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데이비드 주콜로토 박사의 기고글인 '연결의 심리학: 관계가 깨질 때 왜 우리는 ‘무너지는 듯한’ 감정을 느끼는가’(The psychology of connection: Why we feel 'undone' when our relationships break?)를 4월 23일(현지시각) 게재했다.
주콜로토 박사는 전직 목사이자 임상 심리학자이며 35년 동안 병원, 중독 치료 센터, 외래 진료소 및 개인 진료소에서 근무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잊을 수 없는 캘리포니아 몬터레이의 어느 밤이었다. 선선한 바람과 짭짤한 바다 공기가 어우러진, 아무리 지치고 힘든 하루였어도 조금은 가볍게 느껴지게 만드는 그런 저녁이었다.
그날 마지막 환자는 팀이었다. 스물두 살의 그는 밝고 예술적인 감각을 지닌 매력적인 청년이었지만, 어딘가 쉽게 정의하기 어려운 면도 있었다. 상담을 마친 뒤, 그는 최근에 산 머스탱 컨버터블을 보여주겠다며 주차장까지 함께 나가 달라고 했다. 그 차는 그에게 작은 승리였다. 지붕을 열고, 음악을 크게 틀고, 환하게 웃으며 손을 흔들던 그의 모습이 아직도 선명하다.
필자는 1년 넘게 그와 함께했다. 그의 우울함은 분명 느껴졌지만, 그것이 그의 전부는 아니었다. 그는 지역 클럽에서 기타를 연주했고, 재치 있고 통찰력 있는 사람이었다. 재능도 있었고, 계획도 있었으며, 계속 살아갈 이유도 충분해 보였다. 그날 밤 집으로 돌아가며, 필자는 그가 얼마나 성장했는지를 떠올렸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전화를 받았다. 팀이 몬터레이 다리에서 아래 바위와 바다로 몸을 던졌다는 소식이었다. 이후의 상황은 분명하지 않았다. 이별에 관한 이야기였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사귀던 연인이었다고 했다.
그렇게, 음악과 재능, 학업과 노력 위에 세워졌던 그의 정체성은 관계의 상실이라는 무게 앞에서 무너져 내렸다.
팀과 같은 사례는 우리에게 어려운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과연 혼자서 온전히 존재할 수 있는가, 아니면 더 깊은 차원에서 언제나 누군가의 존재에 의존하고 있는가?
우리는 단순히 다른 사람들과 나란히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통해 살아간다. 정체성은 혼자 이루는 독주가 아니라, 이중주이며 때로는 합창에 가깝다. 그 가운데 하나의 목소리가 배신이나 부재, 거절, 혹은 죽음으로 사라질 때, 그 침묵은 감당하기 어려울 만큼 크게 느껴진다.
우리는 자기이해, 자기돌봄, 자기실현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우리가 진정으로 갈망하는 것은 더 강한 ‘자아’가 아니라, 더 안전하고 견고한 ‘관계’일지도 모른다.
우리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여러 요소 가운데 관계는 단연 두드러진다. 관계는 단순한 영향 요소 중 하나가 아니라, 모든 것을 연결하는 실과 같다. 성격이나 능력, 심지어 개인적 신념보다도 관계는 우리를 정의하고, 움직이며, 형성한다.
성경은 이 지점에서 시작한다. 인간의 삶은 고립에서 시작되지 않고, 인격적인 하나님에 의해 창조되었다. “우리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만들자”는 말씀은 관계적 존재로서의 하나님을 보여준다. 삼위일체로 이해되는 이 신비는 한 가지를 분명히 한다. 관계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어떤 분이신지를 드러내는 본질이다. 그렇다면 그분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에게 관계는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임상 현장에서 이 진리는 결코 추상적이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관계가 깨졌을 때 상담을 찾는다. 침묵으로 식어버린 결혼, 자녀를 잃은 부모, 신뢰를 배신당한 친구, 여전히 아버지의 인정을 갈망하는 중년의 아들. 우리는 연결을 갈망하며, 그것이 손상될 때 단순히 외로움을 느끼는 것을 넘어 ‘무너지는 느낌’을 경험한다.
우리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관계 속에서 형성된다. 어머니의 시선, 아버지의 목소리, 친구의 웃음, 선생님의 믿음이 우리의 정체성을 빚는다. 정체성은 내면 깊숙한 곳에서 끌어내는 것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 드러난다.
아이들은 누군가 자신을 기뻐할 때 자신감을 배우고, 청소년은 누군가 자신을 믿어줄 때 꿈을 꾼다. 성인이 된 이후에도 우리는 여전히 “너는 소중하다”, “너는 속해 있다”, “너는 이해받고 있다”는 목소리를 찾는다.
그래서 반항조차도 관계적이다. 청소년들은 독립을 선언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다른 소속으로 이동할 뿐이다. 운동선수, 예술가, 게이머, 아웃사이더, 활동가—그들은 서로를 닮아가고 영향을 주고받는다. 독립처럼 보이는 것은 사실 선택된 의존일 때가 많다.
오늘날 정체성에 대한 논쟁이 개인적인 문제에 그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정체성은 내면에서 시작될 수 있지만, 결국 인정과 반응을 요구한다. 그것은 반드시 공동체 속에서 형성된다.
부모들은 이를 본능적으로 안다. 아이들은 고립 속에서 자라지 않는다. 수많은 일상의 상호작용 속에서 자란다. 가정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정체성을 만드는 공간이다.
그러나 인간 관계는 우리의 존재를 완전히 설명해 주지는 못한다. 배우자는 깊이 사랑하면서도 우리를 오해할 수 있고, 부모는 상처를 주면서도 우리를 규정하지는 못한다. 타인의 시선은 중요하지만, 궁극적인 권위는 아니다.
기독교 신앙은 우리의 정체성이 사람들뿐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 형성된다고 말한다. 우리는 수평적인 시선뿐 아니라 수직적인 시선 속에서 살아간다. 우리를 완전히 아시는 분은 창조주 하나님이시다.
그래서 아무리 좋은 관계도 완전하지 않다. 그것은 귀한 선물이지만, 영혼의 무게를 온전히 감당할 수는 없다.
성경은 관계를 단순한 영향 이상의 것으로 말한다. “악한 동무는 선한 행실을 더럽힌다”는 말씀처럼, 관계는 우리의 행동뿐 아니라 존재 자체를 형성한다. 누구와 가까이 지내느냐에 따라 우리가 사랑하는 것, 용납하는 것, 두려워하는 것이 달라진다.
이것이 성경이 친밀함과 충성, 타협에 대해 경고하는 이유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주변 민족과의 연합을 경계하신 이유는 문화가 아니라 마음의 방향이었다. 솔로몬의 삶이 보여주듯, 타락은 갑작스럽기보다 서서히 일어난다.
신약에서도 같은 원리가 나타난다. “멍에를 함께 메지 말라”는 권면은 관계가 결코 중립적이지 않음을 보여준다. 관계는 우리의 믿음을 강화하거나, 타협을 정상으로 만든다.
예수님의 “부모와 형제보다 나를 더 사랑하지 않으면 제자가 될 수 없다”는 말씀도 같은 맥락이다. 이는 관계를 부정하라는 것이 아니라, 어떤 관계도 하나님보다 앞설 수 없다는 선언이다.
우리는 종종 관계가 무너진 후에야 이를 깨닫는다. 왜곡된 관계는 정체성을 뒤틀고, 의존적인 관계는 그것을 약화시키며, 학대적인 관계는 그것을 무너뜨린다. 회복은 정직한 경계를 세우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데서 시작된다.
그러나 이것은 관계로부터의 도피가 아니다. 관계를 올바른 자리로 돌려놓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음성이 우리를 잘못 규정했던 모든 목소리보다 더 크게 들려야 한다. 동시에 이는 관계의 중요성을 약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것의 힘을 정확히 인정하는 것이다.
이 사실은 죽음을 통한 상실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사랑했던 사람의 죽음 앞에서 우리는 숨이 멎는 듯한 공허를 느낀다.
성경에서 ‘숨’은 생명을 의미한다. 하나님은 흙에 생기를 불어넣어 인간을 살게 하셨다. 그래서 죽음은 단순한 고통이 아니라, 설명할 수 없는 상실로 다가온다.
이 지점에서 복음이 말한다. 십자가에서 예수님은 마지막 숨을 내쉬셨고, 부활 이후 제자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성령을 주셨다. 잃어버린 생명이 회복되고, 끊어진 관계가 다시 이어진 것이다.
이것이 슬픔을 없애주지는 않는다. 그러나 상실이 마지막이 아님을 말해준다. 우리를 완전히 아시고 변함없이 사랑하시는 하나님 안에서, 우리의 정체성은 무너지지 않는다.
그래서 관계는 우리의 가장 큰 연약함이면서 동시에 하나님의 가장 귀한 선물이다. 우리는 서로를 통해 상처받고, 형성되며, 유지된다. 그러나 모든 관계 너머에는 우리가 본래를 위해 창조된 더 깊은 진리가 있다. 그것은 바로 살아 계신 하나님과의 교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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