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참사 위로와 회복을 위한 한국교회연합기도회가 9일 저녁 안산제일교회에서 열렸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K, 총무 김영주 목사)는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을 위로하는 공동설교문과 기도문을 발표했다.

NCCK는 "오는 11일로 세월호 희생자들을 위한 특별기도주간을 마치며 기도주간에 참여한 한국교회에 감사의 뜻을 전달하고, 기도주간은 마쳤지만 아직 세월호 참사는 진행 중이라는 의미에서 한국교회가 함께 기도하자는 공동기도와 공동설교문을 회원교회에 발송한다"고 전했다.

또 "사고 이후 안산지역 교회들과 긴밀히 협력하는 과정에서 안산 지역의 목회자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안산 지역과 사고 및 피해자 등이 국민들에게 잊혀지지 않을까'하는 우려와 '그 이후 나타나는 2차 피해'에 대한 염려를 전해와 이같이 결정했다"고 밝혔다.

NCCK는 "부활절 다음 날인 4월 21일부터 가정주일인 5월 11일까지를 '한국교회 공동기도 주간'으로 정하고 기도하고 있다"면서 "(공동기도문과 공동설교문 발표는) 이것이 끝이 아니며 절대로 이 참사의 희생을 헛되이 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는 다짐의 의미를 더해졌다"고 밝혔다.

서울광장에 마련된 분양소에는 세월호 희생자들을 애도하는 리본과 글로 가득찼다.   ©기독일보

NCCK는 지난달 30일의 입장발표에서 이 참사를 잊지 않고 끝까지 직시하고 감시할 것을 다짐하고, 이를 위해 '거룩한 분노'를 잠재우지 말 것을 국민들에게도 호소한 바 있다. 공동기도문과 공동설교문은 NCCK 홈페이지(www.ncck.or.kr)와 회원교단 홈페이지에서 다운받아 사용가능하다. 다음은 NCCK 공동기도문과 공동설교문 전문.

세월호 침몰사고로 슬픔 당한 이들을 위한 '한국교회 공동기도문'

하나님,
모처럼 내리는 봄비가 참 반가웠습니다.
그러나 우산도 없이 그 비를 맞으며
가슴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눈물을 금할 수 없었습니다.
그 비가 마치 가족을 잃고 슬피 우는 이들의 눈물처럼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주님, 자식을 잃고 통곡하는 이 땅의 라헬들의 울음소리를 듣고 계십니까?
팽목항에서 담요를 들고 돌아오지 않는 아들딸을 기다리며
야속하게도 푸른 바다만 바라보는 엄마들의 심정을 헤아리고 계십니까?
이제는 울음소리조차 나오지 않아
마른 울음을 울다 지쳐 쓰러진 이들을 보고 계십니까?
공포에 질린 채 다가오는 죽음을 속절없이 바라보아야 했던
그 착하디 착한 이들은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채 피어 보지도 못한 채 스러진 꽃봉우리들 앞에서 우리는 할 말을 잊었습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
예수님의 아픈 탄식을 우리는 지금 이 땅에서 듣고 있습니다.

주님,
뜻하지 않은 시간에 죽음을 맞이한 이들을 긍휼히 여겨주십시오.
뜻하지 않은 시간에 가족을 잃은 이들을 긍휼히 여겨주십시오.
슬픔의 강물에 떠밀리고 있는 모든 이들을 긍휼히 여겨주십시오.
가슴 속에 심연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생존자들을 긍휼히 여겨주십시오.
누구보다 큰 충격을 받은 이땅의 청소년들을 긍휼히 여겨주십시오.
주님의 크신 품으로 안으시고,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십시오.

주님,
인류의 첫 사람을 '너희가 신처럼 되리라' 유혹하며
기어코 선악과를 따먹게 했던 그 징그러운 뱀은 지금도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성장과 발전 강박'에 사로잡혀 행복의 신기루를 따라 질주하는 동안,
우리는 하늘도, 이웃도, 자기 자신도 다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돈이 지배하는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는 모두 괴물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효율과 경쟁'을 삶의 원리로 받아들인 후 세상은 죽음의 벌판이 되고 말았습니다.
구조를 위해 최선을 다해야 할 그 시간에,
언론은 죽은 이들이 받을 보상을 계산하는 기민함을 보였습니다.
이것이 적나라한 우리 사회의 민낯입니다.
돈 귀신이 이 땅을 휘젓고 다닙니다.

주님,
돈벌이를 위해 생명을 죽음의 벼랑 끝으로 내몰고도 반성할 줄 모르는 기업,
관리 감독 책임을 지고 있으면서도 무사안일하게 대처해온 관료들,
위기에 빠진 이들을 버려두고 제 한 목숨 구하기 위한 달아난 사람들,
그리고 위험하다는 이유로 구조의 임무를 방기한 사람들,
그 참담한 상황 속에서도 비용만 계산하고 있던 사람들,
실체적 진실을 보도하기 보다는 가십거리만 찾는 언론,
마치 남의 말을 하듯 다른 이들에게만 책임을 묻는 무능한 정부,
성급하게 값싼 화해와 용서를 권유하는 교회,
그리고 이런 현실에 눈을 감고 살아온 우리 모두를 엄히 꾸짖어주십시오.

하오나 주님,
우리는 이 비극 속에서도 희망을 보았습니다.
다른 이들을 위해 기꺼이 위험 속으로 들어간 이들 말입니다.
그들은 죽음의 벼랑 끝에서 오히려 인간 정신의 위대함을 드러냈습니다.
우리는 그들 속에서 참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그림자를 보았습니다.
그들 덕분에 우리는 슬픔 속에서도 위로를 얻습니다.

주님,
이제 다시는 이 땅에서 이런 비극이 반복되지 않게 해주십시오.
세월호에서 희생당한 이들의 죽음이 헛되이 허비되지 않게 해주십시오.
이 일을 계기로 우리 문화가 생명중심의 문화로 변화되게 해주십시오.
저들의 억울한 죽음을 망각의 강물 속에 떠내려 보내지 않게 해주시고,
새로운 세상을 위한 주춧돌로 삼게 해주십시오.
그때 비로소 우리는 부활의 기쁨을 진심으로 찬미할 수 있겠나이다.
에스겔의 해골 골짜기에 불어왔던 생기를 지금 우리에게도 보내주십시오.
아멘.

세월호 침몰사고로 슬픔 당한 이들을 위한 '한국교회 공동설교문'

<평강이 있을 지어다> 요한복음 20:19-22

하나님의 평화가 우리 모두와 함께 하시길 빕니다.

얼마 전 긴 사순절을 보낸 우리지만, 이제 더욱 긴 고통과 아픔의 시간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고난주간 수요일에 들었던 슬픈 소식 때문입니다. 결코 일어나지 말았어야할 참람한 사건이었습니다. 날 벼락같은 세월호 참사로 온 나라가 아파합니다. 그 어처구니없는 불상사 때문에 뭇 가슴이 분노합니다.

언제쯤, 어떤 방식으로, 세월호 사고가 마무리 될지 아직 짐작조차 할 수 없습니다. 다만 우리는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는 말씀대로 더욱 안쓰러운 마음으로 기도하고, 근신해야 할 것입니다. 깨어있어, 수습의 과정을 지켜봄으로써 상식과 정의가 바른 자리를 잡고, 안정과 평화가 온전히 회복될 수 있도록 등불을 밝혀야 합니다.

결코 남의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누구나 겪을 수 있었던 일이기에 말문이 막합니다. 이런 재난 앞에서는 남의 자식, 내 자식을 가릴 일이 못됩니다. 모두 착한 딸과 아들이었고, 선량한 시민이었습니다. 우리 모든 어른은 죄인이 되었고, 가족의 심정을 모두 헤아려주지 못하는 나쁜 이웃이 되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비통해하는 희생자 가족을 위로해 주시길 바랍니다.

오히려 가족들은 우리더러 더 이상 미안해하지 말라고 합니다만, 우리는 이 아픔을 내내 같이 해야 합니다. 더 이상 슬픔 위에 무게를 더하지 않도록, 아픔 위에 생채기를 만들지 않도록 우리 교회와 공동체들이, 언론과 정부가 근신하고, 진정성을 가지고 공감해야 합니다. 우리 모두의 공동책임이요, 무한책임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교회는 부활 절기를 맞고 있습니다. 슬픔에 잠긴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첫 인사는 놀랍게도 바로 평화였습니다.
"이 날 곧 안식 후 첫날 저녁 때에 제자들이 유대인들을 두려워하여 모인 곳의 문들을 닫았더니 예수께서 오사 가운데 서서 이르시되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 20:19).

1) 먼저, 주님의 부활은 평화의 소식입니다.

예수님은 끔찍한 십자가 사건을 목격한 사람들에게 십자가에 달리신 당사자만이 할 수 있는 위로를 주고 계십니다. 부활하신 주님만이 가능한 그 손으로 아픔을 달래주고 계십니다. 절망과 두려움을 이길 평화의 소식을 전하고 계십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예수님의 평강의 인사가 오늘 슬픔을 당한 우리 모두와 함께 하십니다. 때때로 삶의 위기와 절망은 하나님의 은총을 잊어버리게 합니다. 깊은 아픔은 부활 이전의 불신앙과 공포의 상태로 되돌리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 와중에도 예수님의 부활하심은 하나님의 초월적인 능력과 사랑에 대하여 문을 여신 사건입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부활하신 예수님은 여러 차례 반복하여 평화의 인사를 전하십니다. 20장에는 "평강이 있을지어다"(20:19, 21, 26)라고 인사 문구가 세 차례 되풀이됩니다. 평화에 대한 중요성과 진정성이 느껴집니다.

첫 번째 평화인사는 안식 후 첫 날 저녁 제자들이 모인 곳에서, 두 번째 평화인사는 제자들에게 파송의 말씀을 하신 후에, 그리고 세 번째 평화인사는 8일 후 다시 제자들을 방문해서입니다. 세 번째는 여전히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하던 도마도 함께 하던 때였습니다.

골고다 십자가 사건은 참으로 끔찍했습니다. 그러나 정작 제자들이 느낀 위기의식은 십자가 사건 직후에 불어 닥칠 후폭풍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십자가 아래에서 도망친 제자들은 이제 다시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몹시 긴장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숨죽이며 지낸지 사흘째입니다.

제자들은 함께 모여 있었고, 문을 굳게 닫았습니다. 안식 후 첫 날 이른 아침에 막달라 마리아 일행이 주님의 무덤에 다녀와서 빈 무덤과 함께 주님의 부활소식을 전했으나 믿기 어려웠습니다. 여전히 공포에 질린 그들은, 아직 진리는커녕 눈에 보이는 사실조차 제대로 분별할 능력이 없었습니다. 이런 제자들의 두려움 한 가운데로 부활하신 예수님이 문을 두드리셨습니다. 그 절망 속으로 평화의 주님께서 직접 찾아오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무덤을 찾아온 여성들과 처음 만났을 때 이렇게 물으셨습니다.
"평안하냐"(마 28:9).
숨어있는 제자들에게는 직접 찾아가셔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평강이 있을 지어다"(19).

이렇듯 평화는 예수님의 부활 인사였습니다. 제자들의 불안과 두려움을, 좌절과 절망을 다 이해하시는 예수님의 위로는 바로 평화의 문안에서부터 시작합니다. 한 마디로 평안, 평강, 평화는 부활하신 주님이 모든 인간에게 주시는 부활의 선물입니다.

2) 지금, 우리에게 평화의 소식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평안이 없는 사람들, 평강을 빼앗아가는 삶의 위기, 평화를 갈망하는 사회를 향해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라고 선포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선포하신 그 평안, 그 평강, 그 평화는 지금, 여기, 우리에게도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위한 평화의 안전망이 되십니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빌 4:7).

세월호 침몰 사고 이후 우리 사회는 얼마나 애통한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지냅니까? 일상의 기쁨과 소소한 즐거움을 누리는 것조차 눈치가 보여 모두 몸조심하며 살아갑니다. 슬픔을 당한 가족과 그 심정을 공감하려고 입조심, 마음조심하며 지냅니다. 당사자가 된 그분들은 얼마나 가슴이 찢어지고, 심령이 참람할까요? 성장하는 자식을 둔 입장에서 상상하기도 무섭습니다. 학교 보내는 자녀를 둔 부모의 심정으로 말을 꺼내기도 두렵습니다.

놀라운 것은 침몰 하는 배 안에서 보낸 아이들의 문자와 사진 그리고 동영상 때문입니다. 아이들은 배 밖의 상황을 전혀 알지 못한 채, 막연히 구조되리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두려움을 잊은 채 구조를 당연하게 여긴 것은 그만큼 우리 어른들에 대한 신뢰 때문일 것입니다. 그 와중에도 희망과 웃음을 잃지 않던 아이들의 재잘거림이 내 귀의 이명처럼 울리고 있습니다.

그런 꽃 같은 아이들을 흘려보낸 우리는 평화를 잃어 버렸습니다. 이젠 뉴스를 듣는 일도 괴롭습니다. 조만간 들끓던 여론도, 뜨겁던 눈물도 조금 있으면 다시 일상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지금은 너무 지나친 관심 때문에 괴로워하던 가족들은 잠시 후에는 너무 빨리 멀어져 버린 관심 때문에 힘들 것입니다. 우리는 잠깐 새 너무나 많은 안전과 평안을 잃어 버렸고, 바다로 흘려보냈습니다.

예수님이 묻는 평화의 인사는 전쟁이 그친 후에 누릴 그런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환난과 재난이 지난 후에 저절로 얻게 될 사후적 의미의 평화가 아닙니다. 지금 네가 겪는 위기의 순간에도 불구하고 이 순간, 네 안에, 이웃과 더불어 평화가 있는지 묻고 계십니다. 지금, 여기, 내 삶 한 가운데에서 하나님의 평화를 믿느냐는 것입니다. 날마다 필요한 일용할 평화가 있느냐? 고통 받는 사람까지도 감싸줄 그런 넉넉한 평화가 있느냐고 물으시는 것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이 말씀하신 '평화'는 십자가라는 그 끝 모를 아픔과 모진 수난 직후에 나온 당사자로서 '평화'이기에 남다릅니다. 세상이 가져다주는 일시적인 평안과는 다른 '그 분의 평안'이었습니다. 우리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받아들인다는 것은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를 내 안에 받아들인다는 의미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말씀하신 평화에 대한 선언은 이미 십자가에 달리기 전에 약속하신 것입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요 14:27).

이 세상이 주는 평안은 충분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구할 수 있는 평화는 변덕스럽고, 믿음직스럽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정부가 장담한 안전은 '문제로부터 도피'에 불과했습니다. 힘 있는 자들의 약속은 미봉책이고, 그림자에 불과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의 근거는 부활하신 예수님 그 분에게로부터 옵니다.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평안은 "위에서 주"(요 19:11)시는 평안입니다. 일시적이거나, 임시적이 아닙니다. 환경이나 조건에 따라 지배당하지 않고, 오히려 환경과 조건을 변화시킵니다. 평안을 주시는 분은 바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롬 5:1).

부활신앙을 지닌 사람은 은총의 지배를 받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값없는 은총 속에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미 현실 속에 들어와 개입하시는 하나님의 평화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근원적으로 하나님을 알고, 그 분의 자녀로 살아간다는 사실은 얼마나 놀라운 은총의 삶입니까?

3) 당장, 평화를 회복하도록 도와야 합니다.

오늘의 위기를 전문가들은 위기불감증이니 고속성장통이니 말하지만, 더 근본적 원인은 우리 사회가 가장 소중한 가치를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잘 사는 것에 대한 노하우는 많이 있습니다. 사후약방문처럼 매뉴얼은 수없이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러나 바르게 사는 방법, 정직하고 정의롭고 사는 방식에 대한 시스템은 별로 갖추어 두지 못했습니다. 그런 진실한 삶을 살도록 안내하는 노하우와 매뉴얼과 시스템은 도무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세월호 참사를 보면서 분노가 치미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공적 책임을 진 사람들의 무사안일과 무책임을 보면서 탄식합니다. 이제라도 대한민국의 신뢰와 국민의 희망이 침몰했으니 다시 건져내야 한다고 벼릅니다. 심각하게 우리 삶의 재건축이 요청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교회가 부딪친 문제는 세월호의 위기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신앙의 눈으로 본다면, 예수님의 마음으로 살핀다면, 빨간 십자가를 단 세월호들은 곳곳에 널려 있습니다. 무책임한 선장과 항해사들은 우리 자신이 될 수도 있다는 심각한 경고를 들어야 합니다.

우리는 세월호 참사에 대한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감시하고, 결론이 날 때까지 시민 사회와 더불어 인내하며 지켜봐야 합니다. 무섭게 잘못을 따지고, 개선책을 마련해야 그나마 희망이 있습니다. 그래야 세월호 참사가 값을 주고 살 수 없는 교훈이 될 수 있습니다. 그래야 진정한 평화가 회복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두려움으로 가득한 제자들을 향해 평화를 빌어 주신 후, 그들을 평화의 사도로 파송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 같이 나도 너희를 보내노라"(21).
예수님의 평화는 성령의 도우심으로 가능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파송하시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들을 향하사 숨을 내쉬며 이르시되 성령을 받으라"(22).

우리 스스로 평화를 만들 수 없습니다. 오직 성령만이 진정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를 얻게 하며, 내 삶과 우리 세상에서 그런 평강을 누리게 합니다. 부활신앙으로 평화를 주시는 주님은 바로 나의 그리스도이십니다.

비통함 가운데 고마운 것은 노란 리본의 물결입니다. 노란 리본들은 눈물을 닦아주는 노란 손수건처럼, 연약한 이들의 연대 표시처럼 느껴집니다. 오랜만에 우리 사회가 색깔에 대한 시시비비없이 같은 색깔로 마음을 모을 수 있다는 것은 작은 가능성처럼 보입니다. 무성한 노란 띠들은 애통하는 가족과 나누는 위로와 희망이며, 동시에 세상 안에서 이루어야 할 정의와 평화에 대한 갈증입니다. 이제 가슴의 리본에서 머물지 말고, 새로운 삶의 고백과 결단을 통해 거룩한 삶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제자 된 그리스도인의 본분입니다.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

하나님의 은총이 고통당하는 이들을 위로하고, 회복시키며, 우리 사회를 다시 일으켜 주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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