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데이비드 주콜로토 박사의 기고글인 'PTSD를 겪는 그리스도인들, 두려움이 곧 믿음의 부족은 아니다’(Christians with PTSD: Why fear doesn’t mean weak faith)를 11월 3일(현지시각) 게재했다.
주콜로토 박사는 전직 목사이자 임상 심리학자이며 35년 동안 병원, 중독 치료 센터, 외래 진료소 및 개인 진료소에서 근무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필자는 납치 피해자와 성 착취 피해 여성, 차마 자세히 옮기기 어려운 학대를 겪은 사람들을 상담해왔다. 전쟁에서 돌아온 뒤 자기 침대에서도 잠들지 못하는 군인들도 만났다.
미국 캘리포니아주 팔로알토의 보훈병원에서 지속노출치료(Prolonged Exposure Therapy)를 배운 뒤 35년 넘게 상담에 활용했다. 그 과정에서 운전도, 외출도, 밤에 편히 눈을 감는 일도 어려워하던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생존자들이 일상을 되찾는 모습을 지켜봤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을 상담할 때면 자주 마주하는 어려움이 있다. 거의 같은 말로 표현되는 고민이다.
“정말 믿음이 있다면 이렇게 두렵지는 않을 텐데요.” 그 말 뒤에는 죄책감이 숨어 있다. 이들은 두려움을 겪는 데서 그치지 않고, 두려워하는 자신을 부끄러워한다. 불안이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있다는 증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더 간절히 기도하고, 증상을 더 철저히 숨기며, 두려움을 일으키는 상황을 피한다.
마지막 반응은 특히 중요하다. 실제로 안전한 상황까지 계속 피하면 외상과 연결된 두려움이 유지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두려움이 믿음 부족의 증거라는 말에 동의하지 않는다. 두려움은 우리의 신앙에 내려진 판결이 아니다. 오히려 두려움에 맞서 회복을 향해 나아가는 일이 믿음의 실천일 수 있다.
머리는 알아도 몸은 다르게 반응한다
결혼식 피로연에서 새우를 먹고 그날 밤 심하게 아팠다고 가정해보자. 나중에 하객 절반이 같은 장염을 겪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새우가 원인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크다.
그런데도 10년이 지나도록 새우 요리를 보기만 하면 속이 불편할 수 있다. 머리로는 새우가 괜찮다는 사실을 알지만, 몸의 반응은 그 지식을 따라주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이런 경험이 하나쯤 있다. 일곱 살 때 자신을 물었던 개, 다른 차가 신호를 어기고 들이받았던 교차로가 떠오를 수도 있다. 이제는 괜찮다고 아무리 되뇌어도 마음 깊은 곳의 경계심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우리는 새우를 보고 속이 불편하다고 죄책감을 느끼지는 않는다. 개가 무섭다는 이유로 신앙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그런데 몸이 위험과 연결해 기억한 것이 총성이나 잠긴 방, 복도에서 들려오는 남성의 목소리라면 왜 갑자기 믿음의 문제로 판단하는가.
마이크의 이야기를 살펴보자. 그의 사례는 필자가 오랫동안 상담해온 많은 사람의 경험과 닮아 있다. 아마 독자들도 주변에서 비슷한 사람을 만났을 것이다.
마이크는 집사이며 남성 성경공부 모임을 이끈다. 성실하고 믿음직해 주변 사람들이 의지하는 사람이다.
6년 전, 그가 달리던 주간고속도로 I-40에서 트럭이 중앙분리대를 넘어와 그의 차를 들이받았다. 마이크는 손목 골절을 입었지만 살아남았다. 손목은 나았으나 그날 이후 고속도로를 운전하지 못했다.
손주들을 만나러 갈 때도 일반 도로로 돌아갔다. 매번 40분이 더 걸렸다. 자동차 햇빛가리개에는 다음 말씀을 적은 카드를 끼워뒀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절제하는 마음이니”(딤후 1:7).
그러나 고속도로 진입로를 볼 때마다 심장이 뛰고 손이 저렸다. 그때마다 말씀을 바라보며 오히려 더 괴로워했다. 자신이 이끄는 성경공부 모임에는 그 사실을 말하지 못했다.
필자에게 처음 꺼낸 말도 이랬다 “제가 하나님을 충분히 신뢰하지 않는 것 같습니다.”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에는 동행의 약속이 있다
그의 고민을 이해할 수 있다. 성경은 거듭 두려워하지 말라고 말씀한다. 그렇다면 계속 두려워하는 것은 믿음이 부족하다는 뜻이 아닐까.
그러나 그 말씀을 듣는 사람들이 누구인지 살펴봐야 한다. 그들은 이미 두려워하고 있다. 그리고 그 말씀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함께 주어진다: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사 41:10).
어둠을 무서워하는 아이에게 건네는 말을 떠올려보자. 우리는 아이가 겁을 낸다고 꾸짖기보다 복도에 불을 켜고 침대 곁에 앉아준다.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성경이 두려워하는 사람을 어떻게 묘사하는지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시편 기자는 “두려움과 떨림이 내게 이르고 공포가 나를 덮었도다”(시 55:5)라고 고백한다. 성경은 그 고백을 감추지 않는다.
엘리야는 큰 승리를 경험한 직후 이세벨의 위협을 받고 도망쳤다. 하나님은 그에게 먼저 잠과 음식을 허락하셨다. 그리고 다시 먹고 쉴 수 있도록 돌보셨다.
바울도 자신의 뜻과 몸에서 일어나는 일 사이의 갈등을 알았다. 그는 로마서 7장 23절에서 자신의 지체 속에 있는 다른 법이 마음의 법과 싸운다고 설명했다.
물론 바울은 공황이나 외상이 아니라 죄에 관해 말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가 묘사한 불일치는 외상 생존자들에게도 익숙하다. 머리로 아는 사실을 몸이 따라주지 않는 경험이다. 무언가를 더 많이 안다고 몸의 공포 반응이 곧바로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마이크의 어려움도 하나님을 신뢰하지 않아서 생긴 것이라고 단정할 수 없었다. 그의 몸은 사고가 났던 날 위험을 학습했다. 그 과정에서 그의 허락을 구하지는 않았다.
과민해진 경보는 새로운 경험을 통해 배운다
위험에 반응하는 뇌의 체계는 연기감지기와 비슷하다. 끔찍한 일을 겪으면 당시 주변에 있던 자극이 위험과 연결될 수 있다.
마이크에게는 합류하는 차량과 대형 트럭 소리, 고속도로 진입로가 그러했다. 그런 자극을 만나면 생각할 틈도 없이 경보가 울렸다. 괜찮다고 자신에게 말할 때에는 이미 몸이 공포에 반응하고 있었다.
연기감지기를 말로 설득할 수는 없다. 그러나 새로운 경험을 통해 위험과 안전을 구분하도록 도울 수는 있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노출치료는 이러한 원리를 활용한다. 치료자의 도움 아래 실제로 안전한 상황에 계획적이고 단계적으로 접근하면서, 예상했던 재앙이 일어나지 않는 경험을 쌓아간다. 위험한 상황을 무작정 견디라는 뜻은 아니다.
오랫동안 공포를 연구해온 UCLA의 심리학자 미셸 크라스크와 동료들은 2022년 종설에서 이러한 학습 과정을 설명했다. 두려워했던 결과가 발생하지 않으면 뇌는 예상과 현실의 차이를 경험하고 새로운 정보를 배운다.
기존의 공포 기억이 완전히 지워지는 것은 아니다. 그 기억과 경쟁할 새로운 기억이 형성되는 것이다. 과거의 기억이 “위험하다”고 말할 때, 새로운 기억은 “지금은 안전하다”고 알려준다. 반복적인 경험은 새로운 기억을 활용하는 데 도움이 된다.
예레미야애가의 고백도 고통의 기억과 소망이 함께 존재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저자는 자신의 고통을 여전히 기억하면서도 “이것들이 내 마음에 떠오르므로 내가 오히려 소망이 있사옴은”(애 3:21)이라고 말한다. 이어 하나님의 긍휼이 아침마다 새롭다고 고백한다.
이 말씀을 치료 기법에 대한 설명으로 읽을 수는 없다. 다만 고통의 기억이 사라지지 않아도 소망의 근거를 다시 마음에 새길 수 있다는 사실을 묵상하게 한다.
두려움이 사라진 뒤에야 걸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마이크는 처음부터 I-40에 진입하지 않았다. 우리는 일요일 아침 차량이 거의 없는 왕복 4차로 도로에서 시작했다. 다음에는 가까운 곳에 출구가 있는 짧은 고속도로 구간을 달렸다. 이후 거리를 늘리고 교통량이 많은 시간대에도 운전했다.
그는 계속 준비됐다는 느낌이 들기를 기다렸다. 필자는 그런 느낌이 먼저 찾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고 설명했다.
여호수아 3장에서 제사장들은 요단강물이 멈춘 것을 확인한 뒤 강에 들어간 것이 아니다. 말씀을 따라 물가에 발을 내디뎠다. 그들의 감정 상태를 우리가 모두 알 수는 없지만, 모든 불확실성이 사라진 뒤에야 순종한 것은 아니었다.
마이크의 죄책감도 조금씩 느슨해졌다. 그는 믿음이란 두려워하지 않는 것이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이제는 두려워하면서도 회복에 필요한 걸음을 내딛도록 격려받고 있었다.
다윗도 골리앗 앞에서 이전에 경험한 하나님의 도우심을 기억했다. 사울이 그를 염려하자 다윗은 사자와 곰에게서 자신을 건지신 하나님께서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지실 것이라고 말했다(삼상 17:37). 그에게는 돌아볼 수 있는 경험이 있었다.
마이크 역시 운전 경험을 하나씩 쌓아갔다. 고속도로에 진입한 뒤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할 때마다 그의 몸은 현재의 위험과 과거의 경보를 조금씩 구분해갔다.
두려움이 돌아왔다고 회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상담을 마친 지 8개월 뒤 마이크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동안 녹스빌까지 여러 차례 운전했지만, 어머니가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내슈빌로 향하던 중 강한 공포가 되살아났다는 것이다.
죄책감도 함께 돌아왔다 “하나님께서 이 문제를 치유해주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그동안의 회복이 모두 무효가 된 것은 아니었다. 과거의 기억은 사라지지 않았고, 그날은 그 기억이 다시 강하게 반응할 조건들이 겹쳐 있었다. 익숙하지 않은 도로였고, 집중적으로 연습하던 때로부터 시간이 지났으며, 어머니의 입원으로 큰 스트레스도 받고 있었다.
베드로가 물 위를 걸었던 일은 실제였다. 이후 바람을 보고 두려워하며 가라앉기 시작했다고 해서 앞서 내디딘 걸음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자리에서 손을 내밀어 그를 붙드셨다.
시편 42편과 43편에서도 시인은 자신의 영혼이 왜 낙심하는지 반복해서 묻고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권한다. 불안이 다시 찾아올 때마다 소망을 기억하는 일이 필요했던 것이다.
마이크는 휴게소에 차를 세웠다. 아내에게 전화하고 10분쯤 쉰 뒤 다시 출발해 내슈빌에 도착했다.
“믿음이 있다면 두려워서는 안 된다”는 기준을 내려놓는다
전쟁을 겪은 군인, 성 착취에서 살아남은 여성, 어린 시절 학대를 겪어 큰 목소리에 여전히 움츠러드는 사람, 고속도로 진입로 앞에서 손이 저려오는 집사까지 사연은 달랐다. 그러나 많은 이가 비슷한 기준을 품고 상담실에 들어왔다.
‘신실한 사람이라면 이런 감정을 느껴서는 안 된다.’ 신앙적인 말처럼 들리지만 성경이 제시하는 기준은 아니다.
다윗은 시편 56편에서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내가 주를 의지하리이다”(시 56:3). 다윗은 두려움을 느낄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았다. 두려움이 찾아올 때 하나님을 의지한다고 말했다. 그에게 두려움은 신뢰의 반대말이 아니라 신뢰를 실천하는 순간이었다.
필자는 상담 현장에서 이러한 변화를 반복해서 지켜봤다. 두려움이 사라지기 전에 죄책감이 먼저 줄어든다. 두근거리는 심장과 떨리는 손을 하나님의 정죄로 해석하지 않게 되면, 회복에 필요한 어려운 과정을 감당할 여지가 생긴다.
온몸이 도망치라고 외치는데도 안전한 치료 상황에 머무는 사람, 주차장에서 한참 떨다가 도움을 받으며 상점 안으로 들어가는 군인, 손이 저리지만 배운 과정을 따라 다시 운전대를 잡는 집사의 걸음에는 용기가 필요하다.
시편 23편의 시인은 골짜기를 완전히 벗어난 뒤에야 하나님의 동행을 고백한 것이 아니다. 여전히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걷는 중에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고 말했다. 길이 갑자기 밝아진 것은 아니지만, 혼자 걷지 않는다는 사실을 의지했다.
두려움이 남아 있다고 해서 믿음이 실패한 것은 아니다. 외상 이후의 공포 반응을 겪는다는 이유로 자신을 정죄할 필요는 없다. 필요한 도움을 받고, 자신의 속도에 맞춰 회복의 걸음을 내딛을 수 있다.
마이크는 지금도 내슈빌까지 운전한다. 모든 여정이 편하지는 않다. 그러나 지난봄에는 성경공부 모임에서 진입로 앞에서 겪었던 두려움까지 자신의 이야기를 모두 나눴다. 모임이 끝난 뒤 세 사람이 남았다. 그들에게도 각자의 비슷한 고민이 있었다.
마이크는 예전에 이렇게 말했다 “정말 믿음이 있다면 두렵지 않을 텐데요.” 이제 그의 고백은 달라졌다 “두려웠습니다. 그래도 나아갔습니다. 그것이 믿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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