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덴동산은 지구 전체가 아니었다. 그것은 “지구 안에서 안전하게 에워싸여 있는 환경이었다.” 동산 밖의 땅은 아직 에덴동산처럼 정돈되고 쾌적한 상태가 아니었다. 그것은 척박한 미완의 공간으로 남아 있었다. 그러므로 아담이 땅을 정복하고 다스려야 한다는 것은, 온 땅이 에덴처럼 될 때까지 동산의 경계를 바깥으로 넓혀 가는 사명을 의미한다. 뱀의 사악함과 인간의 반역으로 인해 세상은 몹시 황폐해졌다. 그러나 하나님은 창조 세계에 대한 자신의 처음 목적을 결코 포기하지 않으신다. 누가 창조주 하나님의 선한 의지를 꺾을 수 있겠는가. 죄악에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무효로 돌릴 만한 힘이 없다. 하나님은 온 땅을 자신의 영광스러운 임재와 생명으로 가득 채우고 주권적으로 통치하려는 계획을 철회하지 않으신다. 그 목표가 달성될 때까지 하나님은 멈추지 않으신다. 하나님은 다시 시작하신다.
홍인규 - 성경의 거대 서사
우리 안에는 세 가지 작용이 균형 있게 작동해야 한다. 이 세 작용은 머리와 마음과 손으로 상징된다. 머리는 지성적 노동을 상징하고, 마음은 신비주의적 감정의 움직임을 상징하며, 손은 그리스도인의 실천적 활동을 상징한다. 만일 우리의 교회 생활이 균형을 이루고 있으며, 개인적 삶과 직분적 삶 또한 균형 가운데 있다면, 머리와 마음과 손은 올바른 비례 속에서 전체적인 삶의 표현을 위해 함께 작동해야 한다. 그러나 이 균형은 끊임없이 무너진다. 그 올바른 비례는 반복해서 파괴되고, 마땅히 지배했어야 할 조화는 일방성으로 인해 분열로 전락한다. 그 결과 우리는 여러 영역과 다양한 방식 속에서 세 가지 일면적 경향이 등장하는 것을 보게 된다. 종교적 영역에서의 근본적 악은 이러한 신경 작용에 있지 않고, 훈련되지 않은 마음의 작용에 있다. 그리고 이 형태로 나타날 때, 그것은 감상주의가 아니라 신비주의로 드러난다. 신비주의는 그 자체로서의 신비와는 구별되어야 한다. 신비는 선한 것이요, 필요한 것이며, 없어서는 안 될 것이다. 반면 신비주의는 그것의 타락, 변질, 서서히 진행되는 부패이다.
아브라함 카이퍼 - 아브라함 카이퍼의 세 마리 작은 여우
그리스도인에게 기도는 생명을 유지하는 호흡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리스도인은 기도의 의무를 가장 소홀히 여긴다.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초대받았고, 명령도 받았다. 기도는 특권이면서 의무다. 의무는 고될 수도 있다. 그리스도인을 성장시키는 여느 수단처럼 기도 역시 노력을 요구한다. “하나님이 모든 것을 다 아시는데 기도는 왜 해요?” 이건 잘못된 질문이다. 이 질문은 기도가 간구나 중보일 뿐이라는 생각에 머문다. 그러나 기도는 다차원적이다. 하나님의 전지하심은 우리가 찬양을 고백할 더 큰 이유를 제시해 준다. 즉 하나님이 내가 말하기도 전에 무슨 말을 할지 아신다면, 그분의 미리 아심은 내 기도를 제한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욱 아름답게 한다. 하나님은 내 마음을 속속들이 아신다. 그렇더라도 내 마음을 하나님께 털어놓는 것은 여전히 나의 특권이다. 하나님은 말씀하신다. “와서 내게 말해라. 너의 요구를 내게 알려라.” 그래서 우리는 우리가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이 우리를 아시도록 하나님 앞에 나온다.
R. C. 스프로울 - 기도하면 정말 달라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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