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킬리 함스의 기고글인 ‘기독교 행동주의와 ‘대립 중독’의 문제’(Christian activism and the confrontation addiction problem)을 8월 11일(현지시각) 게재했다.
킬리 함스는 Hands Across the Aisle Women’s Coalition의 공동 설립자이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최근 한 친구가 다소 과격한 제목의 책 한 권을 필자에게 빌려주었다. 저명한 제임스 돕슨(Dr. James Dobson) 박사의 아들 라이언 돕슨(Ryan Dobson)이 쓴 『불관용하라(Be Intolerant)』였다.
처음 책을 봤을 때 필자는 얼굴을 찌푸렸다. ‘아휴, 또 시작이군. 예수님이 절실히 필요한 이 문화 속에서, 성경이 마치 자신들에게 적대적이고 무례하게 굴어도 되는 무제한의 면허를 주었다고 믿고 싶어 하는 사람들의 가려운 귀를 긁어줄 또 하나의 선언문이겠지.’
필자는 책을 집어 들고 약 20분 만에 전체의 4분의 3가량을 빠르게 훑어봤다. 그런데 예상은 빗나갔다. 놀랍게도 돕슨은 오히려 호전적인 성향의 독자들을 향해 성경이 요구하는 ‘사랑 안에서 진리를 말하는’ 태도를 차분하게 권면하고 있었다.
그의 핵심 메시지는 대략 이러했다. 세상에 불편한 진실을 말하는 일은 중요하다. 그 때문에 사람들이 당신을 미워할 수도 있다. 그러나 궁극적인 목적은 화해이며, 예수님의 사랑을 나누는 것이어야 한다. 누군가와 맞서는 행위 자체에서 쾌감을 느껴서는 안 된다. 상대가 굴욕당하기를 바랄 것이 아니라, 그가 빛을 보게 되기를 진심으로 소망해야 한다.
필자는 이번 주 내내 이 내용을 곱씹었다. 특히 오늘날 일부 온라인 사역자들이 ‘대립’을 최후의 수단이 아니라 효과적인 행동주의의 최고 훈장처럼 여기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더욱 그랬다.
필자는 오랫동안 사회적 옹호(advocacy) 활동을 해왔다. 그렇기에 ‘불편한 진실을 말하는 것’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자극적인 반응에 취하는 것’ 사이의 차이를 잘 알고 있다. 이 둘은 전혀 다른 일이다.
대립 자체를 즐기는 순간, 사역의 목적은 달라진다
누군가와 맞서는 상황 자체를 즐기기 시작하면 그 사람이 하는 일의 성격은 근본적으로 달라진다. 동기가 변하기 때문이다.
누군가의 면전에서 상대를 억누르는 일이 즐겁다면, 상대가 무너지는 모습을 보면서 짜릿함을 느낀다면, 다른 사람을 향해 그들이 멍청하고 악하며 지옥에 갈 것이라고 정죄할 때 솟구치는 아드레날린을 즐긴다면, 그 순간 이미 상대를 향한 사역은 멈춘 것이다. 그 사람을 섬기는 것이 아니라 이용하는 것이다. 결국 자신의 자아를 위해 사역하는 셈이다.
물론 이런 방식으로도 ‘진리’를 말할 수는 있다. 심지어 이를 통해 꽤 성공적인 개인 브랜드를 만들 수도 있다. 주변 사람들은 누군가가 반드시 말해야 할 진실을 자신은 용기 있게 말하지 못한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신 큰 목소리로 말해주는 사람에게 쉽게 끌린다.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배부른 자는 꿀이라도 싫어하고 주린 자에게는 쓴 것이라도 다니라”(잠 27:7).
진리를 향한 우리의 집단적인 갈망도 이와 비슷하다. 공개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데에는 때로 상당한 대가가 따른다. 사회적으로 고립될 수도 있고, 신상이 공개되거나 언어폭력의 대상이 될 수도 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은 자신이 직접 첫 타격을 받지 않으면서도 따라갈 수 있도록 누군가가 앞장서 길을 열어주기를 원한다.
문제는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된다. 동기가 불순한 선동가(grifter)가 등장해도 대중은 좀처럼 제동을 걸지 않는다. 그 사람이 왜 싸우는지보다, 대신 싸워주고 있다는 사실 자체에 만족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을 곧바로 ‘용감하다’고 평가해서는 안 된다. 진정한 용기에는 대가가 따르기 때문이다. 반면 어떤 사람들은 대립을 통해 잃는 것보다 얻는 것이 더 많다. 관심을 얻고, 플랫폼을 키우고, 쾌감을 느끼며, 권력과 우월감을 맛본다. 대다수의 사람이 두려워하는 바로 그 갈등을 오히려 즐기고 있는 것이다.
갈등을 견디는 것과 갈등을 찾아다니는 것은 다르다
필자는 트랜스젠더 이슈를 둘러싼 논쟁의 최전선에서 때때로 이런 차이를 직접 목격했다. 필자와 동료들은 여성을 보호하기 위한 정책을 지지하는 집회를 열었다. 원피스를 입은 남성들이 확성기를 들고 바로 앞에서 분노에 찬 고함을 지를 때에도 떨리는 목소리로 자리를 지켜야 했다.
거기에는 어떤 짜릿함도 없었다.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극심한 소모를 가져오는 일이었고, 다시 그런 위험을 감수할 수 있을 정도로 회복하기까지 때로 몇 주가 필요했다.
그러나 필자와 동료들이 하지 않은 일이 하나 있었다. 갈등을 찾아다니지는 않았다. 누군가가 먼저 비난하고 방해할 때에는 우리의 공간을 지켰지만, ‘우리를 향해 소리 지르는 사람들의 새로운 영상’을 얻기 위해 일부러 트랜스젠더 관련 행사를 찾아가 방해하지 않았다.
갈등을 의도적으로 만들어낸 뒤 그것을 자신의 용기를 증명하는 자료로 사용하지도 않았다. 퀴어 퍼레이드에 “하나님은 동성애자를 미워하신다”는 피켓을 들고 나타나는 웨스트보로 침례교회처럼 행동하지 않았다. 벌집을 일부러 건드린 뒤 벌에 쏘였다는 이유로 자신을 영웅으로 내세우지 않았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분야에서 몇 년 더 활동하면서 필자는 또 다른 유형의 사람들을 보게 됐다. 대의를 명분으로 거대한 개인 플랫폼을 만들려는 새로운 ‘인플루언서’들이었다. 그들에게 선제적인 적대감은 하나의 전략이 되었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꽤 효과적인 전략이기도 했다.
그들은 트랜스젠더 관련 행사에 찾아가 참가자들을 집요하게 자극하고 분노를 끌어낸 뒤, 조회수를 얻기에 가장 좋은 충돌 장면을 카메라에 담았다. 주류 언론도 이를 보도했고, 그들은 관련 이슈가 등장할 때마다 반복적으로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
필자는 이름을 밝히고 싶지 않지만, 그들 가운데 한 사람은 자신의 성공을 가능하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여성들을 형편없이 대했다. 그의 이야기를 잠시만 듣고 있어도 한 가지 사실이 선명해졌다. 그는 ‘옳은 말’을 하고 있었지만, ‘잘못된 이유’로 말하고 있었다.
또 자신보다 심리적으로 불안정해 보이는 사람들을 적대함으로써 스스로 권력감을 느끼는 듯했다. 마치 마이클 조던이 중학교 농구 경기에 찾아가 어린아이들 머리 위로 덩크슛을 꽂아 넣으며 자신이 얼마나 뛰어난 선수인지 확인하는 모습과 같았다.
진짜 사역과 ‘콘텐츠용 대립’의 차이
필자는 낙태 시술소 앞에서 촬영된 영상을 볼 때도 비슷한 차이를 발견한다. 그곳에는 분명 참된 사역이 있다. 눈에 띄는 결과가 전혀 없어도 매주, 때로는 몇 년 동안 조용히 같은 자리를 지키는 사람들이 있다.
“필자는 낙태를 후회합니다. 이야기를 나눌 사람이 필요하다면 여기 있습니다.” 이런 문구가 적힌 피켓을 들고 서 있는 여성과 남성들이다.
아무도 유튜브 콘텐츠를 만들기 위해 그들을 촬영하지 않는다. 그들은 추위와 더위를 견딘다. 어떤 날은 한 여성이 다가와 이야기를 나누지만, 어떤 날은 아무도 말을 걸지 않는다. 그래도 다음 주가 되면 다시 같은 자리에 선다. 그것이 사역이다. 거기에는 실제적인 희생이 따른다.
반면 전혀 다른 모습도 있다. 확성기를 든 사람들이 시술소 문에 도착하기도 전인 겁에 질린 십 대 소녀에게 “여기는 살인 공장”이라고 고함을 지른다. 그 모든 장면을 촬영한 뒤 가장 자극적인 30초를 편집해 온라인에 올리고, ‘담대함’에 관한 그럴듯한 설명을 붙인다. 댓글창에는 그들을 영웅이라고 치켜세우는 말이 넘쳐난다.
이 두 모습의 차이를 굳이 길게 설명해야 한다면, 우리의 상황은 상당히 심각하다. 겁에 질린 십 대 소녀에게 길거리에서 “살인자!”라고 소리 지른다고 해서 그 아이가 몰랐던 새로운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 방식은 성령께서 일하실 공간을 넓히기보다 오히려 닫아버릴 수 있다. 그리고 그 소녀가 이미 갖고 있던 한 가지 의심을 더욱 굳혀줄지도 모른다. ‘기독교인은 잔인하고, 교회에는 내가 설 자리가 없다.’ 그런데도 외친 사람은 자신이 사명을 충실하게 감당했다고 만족할 수 있다.
진리를 말하는 것과 잔인하게 구는 것은 다르다
이쯤 되면 누군가는 이렇게 반문할 것이다. “하지만 낙태가 살인이라는 것이 사실이라면, 그대로 명확하게 말해야 하는 것 아닌가?”
그렇다. 명확하게 말해야 한다. 낙태의 본질에 관한 진리를 흐리거나 듣기 좋게 희석하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에서 진리를 말하는 것과 잔인하게 행동하는 것이 동의어가 되어서는 안 된다.
고린도전서 13장 전체가 바로 이 점을 일깨워주지 않는가. 예수님은 우물가의 여인에게 진리를 말씀하셨다. 그러나 그 여인을 상대하기 위해 군중을 불러모으고 돌을 들게 하지는 않으셨다.
방법은 메시지와 완전히 분리될 수 없다. 어떤 의미에서는 방법 자체가 메시지의 일부다.
신학적으로 완벽한 말을 하면서도 전달 방식으로는 상대에게 이런 메시지를 줄 수 있다. ‘사실 너는 구원받을 가치조차 없는 사람이야.’
입으로는 “하나님께서 당신을 사랑하신다”고 말하면서, 행동으로는 이렇게 전할 수도 있다. ‘하나님은 당신을 사랑하실지 몰라도, 필자는 자신의 용기를 과시할 수 있을 때에만 당신에게 관심이 있다.’ 사람들은 그 차이를 생각보다 잘 알아차린다.
문제는 ‘무엇을 말하는가’만이 아니라 ‘왜 말하는가’에 있다
필자는 이런 행동을 하는 대부분의 사람이 만화 속 악당처럼 순수하게 악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상당수는 모두가 비겁하게 숨어 있을 때 자신만이 용기 있게 앞으로 나섰다고 진심으로 믿을 것이다.
오히려 그런 확신 때문에 자신을 돌아보기가 더 어려울 수 있다. 세상에 용기가 부족하다는 진단 자체는 틀리지 않았다. 그 빈틈을 채우려는 시도도 잘못은 아니다. 문제는 ‘왜(why)’ 그렇게 행동하는가에 있다.
그 동기가 어긋나기 시작하면 아무리 옳은 말을 해도 사역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심지어 일부는 자신이 평범한 사람들을 이끌도록 하나님께 특별히 선택받은 존재라고 여기며 자기 확신을 점점 키워간다. 그 과정에서 사명과 자아도취의 경계는 쉽게 흐려진다.
필자가 앞에서 언급한 사람에게서 본 것도 바로 그런 모습이었다. 그는 퀴어 퍼레이드에서 혼란스러워하는 아이들과 부모들을 향해 진리를 외치고, 가장 자극적인 장면을 골라 돈벌이와 브랜드 구축의 수단으로 활용했다.
그러나 필자는 그에게서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두려움이나 부담을 느껴본 적이 거의 없었다. 그가 반대하는 이데올로기로 인해 실제 상처 입고 무너진 사람들을 향한 깊은 연민도 찾아보기 어려웠다. 오히려 그는 전장에 뛰어들어 상대를 무너뜨릴 기회를 기대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그 순간은 사람을 구하기 위한 시간이 아니라 자신이 빛날 시간이 되고 있었다.
대가 없는 ‘용기’는 무엇인가
희생을 요구하지 않으면서 오히려 칭찬과 플랫폼을 가져다주는 용기는 과연 무엇일까. 거래일까. 마케팅 전략일까. 자아를 부풀리는 수단일까.
추종자들은 안도감이나 동경 때문에 그 차이를 알아차리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 행동의 직접적인 대상이 된 사람들은 매우 빠르게 알아차린다.
그들은 집으로 돌아가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혹시 저 사람이 한 말이 맞는 것은 아닐까?’ 오히려 이렇게 말할 가능성이 크다. ‘저 사람은 정말 혐오스럽다. 내가 왜 저런 사람이 되고 싶겠는가. 나는 절대 저 사람처럼 되고 싶지 않다.’
그 순간 진리는 전달되기 전에 전달자의 모습에 가려지고 만다.
진리를 말하되, 대립을 사랑하지 말라
라이언 돕슨의 책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꿀 만큼 심오한 책이라고 말할 수는 없을지 모른다. 그러나 필자가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중요한 지점을 짚고 있었다.
진리를 말하라. 친구나 팔로워를 잃더라도, 침묵하기를 원하는 사람들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대가를 치르더라도, 필요한 진리를 분명하고 굴하지 않게 말하라.
하지만 대립 그 자체를 즐기지는 말라. 상대의 일그러진 얼굴을 보고 애통함을 느끼기보다 그것을 ‘문화전쟁’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증명하는 전리품으로 여기기 시작했다면, 지금 하고 있는 일의 정체를 다시 점검해야 한다.
그것은 더 이상 사역도, 진정한 옹호도 아닐 수 있다. 중학교 농구장에 나타나 어린아이들 머리 위로 덩크슛을 꽂아 넣는 마이클 조던과 크게 다르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이번에 당신이 자신의 힘과 용기를 증명하기 위해 머리 위로 덩크슛을 꽂아 넣은 그 ‘아이’는 추상적인 문화전쟁의 적이 아니다. 누군가의 소중한 딸이고, 어쩌면 생애 가장 힘든 하루를 보내고 있는 한 사람이다.
그리스도인의 목표는 상대를 쓰러뜨리는 데 있지 않다. 그 사람이 진리를 보고, 빛으로 나아오며,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만나도록 돕는 데 있다. 그러므로 진리를 말하라. 그러나 대립을 사랑하지는 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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