리 되신 그리스도를 폄하하고 무시하고 조롱하고 죽이려하는 시도는 오늘도 여상하다.

4. 나의 묵상
나는 오늘도 강고한 종교체제가 주는 압박으로 고통당한다.
그로 인한 불안과 두려움은 무의식에 잠재되어 전의식인 꿈으로 발산된다.
새벽녘 혁명을 하려다 실패하여 죽는 그런 꿈을 꾸었다.
강고한 종교체제를 진리로 전복하려는 혁명이다.
그런데 그에 대한 사역의 불완전함과 교회의 외면함이 겹치면서 오는 혼돈과 불안감이 '실패'라는 꿈으로 나타난 것이 아닌가 싶다.

어제 복음지기 김목사님이 묵상중에 드린 고통스런 절규가 오버랩 된다.
복음과 생명의 사역은 그 말씀을 들은 성도들마저도 용납할 수 없게 되었으니, 하물며 이 진리를 어렴풋이 아는 목사나 교회는 대체 어쩌란 말인가!
가히 사람에게 환영받지 못하고 교회에서 반발하는 말씀이고 사역이다.

그래서일까...
나 또한 베드로처럼 다시 물고기 잡으러 가고자 하는 마음이 굴뚝같다.
아, 그러나 그런 비참하고 무기력한 내게 주님이 찾아오신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고 물으신다.
내가 할 수 있는 말, '모든 것을 아시오니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이다.

'내 양을 먹이라!'
진리를 찾는 단 한 사람이라도 있다면 그가 주님의 양이다.
그에게 진리를 전하여 강압적인 체제가 주는 안정에서 해방시킨다.
그리스도께서 위하여 죽으신 한 형제를 찾아간다.
동족이 진리를 아는 일에 자기가 저주를 받아도 족하다고 호소한 바울의 심정이 되어 다시 복종의 자리로 나아간다.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롬 9:1-3).

5. 묵상 기도
아버지...
오랫동안 영적인 소경으로 살았습니다.
눈먼 자 되어 눈뜬 자를 심문하고 비난했나이다.
신앙의 목적을 이생의 성취와 이생의 행복에 두었습니다.
어둠에 속한 자, 십자가의 원수로 행했나이다.
강고한 종교체제로 신자들을 옭아매고 교회 자체를 위해 충성하게 했습니다.
진리안에서 누리는 자유는 저도 모르고 전할수도 없었습니다.
대심문관 노릇을 하면서 영혼들을 진리 밖으로 몰아갔습니다.

아버지여...
진리에 대한 핍박자요 훼방자요 포행자이었나이다.
나도 사망의 길로 가고 당신의 백성들도 그 길로 이끌었나이다.
그런데 그런 죄인중의 괴수에게 구원이 임했나이다.
생명의 빛이 임하고 진리를 알고 진리 안에서 자유케 되었나이다.
기독교 신앙의 알파와 오메가를 알게 되었나이다.
아들이 아버지의 사랑 안에서 누리는 영광의 풍성함을 보았나이다.

아버지...
이제는 동족으로 인해 눌림이 그치지 않습니다.
진리 안에서 자유보다 강압적인 체제 안에서 안정을 택하는 무리가 많습니다.
목사는 이 일을 주도하는 중세의 대심문관의 자리에 앉아있습니다.
자기가 옳은 것을 행하게 하고 자기가 시키는대로 하게 합니다.
오, 주여! 저들을 심판하소서. 공의로 다시 세우소서.
심판의 자리에 영원한 생명이 실재되게 하소서.
그리하여 저들이 진리를 알고 진리를 전하는 자 되게 하소서.
눈을 뜨게 하소서. 당신의 심판은 참되고 의롭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 서형섭 목사는... 한국외대에서 경영학(B.A.)와 연세대 경영대학원 경영학(MBA)를 졸업하고, 서울신대 신학대학원 목회학(M. Div.)을 공부했다. 논문 '말씀묵상을 통한 영적 훈련'(Spriritual Training through Meditiatioin on the Word)으로 풀러신학교에서 목회학 박사(D. Min.) 학위를 받았다.

그는 지난 2000년 반석교회를 개척하고, 치유상담연구원에서 6년간 수학 후 겸임교수를 지내며 동시에 한국제자훈련원에서 8년간 사역총무를 역임했다.

현재 서형섭 목사는 말씀묵상선교회(http://cafe.daum.net/wmmission) 대표로 섬기며 특히 '복음과 생명', '말씀묵상과 기독교 영성'에 깊은 관심을 갖고 저술과 세미나 사역에 집중하고 있다.

저서로는 <말씀묵상이란 무엇인가>(갈릴리, 2011년)과 최근 출간된 <복음에서 생명으로>(이레서원, 2013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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