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동주(尹東柱,1917.12.30~1945.2.16) 시인은 1943년에 독립운동 혐의로 일본 경찰에 체포되기 이전까지 도시샤 대학 영문과에 재학했다. 도시샤 대학으로 전학하기 전에는 릿교 대학에 재학했었다. 그는 릿교 대학에 다니다 도시샤 대학으로 전학했다.

1942년 3월, 릿교 대학 문학부 영문과에 선과로 입학한 그는 한 학기만인 그 해 10월 단짝 친구 송몽규가 있는 교토의 도시샤 대학 영문과로 전입학을 했다.

그의 시 <쉽게 씌여진 시>(1942. 6)의 "육첩방은 남의 나라 /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라는 구절에 나와 있듯이, 유학 초기 윤동주는 이국 땅에서 적잖이 향수병에 시달렸다고 한다.

전시체제하의 살벌한 분위기 속에서도 윤동주는 도시샤의 자유로운 학풍을 호흡하고, 송몽규를 비롯한 벗들과 어울리며 한결 안정된 유학 생활을 보낼 수 있었다.

윤동주의 일본 생활을 세 가지 곳으로 볼 수 있을텐데, 이 두 대학과 후쿠오카 형무소일 것이다. 이 곳들이 궁금했다.

릿교 대학 정문   ©박성민 기자

지난 달 31일, 기자는 릿교 대학을 방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교토에 위치한 도시샤 대학과 후쿠오카 형무소는 거리와 차비 문제로 안타깝게도 갈 수 없었고 다음을 기약해야 했다. 그러나 릿교 대학만이라도 방문할 수 있었다는 것이 큰 의미가 됐다.

릿교 대학은 일본 도쿄도 도시마구에 있는 이케부쿠로역에 위치하고 있었다. 캠퍼스는 이케부쿠로와 니자로 나뉜다. 도쿄 6대학 중의 하나인 릿교 대학은 일본 성공회에서 설립한 기독교 학교다.

이케부쿠로역에서 조금 걷다보니 Rikkyo-dori(릿교 거리)라는 표지판이 보였고 조금 더 걸으니 릿교 대학 정문을 만날 수가 있었다.

이케부쿠로역에서 걷다보니 Rikkyo-dori(릿교 거리)라는 표지판이 보였다.   ©박성민 기자

릿교 대학 정문을 본 후 약간의 감상에 젖었다. "아, 이곳이 그의 삶이 묻어있는 곳이구나..."라는 생각이 밀려왔다.

릿교 대학의 설립자인 미국 성공회 소속 미국인 선교사 처닝 M.윌리엄스 주교   ©박성민 기자

캠퍼스를 둘러 보다가 동상을 보게 됐다. 미국 성공회 소속 미국인 선교사 처닝 M.윌리엄스(Channing M. Williams:1829∼1910) 주교였다. 그는 성서와 영어를 가르치기 위해 도쿄의 외국인 거주 지역 안에 1874년에 이 학교를 세웠다. 설립 당시의 영어 명칭은 St.Paul's School였다. 이후 대학교로 개편됐다.

또 한 건물의 문 안을 창문으로 보니, 외국인 교수가 학생들과 노래 연습을 하는 것이 보였다. 채플 준비를 하는 듯 보였다.

한 건물의 창을 통해 외국인 교수가 학생들과 채플 준비를 하는 듯한 풍경을 보게 됐다.   ©박성민 기자

문제는 시비(詩碑)를 찾는 일이었다. 학생들과 교수로 보이는 이들에게 아무리 물어봐도 찾을 수가 없었다. 이에 대해 얻은 정보들에 의하면 릿교 대학에는 윤동주 시비가 없다고 나온다. 현재 일본에는 도시샤 대학과 교토 조형대학 등 일부 대학 캠퍼스에 윤동주 시인의 시비가 세워져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니 캠퍼스에서 사람들에게 아무리 물어봐도 고개를 갸우뚱거리는 모습 밖에는 볼 수 없었던 것이 당연했었다. 조금 더 자세히 알아봤었어야 했다는 감정이 들기도 했다. 잘못된 정보로 시비를 찾느라 그 날 갈 곳이 많았는데, 릿교 대학에서 거의 예상 시간의 2배 이상을 시비를 찾는데 써버렸기 때문이었다.

캠퍼스 내부   ©박성민 기자

윤동주를 기념하는 내용의 것을 사진으로 담아오는 것이 원래 계획이었는데 이것을 이루지 못하고 학교 사진과 주변 사진을 담아올 수 밖에는 없었다.

그가 일본 유학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되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수용됐다가 세상을 떠난 과정을 좀 봐야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1941년 연희전문학교 문과를 졸업하고 그는 일본으로 유학을 갔다. 이를 계기로 짧고 분방했던 일본 생활이 시작됐다. 불안하고 비우호적인 정세 속에서나마 역시 젊은이답게 이국의 하늘 밑에서 맘껏 견문을 넓히고 감성을 다듬을 수가 있었다.

그는 우에노 공원과 니혼바시 근처를 쏘다니며 이국의 낯선 풍물들을 익히고 하꼬네나 비와호 등지를 바람 같이, 구름같이 휘돌아 오기도 했다.

이 무렵이 그에겐 가장 행복한 시기였을 것으로 보는 시각도 있다. 굳이 행복의 절정이라고까지 말할 수 없을 지 몰라도 그 나름의 불안의식 속에서나마 자유로운 시적 상상과 오묘한 영성의 자극이 부단히 꽃을 피운 시기였다고 보기도 한다.

반면 그의 시 <또 다른 고향>에서는 그 당시 쫓기는 자의 심정과 위치에서 일종의 세찬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그의 정신의 세계가 손에 잡힐 듯이 드러나 있다. 투철한 선비 기질과 청교도적인 양심의 세계는 그로 하여금 외부와의 일체의 비타협과 단절 쪽으로 몰고 나가서 팽팽히 긴장된 사상 세계를 지탱하도록 만들었을 것임에 틀림없다는 의견이 있다.

그 당시의 상황은 태평양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러 날만 새면 전선으로 끌려나가는 출정군인과 부상을 당하여 후송되는 병사와 백골로 돌아오는 전몰군인의 행렬을 쉽사리 대할 수 있었다고 한다. <또 다른 고향>은 그러한 그의 의식 세계와 이미지가 자기 자신에게 투영되어 나타난 작품이라고 해석되고 있다.

당시 일제는 패전이 임박해오자 난무하는 유언비어 속에서 더욱 서슬이 퍼렇게 신경을 곤두세웠으며 한국인 학생들에 대한 감시와 사찰의 눈초리는 갈수록 날카로워져 갔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런 와중 당시 도시샤 대학 영문과에 대학 중 그가 쓴 시에 짙게 서려있는 반일 감정으로 인해 1943년 7월, 여름 방학을 맞아 귀국하려던 도중 일본 경찰에 연행되게 되어 후쿠오카 형무소에 2년형을 언도받고 수감된다.

그를 사상범으로 몰아세운 일경의 명분은 사상이 불온하고 독립운동에 가담했으며, 비국민(일본 신민이 아니라는 뜻), 서구 사상이 농후하다는 것 등이었다.

그는 송몽규와 함께 교토 경찰서에 검거됐다.

친지들의 증언을 종합한다면 그의 피체(彼逮)는 실제로 독립운동에 가담한 혐의가 아니라 평소 그가 지닌 항일적 색채의 민족의식을 구실로 삼은 일제의 과잉 단속 행위였다는 것으로 나타나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캠퍼스   ©박성민 기자

그는 2년을 채 견디지 못하고 수감 후 1년 7개월 뒤인 1945년 2월, 뇌일혈로 병사했다. 조국이 광복되기 꼭 6개월 전이었다.

윤동주는 당시 지인들의 증언에 따르면 정말 건강한 청년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윤동주가 복역 중에 생체 실험을 당해서 사망했다는 소문이 생겼다. 윤동주는 실제로 복역 중에 어떠한 주사를 자주 맞았고 함께 수감된 외사촌형이자 친구인 송몽규 또한 이 주사를 자주 맞았다고 한다.

윤영춘이 윤동주 시신을 거두러 교도소에 들를 당시 송몽규를 면회했는데 이름모를 주사를 맞았다는 말을 하여 오래 전부터 살해당한 거 아니냐는 말이 많았다.

1980년 5월호 현대문학지에 한 일본인 시인이 윤동주와 송몽규가 혈액대체 실험을 위한 실험재료로 쓰여서 사실상 살해당했다는 글을 기고한 적이 있다.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윤동주의 죽음과 얽힌 음모를 조사한적이있는데 당시 일본군은 전시체제라서 생리 식염수를 개발하는 연구를 하고 있었고 독립운동을 한 괘씸죄로 윤동주가 실험대상으로 지목됐다고 한다. 윤동주에게 주사한 물은 다름아닌 후쿠오카 앞바다의 바닷물로, 일본군이 연구하던 이런 생리 식염수 연구는 이미 십수년전 유럽에서 동물에게 실험해 이미 검증이 끝난 실험이었다고 전해진다.

이와 관련, 2000년대 최근에 미국 국립도서관 기밀 해제 문서 중에서 1948년 일본 전범재판 관련 문서에 당시 큐슈제국대학이 실제로 연구하고 있던 대체혈액 실험의 일환으로 후쿠오카 형무소 재소자들을 상대로 생리식염수 대체용액을 수혈하는 생체실험을 했다는 증언이 쓰여져 있는 것이 확인됐다.

이에 딱히 고문을 당한 일도 알려지지 않았기에 이 생체실험이 윤동주의 사인으로 유력하다고 볼 수 있게 됐다.

일각에서는 일제가 뇌일혈 사인도 일제의 조작이 아닌가 했지만 바닷물 속 세균감염의 증상과 비슷한 것으로 확인된 상태다.

한편, 릿교 대학에서는 일본에 유학했던 윤동주 시인을 기리며 매년 '윤동주 시인 추모 행사'가 행해지고 있다. 윤동주 연구자 등을 주축으로 구성된 '시인 윤동주를 기념하는 릿교의 모임'이 추모 행사를 열고 있다.

2007년에 윤동주 시인을 기억하는 이들이 도쿄에서 시인 윤동주와 함께 모인다는 소모임을 만든 것이 릿교 모임의 계기가 됐다. 이들은 2008년부터 윤동주 연구자인 야나기하라 야스코(楊原泰子) 씨를 중심으로 릿교 모임이라는 이름으로 추모 행사를 열어 왔다.

릿교 모임은 윤동주 시와 신앙, 윤동주 시의 혼, 윤동주 시의 원류 등을 주제로 매년 강연을 여는 등 고인의 삶과 작품 세계를 이해할 기회를 일본에 제공하고 있다.

릿교 대학 캠퍼스   ©박성민 기자

기자가 갖고 있는 윤동주에 대한 애착은 어디서부터, 어떤 점에서 오게 됐는지 스스로 물어보게 된다. 일본에 가서 윤동주를 놓치지 않고 그의 행적을 쫓게 된 마음은 어떻게 생겨난 것인지 묻게 된다. 그는 오늘의 우리에게 누구일까라는 물음도 던지게 된다.

그의 이름이 오늘에도 이렇게 불려지는 이유는 아마도 마음으로, 시로 한 시대와 양심을 노래했기 때문에, 또 마음 다해 삶을 얘기하고 젊음을 노래하고 '순결'을 얘기했기 때문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한다. 윤동주는 일본에도 있었고 한국에도 있었지만, 그는 기자의 '마음'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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