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란이 로마제국에서 부상하게 된 것은 디오클레티아누스(Diocletianus,재위284-305) 황제 때부터다. 황제는 혼란스런 로마제국을 평정한 후 황제는 제국이 너무 넓어 혼자 통치하기에는 벅차다는 사실을 깨닫고 공동 황제를 세웠다. 황제는 현 크로아티아의 가난한 농부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런데 로마 군대에 입대하여 황제의 자리까지 오른 입지전적 인물이다. 그는 최초로 공동 황제 제도를 구상하여 실시했고, 또한 로마제국 천 년 역사에서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스스로 막강한 황제의 자리를 은퇴한 사람이다. 그리고 고향 크로아티아에 거대한 별장을 지어놓고, 매일 아침 남새밭을 가꾸는 일상이 얼만 행복한지를 후임 통치자들에게 자랑하곤 했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예를 하나 더 들어야겠다. 교황은 종신직인데, 역사적으로 지난 2천 년 동안 스스로 물러난 두분의 교황이 있다. 한 분은 지난 2013년에 건강 문제로 사임한 베네딕토 16세 교황이고, 또 한 분은 그레고리 12세(재위1406-1415)가 1415년에 물러났다. 그러나 엄밀하게 말한다면, 그레고리 12세는 당시 대립교황이 몇 명씩 있는 상황에서 일치를 이루기 위해 물러난다는 조건으로 교황이 되었고, 후에는 마음이 바뀌어 물러나지 않으려 했다가 압력에 의해 물러난 케이스다. 권좌에서 스스로 물러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이 어려운 일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현 터키의 니코메디아에 수도를 정하여 동로마를 통치하고 공동 황제 막시미아누스로 하여금 서 로마를 맡도록 했다. 서로마의 수도는 알프스가 지근의 거리에 있어 적의 동태를 파악하기 쉽고, 또한 높은 산맥이 병풍처럼 두르고 있어 공략하기 어려운 밀란에 수도를 정했다. 그때부터 밀 란은 제국의 중요한 도시로 부상하게 되었다. 아마 미래에 부상하게 될 밀 란을 내다보았는지 모른다.
그 후 서방을 다스리던 콘스탄틴이 경쟁자 막센티우스를 격파한 후 동방 황제 리키니우스와 함께 밀 란에서 313년에 기독교 칙령을 발표하였다. 그 후 150년 후인, 476년에 서로마는 망했고, 종족별로 나뉘어져 중국의 춘추전국 시대처럼 군웅 할거하게 되었다.
이탈리아가 통일을 이루게 된 1860년까지, 그중 이태리는 도시국가 형태로 나뉘어졌는데, 밀란과 베니스와 베니스 아래에서 남쪽으로 로마까지 교황청의 봉토가 되었고, 피렌체, 그리고 나폴리, 시칠리, 사르데냐로 각각 분할되었다. 어떤 원칙에 의해 도시국가로 형성되기보다, 문화의 동질성으로 나뉘어졌다 싶다.
우리나라의 각 도가 방언을 사용하는 사람들로 공동체를 형성하는 것처럼 말이다. 수도가 옮겨 갔지만 원로원은 로마에 상징적으로 남겨 두었다. 그러나 힘없고 무력한 노인들의 집단 정도로 치부되었다. 공화제가 무너지고 군주제로 전환된 지도 벌써 4백여 년이 되어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놀라운 것은 그토록 강했던 로마요, 약 천 년 동안 세계를 통치하던 유래가 없는 제국, 로마가 망하고, 서로마의 도시국가들은 무려 1천4백여 년 동안 주변 나라로부터 동네북 같은 처량한 신세로 겨우 명맥을 유지해 왔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세상을 호령하던 로마제국이 지극히 작은 도시국가로 전락할 줄을 그 누가 상상할 수 있었겠는가!
성경은 세상 나라에서 가장 위대한 국가로 바벨론을 지목했다. 다니엘이 본 환상에서 바벨론 제국을 금 머리로 묘사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위대했던 바벨론 제국의 수명이 얼마나 될까? 겨우 83년이라는 극한 단명으로 제국이 숨을 거두고 말았다는 사실이다. 이런 사실을 인식하고, 강대한 국가들도 언젠가는 무너지거나, 무력한 나라로 전락하게 된다는 사실을 내다보고 통치자들은 항상 겸손해야 한다.
어거스틴은 밀 란 시장의 요청으로 로마시장 심마쿠스의 추천을 받아 밀 란으로 떠났다. 본토 이탈리아인 중에 라틴어 유능자가 셀 수 없이 많았을 텐데, 외국인이 라틴어로 원어민들을 가르치기 위한 교수요원으로 뽑혔다는 것, 그 하나만 봐도 어거스틴이 얼마나 뛰어난 천재인가 알 수 있다. 그는 어릴 때 키케로의 호르텐시우스를 읽고 철학에 흥미를 느끼게 되었다. 그 후 어려운 철학 서적이나 기하학을 혼자서 읽고 쉽게 터득할 수 있을 정도로 천재성이 번뜩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마니교에 깊이 심취했다.
그런데 그에게는 풀리지 않는 문제가 있었다. 마니교에서 지식이 있다는 사람들을 찾아갔지만 자신의 궁금증에 대한 시원한 답변을 들을 수 없었다. 그의 고민을 아는 자들은 마니교의 지도자를 만나면 궁금증은 즉시 해결될 것이라고 했다. 드디어 기다렸던 마니교의 대단한 지도자라는 파우스투스를 만나게 되었다. 그래서 평소 궁금했던 문제를 질문했으나 나도 모른다는 답변에 어거스틴은 크게 실망했다. 그래서 더 이상 마니교에 관심을 두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밀란에는 교사직도 중요했지만, 영적 뛰어나고 알려진 감독 암브로시우스가 사역하고 있었기에 그를 통해 영적 갈급함을 해결하고 싶었다. 사실 하나님께서는 어거스틴을 종으로 사용하시려고 밀 란으로 이끄신 것이었다. 오랜 후에 깨닫게 된 일이지만…
어거스틴에게 있어서 밀 란은 교수 요원으로 뽑힌 것보다 영적 클클함을 해결하기 위해 영성의 지도자 암브로시우스를 만나려는 열망이 간절했다. 마치, 신학교 교수이면서 칭의에 대한 확신이 없어 독일의 동부 작센에서부터 로마까지 그 먼 길을 순례를 떠나야 했던 말틴 루터처럼 말이다. 하나님께서 어떤 자를 부르시려는 방편으로 섭리하시는 영적 목마름, 그것은 주님을 만나지 않고는 해결되지 않는다. 주님께서 은혜를 베풀어 주시지 않으시면…
사실 어거스틴이 성경을 읽었으나 키케로의 장엄하고 웅장한 문체에 비하면 성경의 문체는 단순하였기에 일단 흥미를 느낄 수 없었다. 인간은 예나 지금이나 어렵게 글을 써야 지식인 답게 여기고, 높이 보려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누구보다 쉽게 강의할 수 있던 칸트가 난해하게 순수이성 비판을 쓴 게 아닐까 싶다. 그런데, 어거스틴이 암브로시우스의 설교를 들었을 때 언변은 마니교의 감독 파우스투스(Paustus)처럼, 사람들의 마음을 끄는 매력은 부족했지만 영적 품위와 격조가 있었다.
처음에 그는 설교의 내용보다, 수사학 교수로서 수사학적 관점으로만 분석적으로 들으려 했다. 일종의 직업병일 수 있다. 목회할 때, 국문과 출신 교인은 주보에 틀린 글자를 발견할 때마다 주보를 들고 찾아와 목사님, 이곳 철자가 틀렸는데요 라고 지적하곤 했으니 말이다.
그러던 중, 어거스틴에게 놀랍게도 설교 말씀이 조금씩 들려오기 시작했다. 성령께서 그의 마음을 움직이기 시작한 것이었다. 당시 그는 정신적으로 공황 상태에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칼타고에서 찾아오신 어머니는 아들이 암부르시우스에게 세례받기를 간절하게 원하였다. 어머니의 간곡한 요청에 부응하여 어거스틴은 예비 신자가 되기로 마음을 먹었다. 그러나 마음은 여전히 혼란스러움이 지속되었다.
확실하게 성령의 은혜를 경험하기까지 영적 고통은 대단하게 된다. 물이 끓기 전 냄비가 요동하는 것처럼,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부르심 받은 자의 표지이다 싶다. 그렇다면 당신의 영적 목마름은 존재하고 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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