댄 델젤 목사
댄 델젤 목사. ©기독일보 DB

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댄 델젤 목사의 기고글인 ‘사도 베드로와 현대 가톨릭, 구원의 확신을 바라보는 시각은 어떻게 다른가'(Apostle Peter vs. modern Catholicism: Whose view on assurance is right?)를 5월 7일(현지시각) 게재했다.

델젤 목사는 네브래스카주 파필리온에 있는 리디머 루터 교회(Redeemer Lutheran Church in Papillion)의 담임 목사로 섬기고 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구원론은 ‘구원에 대한 교리’를 연구하는 신학의 한 분야다. 그런데 사도 베드로가 성령의 감동 가운데 전한 구원론은 훗날 형성된 현대 가톨릭의 구원 이해와 상당한 차이를 보인다. 이는 가톨릭교회가 베드로를 “초대 교황”으로 주장하는 것과는 별개의 문제다. 왜냐하면 베드로는 성도들에게 현대 가톨릭이 많은 신자들에게 심어주는 형태의 종교적 불안과 두려움을 가르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라고 말한다(잠언 9:10). 이러한 하나님에 대한 경외는 거룩하고 올바른 두려움이다. 창조주 하나님을 깊이 존중하고, 언젠가 심판의 날에 하나님 앞에 서게 된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태도다.

그러나 필자가 말하는 또 다른 종류의 두려움이 있다. 이는 가톨릭의 ‘조건부 구원 체계’가 만들어내는 두려움이다. 그리고 이러한 두려움은 영적 건강이나 성숙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데이비드 위셀이라는 인물은 가톨릭 신자였다가 무신론자가 되었고, 이후에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속죄를 믿는 믿음을 통해 구원의 확신을 얻었다.

그는 가톨릭 안에서 느꼈던 절망을 이렇게 설명했다: “가톨릭 중학교 종교 수업에서 ‘대죄(죽을 죄)’에 대해 배우기 시작한 것이 내가 무신론으로 향하게 된 첫걸음이었다. 나는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평생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살아도, 어느 날 대죄를 짓고 바로 버스에 치여 죽으면 결국 지옥에 가는 건 아닐까?’ 결국 나는 고해성사와 반복적인 죄의 굴레를 끝까지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다. 결국 정죄받게 될 것 같았다. 그래서 차라리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 편이 희망처럼 느껴졌다.”

이 상황을 한 가족의 예로 비유해볼 수 있다. 한 아버지가 8살 딸 헤더에게 이렇게 말한다고 상상해보자. “헤더야, 엄마와 내가 이번 여름에 너와 형제들을 데리고 플로리다 해변으로 가족여행을 가려고 콘도를 예약해두었단다. 물론 너도 함께 가길 원해. 하지만 꼭 기억해야 할 게 있다. 네가 아주 큰 잘못을 할 때마다, 네 이름을 예약 명단에서 빼버릴 거야. 물론 네가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하기 전까지는 말이지.”

이런 상황 속에서 헤더의 마음에는 계속해서 두려움이 남게 된다. ‘나는 정말 가족여행에 갈 만큼 충분히 착한 아이일까?’ 결국 아이는 아버지의 사랑이 조건적이며, 자신의 행동 성과에 따라 유지된다고 느끼게 된다.

그러나 사도 베드로는 성령의 감동 안에서 성도들이 하나님을 사랑하고 경외하도록 돕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는 성도들이 거룩함과 진정한 사랑 가운데 살아가도록 인도했다. 베드로는 천국을 마치 당근처럼 눈앞에 흔들며 신자들을 통제하지 않았다. 오히려 이미 그들에게 주어진 영원한 기업을 강조했다.

베드로는 성도들을 “하나님의 택하심을 받은 자들”(베드로전서 1:1)이라고 불렀다. 이는 그들이 이미 그리스도의 나라 안에 속해 있다는 확신을 주는 표현이었다. 그는 다시 한번 “택하심을 받은 자들”(1:2)이라고 강조하며 하나님과의 관계가 지속적이고 확고한 것임을 드러냈다.

이어 베드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의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게 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1:3)라고 선포했다.

여기서 거듭남은 예수를 믿는 믿음을 통해 이루어지며(요한복음 3장), ‘산 소망’은 십자가에서 이루신 구속 때문에 천국이 확실한 본향이 되었다는 의미다.

베드로는 또한 성도들에게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아니하는 유업이 하늘에 간직되어 있다”(1:4)고 격려했다. 여기에는 어떤 조건부 위협도 없다. 오히려 성도의 기업이 하나님 안에 안전하게 보존되어 있으며 반드시 누리게 될 것이라는 약속만 있다.

이는 예수님의 말씀을 떠올리게 한다. 예수님은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내가 그들에게 영생을 주노니 영원히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을 수 없느니라”(요한복음 10:27-28)라고 말씀하셨다.

필자는 이 말씀을 로버트 벨라민 추기경의 주장과 대조한다. 그는 “가장 큰 개신교 이단은 구원의 확신이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점에서 본다면, 만약 오늘날 사도 베드로가 살아 있었다면 현대 가톨릭 신학자와는 상당히 다른 입장을 가졌을 것이라고 필자는 주장한다.

베드로는 하나님의 은혜와 영원한 구원을 설명하면서 결코 ‘당근과 채찍’ 방식으로 성도들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반면 조건부 구원 체계는 하나님의 사랑과 복음의 능력을 온전히 드러내지 못하고, 오히려 신자들로 하여금 자신의 구원이 아슬아슬한 경계 위에 놓여 있다고 느끼게 만든다고 지적한다.

필자는 이러한 구조가 가톨릭 내부에서 말하는 ‘칭의의 성장’ 개념과 연결되어 있다고 본다. 그리고 가톨릭교회가 성도들에게 필요한 것은 조건부 불안 체계가 아니라, 복음의 약속을 통한 구원의 확신이라고 주장한다.

혹시 누군가는 이런 질문을 품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정말 천국에 들어갈 만큼 충분히 선한 사람일까?”

만약 당신의 영혼이 이런 종교적 불안 속에 짓눌려 있다면, 자신의 노력과 성취에 초점을 맞추는 시선을 거두고, 반석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을 바라보라고 필자는 권면하며. 그리고 그 은혜 안에서 삶 전체를 주님께 드리며 살아가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성경은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고 말한다(야고보서 2:26). 그러나 믿음은 행위를 더 많이 쌓는다고 살아나는 것이 아니다. 믿음은 성령께서 복음을 믿게 하실 때 살아난다(요한복음 1:12, 3:16, 3:36, 고린도전서 12:3).

감사하게도 예수를 믿는 자들은 멸망으로 가는 넓은 길이 아니라 생명으로 인도하는 좁은 길 위에 서 있다고 필자는 강조한다(마태복음 7:13-14).

필자는 구원론은 인간의 지혜가 아니라 성령의 가르침 안에서 이해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사도 베드로의 구원론 역시 인간의 사상이 아니라 성령께서 주신 말씀에 기초한 것이었음을 기억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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