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영 목사   ©기장총회

신명기 26: 5- 9, 에베소서 2: 14- 18

1. 시작의 말- 억압에서의 해방이고 구원입니다.

8월은 광복의 달입니다. 해방 69주년에 즈음하여 출애굽과 광야 40년에 얽힌 이야기와 우리민족의 화해에 대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그들이 섬긴 하나님이 "우리 음성을 들으시고 우리의 고통과 신고와 압제를 보시고", 그리고 영원히 잊지 못할 은혜의 증거로, "여호와께서 강한 손과 편 팔과 큰 위엄과 이적과 기사로 영원히 잊지 못할 은혜의 증거로 인도하여 내셨다"(신26:5-9; 6:21-25 참조)고 구약의 본문, 그들의 신앙고백에서 확언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은 그들의 역사의 기원을 억압과 압제로부터의 경이로운 해방에 두고 있습니다. 비참한 경지에 빠져 무기력하고 절망에 찬 노예들에게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았다면 그들은 역사적인 소명의식을 가진 계약공동체로서의 하나의 백성으로 형성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출애굽의 해방이야기는 하나님이 들으시고, 보시고, 마침내 구원하시는 단계로 이루어진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약 본문을 다시 요약해 말하면, 출애굽은 이스라엘 백성의 억압에서의 해방입니다.

출애굽기에 나타나는 주도적이고 강권적인 하나님의 구원은, 400년의 노예생활에서 만들어진 노예근성으로 오합지졸이 되어버린 히브리노예들을 형제자매의 우애와 사랑이 넘치는 자유시민 공동체로 만들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교육적, 훈련적 목적 속에서 이뤄졌습니다.

출애굽이야기의 줄거리를 살펴보면, 두 가지 대립된 세력 사이의 투쟁이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하나는 모세와 그의 형 아론에 의해 나타난 '히브리인의 하나님'이고, 다른 하나는 교활한 마술사들을 거느리고 이집트의 세력과 영광을 지닌 완고한 바로 입니다.

여기서 주목 할 것은 모세의 하나님은 이집트의 신들과 대결하지 않고, 건방지게도 역사를 주도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바로와 대결했다는 점입니다. 이 당시는 라암세스 2세가 아마르나 시대에 상실한 아시아 제국, (팔레스타인과 시리아)를 통치하기 위해 수도를 텔타 지역으로 옮긴 때였습니다. 하피루를 국가의 노예로 고용하여 동원시킨 비둠과 라암셋 에서의 건축사업도 라암세스 2세의 거대한 정치적 야망 중의 하나였습니다. 출애굽 구원사가 일어난 시기는 보편적 역사로 볼 때도 하나님의 때가 찬 시점이었습니다.

출애굽이야기는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여호와께 속한 것이기 때문에"(출9:29) 모세를 통해 말하고 행하는 하나님이 모든 것을 통치한다는 가정하에 기록되었습니다. 출애굽이야기는 극적인 드라마적 긴장감을 불러 일으킵니다. 이야기의 처음 시작은 바로가 히브리인들을 꺾기 위해 그들에게 중노동을 시키고 더 나가서 히브리인들의 새로 태어나는 장자를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내려 대학살을 감행하는 것으로 시작 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서도 모세 - 이스라엘의 미래의 지도자 - 는 나일강에서 이집트의 공주에게 구출되어 궁중에서 바로 앞에서 키워지고 교육을 받게 됩니다. 세월이 지나가면서, 모세는 이집트식으로 양육되었지만, 하나님의 명을 받아 '조상들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바로에게 도전을 하게 됩니다.

모세가 바로에게 찾아갈 때마다 이집트에 대한 재앙도 심해지게 됩니다. 결국, 바로의 완고함이 꺾여 히브리인들은 풀려납니다. 거대한 재앙으로 인해 바로는 히브리인들이 떠나는 것을 허락하는데, 곧 마음이 바뀌어 군사를 풀어 히브리인들을 추격하게 합니다. 이스라엘인들이 이집트 군대와 그들 앞에 있는 홍해바다 사이에 갇혀 진퇴유곡에 처했을 때 홍해바다가 갈라져 이스라엘인들이 건너고 뒤쫓아 오던 이집트군대는 바닷물에 삼켜지는 것으로 이 출애굽의 대단원은 막을 내립니다. 극적인 요소로 가득차 있는 이 출애굽이야기는 수세기 동안 상상력과 구원의 영감을 많이 불러 일으켰습니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창조주이며 해방과 구원의 주님이십니다.

2. 우리가 맞는 해방절을 되새겨 봅니다.

우리가 맞는 해방절 주일에, 1945년 8월 15일 당시를 되새겨 보게 됩니다. 미국이 태평양 전쟁에서 일본에게 승리한 날, 바로 이날을, 우리민족은 되새기며 한국교회는 모두 일본제국주의에서 해방된 것을 기념하는 주일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여기 70대 이상의 어른들은 당시의 기쁨과 감격, 새 나라에 대한 어떤 꿈, 믿음과 희망을 꿈꾸었습니다. 아니 이 광복절의 해방이 꿈인가 현실인가를 생각하며 감격해 하며 만세를 부르며 거리로 나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일제시대 특히 태평양 전쟁시대에 우리민족은 지독하게도 가난했으며 가진 것이라고는 몽땅 일본 군국주의자들에게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젊은이들은 군인으로, 징용으로 소집돼 갔고, 처녀들은 취직시켜 준다는 감언이설에 속아 강제로 일본군의 위안부로 끌려 갔습니다. 억압과 학대 속에서 근근이 마지못해 살다가 맞이한 해방이었습니다.

그러나 회상하면, 무엇보다도 아프고 통탄할 사건은 우리 한반도와 민족은 1945년 해방이 되면서 남과 북으로 두 동강이 난 채, 왜 동족들끼리 싸워야 하는지 영문도 모르고 형제자매를 원수로 동족상잔의 6.25전쟁까지 치러야 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분단된 나라들 가운데 아직 통일되지 못한 마지막 분단국가로 남아있습니다.

부정선거 때문에 4.19학생 의거로 민주한국으로 출범했지만, 군인들의 쿠테타와 군사독재로 보내야 했습니다. 그래도 민주화를 위해서 투쟁하며 몸을 바친 분들과 민중들의 힘으로 민주화는 실현되었고, 한 때, 남북 지도자 당사자들끼리 만남으로 남북관계개선의 새로운 시대를 맞는 것인가 희망이 보이는 듯 했습니다. 그런데 다시 남북관계는 경직되어가고, 상생의 원리에서 공존하며, 공영의 교류를 힘들게 하고 있는 상황입니다.

지난 4월 16일 세월호 참사는 한국 근.현대사에서 그 이전과 이후를 나누는 결정적 사건 중 하나가 될 것임이 분명하다는 것이 대체적인 의견입니다. 이러한 오늘의 삶의 자리에서 우울하고 무거운 마음으로 해방 69년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우리의 사정을, 옛날 이스라엘 백성의 출애굽 해방의 역사와 견주어 생각하게 됩니다.

3. 이스라엘의 광야 40년의 역사는 우리 민족의 거울입니다.

사실상, 억압에서 해방이 되어서 광야 40년 동안 얼마나 헤매고 방황하며 배고파하며 고생을 많이 하며 연단을 받았을까 구약성서의 역사를 통해 생각해 봅니다. 광야에서의 인도는 모세를 통하여 그들이 하나님을 섬김으로써 그들의 자유를 찾도록 보내졌습니다. 이 광야 여정은 많은 고난과 불안정으로 가득차 있었기에, 광야에서의 자유란 이집트에서 노예생활보다 나을 바가 없다고 여기며 "이집트의 고기 가마"(출16:3)를 그리워 한 적도 있었습니다.

모세의 가슴을 제일 아프게 한 것이 바로 이 사건과 금송아지 사건입니다. 분명히 이스라엘은 광야에서 은혜를 입었으나, 그들은 불평하고, 반목하였으며, 모세에게 반항하기도 했으며, 무엇보다도 신앙이 결핍되어 있었습니다. 홍해바다를 기적적으로 건넌 사건을 비롯하여 여러 이적이 일어났음에도 그들은 "야훼께서 우리 가운데 계신가 안 계신가?"(출17:7)라고 불평했던 것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올라가서 하나님과 대화를 나눈 것은 바로 노예 된 민족의 내면적 해방을 고민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모세는 하나님과 대화 끝에 하나님의 계명을 받습니다. 새로운 나라를 만들어 나가야 하는 이스라엘민족의 헌법의 기초, 정신적 기초가 되는 십계명을 받아가지고 산을 내려옵니다. 새로운 삶의 스타일, 새로운 법률제도, 새로운 생활습관, 새로운 정치구조, 새로운 문화를 하나님의 계명으로 받아서 내려 옵니다.

그런데 시내산 아래에서는 사람들이 자기들이 이집트에서 감추어 가지고 나온 금붙이들을 모아 녹여서 웅장한 금송아지를 만들고 거기에 절하고 예배하는 사건입니다. 그 금송아지는 이집트사람들의 우상이고 최고의 가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금송아지는 제국주의의 우상이며 최고의 가치입니다. 금송아지는 서구사회가 아시아와 아프리카, 남미와 여러 나라의 금광을 찾아서 타민족을 추방하고 땅을 차지하고 식민지를 만들어 온 제국주의의 심벌입니다.

미국을 대표할만한 양심적이고 실천적인 역사가, 하워드 진(Howard Zinn)은 그의 <미국 민중사>(People's History of the United States)라는 저서로 역사학계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습니다. 그는 전쟁반대와 민권, 여권, 인종간의 평등, 제3세계에 대한 관심을 주된 테마로 역사를 기술했습니다. 사실 대부분의 역사 책은 정치 경제의 핵심을 차지하고 있는 소수의 사람들에 관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우리'즉 '민중'이 어떻게 지내왔는가의 관점에서 역사를 기록하려고 노력합니다.

물론 미국건국의 아버지들이 자유와 독립을 위해 미국을 세우고, 잭슨 시대에 이르러 미국식 민주주의가 확립되고, 링컨이 노예를 해방시켜 자유를 확대했습니다. 카네기와 록펠러 등이 진취적인 기업정신으로 미국을 풍요와 기회의 땅으로 만들고, 윌슨이 자유와 민주주의를 전 세계에 전파했습니다. 그러나 하워드 진은 "미대륙의 역사는 곧 정복과 차별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라고 일갈합니다.

'신대륙을 발견한 콜럼버스는 영웅인가?', 인디언 원주민들이 내민 환영의 악수를 거부하고 황금을 찾기 위하여 무력을 과시했던 역사라고 회상합니다. 그 이후로 계속된 인디언, 흑인, 여성, 노동자, 이민자, 반전운동가 등은 짓밟히고 빼앗긴 수많은 사람들의 아픔의 소리에 귀를 기울입니다. '아래로부터의 역사', '민중의 역사'가운데서도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까닭은 무엇보다도 이제까지 감춰졌던 약자와 소수 자들의 목소리를 고스란히 살려내고, 한편의 장대한 서사시로 구성했다는 점입니다. 매우 교훈적인 역사관을 주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안의 상황은 모든 분야에 걸쳐서, 권피아, 관피아 라는 새로운 용어가 통용 되고 상식화 되어가고 있습니다. 심지어 종교계까지도 이젠 돈이면 무엇이든 다 해결 된다는 의식구조와 삶을 지배한다는 상황에 사로잡혀 있습니다.

오늘 세월호 참사의 발생은 정치와 경제뿐 아니라 종교도 핵심적으로 관여되어 있음이 드러났습니다. '종교'와 '경제'의 합병이라는 점에서, 청해진 해운의 실 소유주로 알려진 기독교복음 침례회, 소위 '구원파'가 우리 사회에 불러온 재앙은 분명 바로 잡아야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한국 기성 기독교 교회의 뿌리깊은 근본주의와 배타주의, 아직도 '대 교회주의'와 '돈'의 밀착에 대한 현실을 직시하며 깊은 반성과 참회를 해야 합니다.

먼저 우리교회는 무엇보다도 '진실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신뢰를 회복하는 일입니다. 솔직히 오늘의 우리의 교회들을 성찰하자면, 바리새적 위선적인 율법주의와 사두개적 교권주의에다 헤롯당의 정치지원에 안주하고 맘몬왕 노릇을 하는 자본주의 성장원리에 기초한 교회 자기 몸 불리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진정한 책임감을 갖고 이웃을 돕고, 사회와 역사참여의 문제는 포기해 버린 채 예언자적 증인된 삶은 사그라지고 있음을 깊은 자리에서 성찰하며 회개해야 합니다.

4. 민족분단의 아픔을 극복하고 민족화해를 이룩해야 합니다.

우리에겐 민족분단의 역사와 해방의 역사가 함께 동시에 주어졌습니다. 우리는 분단을 극복하는 과정을 해방의 과정으로 받아야 합니다. 분단을 극복하기 전에는 우리가 참으로 해방되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아직 우리는 분단의 노예입니다. 분단논리와 분단 이데올로기의 노예의 현실 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역사적으로, 실재로 이북은 우리의 동족인데, 우리는 그들을 우리의 적이고 정복의 대상이고 멸공의 대상이며, 흡수통일의 대상으로 여기는 노예근성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 동족이라고 하기엔 창피한 족속이라고 생각하게 된 이 노예근성에서 우리 모두는 자유 하여야 합니다.

먼저, 우리의 남과 북은 민족자존, 자주성을 서로 존중하고, 민족동질성을 반드시 회복하여야 합니다. 그리고 상생의 원리에 근거하여, 남북 지도자 당사자들끼리 만나고, 남북 동족들끼리 만나야 합니다. 공존과 공생, 공영하는 평화통일을 이룩해야 합니다. 시일이 걸리더라도 남과 북이 더 쉬운 교류부터 이루고 확장하며 신뢰를 구축하고 우리 남북 민족들의 교육을 실시한다면 평화통일은 반드시 올 것이라고 확신 합니다.

우리 한민족의 평화통일에의 의지와 집념이 분명하고 굳은 결의로 통일에의 노력을 계속해 나갈 때,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 등의 주변나라들도 이 평화통일을 저지하거나 꺾지 못하고 오히려 지원 협조 할 것입니다. 작년 부산에서 제10차 세계교회협의회(WCC) 총회에서도 '한반도 평화와 통일에 관한 성명서'를 채택하고 적극 지원한다는 선언을 했습니다.

내년이면, 제2차 세계대전 이후 70년이 되는데, 그 동안 우리는 너무나 우유부단하고 민족자주 정신이 모자란 국민으로 강대국들에게 보인 것은 아닌지, 우리는 민족적으로 참회를 해야 합니다. 그리고 남북 정권 자들뿐만 아니라 남북 국민들 스스로가 의식을 높이고 남북이 하나의 민족으로서의 자질에 하등의 손색이 없음을 세계 열강에 분명히 보여 주어야 합니다. 동시에 어느 때보다 더 국제적 이해로 얽히고, 자국의 이익, 위주의 국제사회 속에서 이에 대한 정확한 지식과 전문적인 대처 활동이 요청된다 하겠습니다.

5. 마감의 말- 민족화해를 위한 우리의 기도를 드립시다.

해방과 민족분단 69주년, 그 동안 한국교회는 분단 이데올로기를 조성하며, 남북 화해나 통일에의 실질적인 역할을 다 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들의 복음이란 것도 축복일변도에 역사와 현실을 외면하였고, 영적이라면서 가장 물질적이요 물량 증대에만 관심을 기울여 오히려 더 타락한 종교가 되었음을 숨길 수 없습니다. 한국교회는 이런 과오를 바로 인식하고 하나님과 민족 앞에 철저한 참회와 변화를 받아야 합니다. 우리의 교회들은 이제부터라도 가장 민족의 비극적인 요인이 민족분단, 국토분단에 있음을 자각하고 이 문제해결에 총력을 기울여야 합니다. 한국교회 선교정책도 새롭게 평화통일을 위한, 민족화해를 위한 프로그램으로 재편성 되어야 합니다. 이는 하나님이 우리 민족을 향하신 참된 뜻이라고 믿으시기 바랍니다.

신약성서 에베소서 2장에는 기독교의 핵심인 예수 그리스도를 새롭게 가르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요 그는 "자신의 몸을 바쳐서 유대인과 이방인이 서로 원수가 되어 갈리게 했던 담을 헐어버리시고 하나로 만드신 분"(엡2:14-16)이라고 선언합니다. 세계교회협의회(WCC)의 성명서 속에도 "그는 우리의 평화로 이 세상에 오시고(엡2:13-19)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신 뒤, 묻히셨다가 인류를 하나님과 화해시키고 분열과 갈등을 극복해 모든 사람들을 해방시키고 그들을 하나되게 하시기 위해 다시 살아 나셨으며(행10:36-40), 메시야로 새 하늘과 새 땅을 가져다 주신(계21-22장)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한국 그리스도인들의 신앙고백에 공감한다"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1953년 7월 27일의 휴전협정을- 평화협정을 향해가는 과정은 한반도를 위해서와, 그리고 동북아시아 그리고 세계평화에도 아주 중요합니다. 이 일에도 적극 헌신하며 기도하겠다고 다짐합니다. 바로 이런 그리스도의 화해와 일치 정신이 한국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정신과 노력, 기도이고 사명이어야 합니다.

우리교회들은 분명히 분단의 십자가적인 상황에서 고난의 종의 사명적 책임수행이 있다는 역사인식을 새롭게 해야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 신앙의 핵심인 예수님의 자기희생과 화해정신을 본받아, 분단 한반도의 통일과 하나되는 운동에 모든 힘을 기울여 평화통일의 참 해방을 가져오는 과제를 최우선시 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금후 한국교회는 남북 분단에서 한반도를 '하나의 새 민족으로 만들어 평화를 이룩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한반도 평화통일을 위하여 한국교회가 정신적, 물리적인 공헌이 뚜렷할 때에 비로서 하나님선교의 새시대가 크게 열리게 될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예수님의 하나님나라 운동이고 이 시대에 하나님이 한민족인 우리에게 주시는 하늘의 뜻이고 사명입니다. 성도 여러분에게 이 귀한 하나님의 은혜가 가득하기를 바랍니다.

끝으로, 분단된 이 땅에 사는 그리스도인들이 들여야 할 기도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현대신학 형성에 큰 영향을 준 키에르케고르는 기도란 인간의 최후 최고의 종교행위라고 설파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과 '개인적 실존을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구도자적인 삶을 살았습니다. 그의 기도문 가운데, '주님의 위대하심, 나의 하찮음'이 있는데, 이렇게 기도합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제가 진정으로 자신의 하찮음을 느끼게 해 주십시오. 그러나 그것 때문에 절망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크신 선하심을 더욱 느끼게 해 주십시오."

2014년은, 평화통일 남북 공동주일 기도문을 만들어 평화와 화해, 통일을 염원하며 광복절 직전주일을 '공동기도주일'로 지키기로 약속한지 25년째입니다. 참으로 어려운 시기에 남북교회가 '평화통일주일'로 지키자는 약속이었습니다. 오늘 우리교회는 "길과 진리, 생명 되시는 주님께! 주여, 우리 민족을 불쌍히 여겨 주소서! 분단으로 모든 길이 막힌 현실을 아파하며 평화통일의 길을 열어주소서!"라고 기도합니다.

성서와 교회역사의 오랜 역사에도 많은 훌륭한 인물이나 신앙의 선배들은 그들의 생애에서 참으로 어렵거나 기쁠 때, 심지어 사망의 문턱을 방황 할 때에도 하나님께 무릎을 꿇고 기도 했습니다. 많은 기도문이 있지만, 특별히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위해서, 수없이 듣고 외우고 노래하면서도 성. 프란시스코의 '평화의 기도'는 오늘도 변함없이 우리마음 깊은 곳에 새롭게 와 닿습니다.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 미움이 있는 곳에 사랑을, 상처가 있는 곳에 용서를, 분열이 있는 곳에 일치를, 유혹이 있는 곳에 믿음을 심게 하소서. 오류가 있는 곳에 진리를, 절망이 있는 곳에 희망을, 어둠이 있는 곳에 광명을, 슬픔이 있는 곳에 기쁨을 심게 하소서. 위로 받기 보다는 위로하며, 이해 받기 보다는 이해하며, 사랑 받기 보다는 사랑하며, 자기를 온전히 줌으로써 영생을 얻기 때문이니, 주여, 나를 평화의 도구로 써 주소서."성도 여러분에게 하나님의 화해의 일꾼으로써 책임감, 사명감의 은총이 충만하시길 바랍니다.

글ㅣ이기영 목사(기장, 전남노회)

<한국기독교장로회 총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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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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