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콧 솔스
스콧 솔스. ©scottsauls.com

미국 크리스천포스트(CP)는 스콧 솔스의 기고글인 '하나님은 기다리시는 분이 아니라, 끊임없이 우리를 찾아오시는 분이다'(God isn't waiting for you to find Him. He's constantly chasing you)를 9월 22일(현지시각) 게재했다.

스콧 솔스는 ‘헬시 리더스(Healthy Leaders, Inc.)’와 ‘더 시커모어 커뮤니티(The Sycamore Community)’의 설립자로, 리더들이 복음 중심의 관점에서 명예와 목적의식을 가지고 정서적으로 건강한 삶을 살아가도록 돕고 있다. 그는 30년 넘게 목회 사역을 해왔으며, 뉴욕과 내슈빌의 주요 교회에서 사역했고 캔자스시티와 세인트루이스에서는 교회를 개척했다. 다음은 기고글 전문.

영적 무감각은 요란하게 자신을 알리며 찾아오지 않는다. 대개 아주 천천히, 거의 알아차리지 못할 만큼 서서히 스며든다. 기도는 하나님과 나누는 대화라기보다 해야 할 의무처럼 느껴지기 시작하고, 성경은 하늘로부터 주어진 살아 있는 말씀이라기보다 익숙한 사용 설명서처럼 읽힌다. 교회에 나가 익숙한 찬양을 부르고 설교를 들으며 기도를 드리지만, 어느 순간 마음은 이번 주에 처리해야 할 일이나 오후에 있을 스포츠 경기 같은 다른 생각으로 흘러가 있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하나님이 변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안다. 오히려 자신이 어느 순간부터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음을 깨닫기도 한다. 스스로 산만해지고 변덕스러워지며 무감각해지도록 내버려뒀다는 생각이 들 때면, 하나님과의 간극을 좁히는 일도 결국 자신에게서 시작돼야 한다고 여기기 쉽다. 더 열심히 기도하고, 성경과 신앙 서적을 더 많이 읽으며, 더 충실히 봉사함으로써 어떻게든 잃어버린 하나님을 향한 열정을 되찾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자신의 마음을 살피는 것은 좋은 일이다. 어느 순간 길가에 내려놓았던 생명을 주는 영적 습관, 곧 ‘은혜의 수단’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 역시 필요하다. 그러나 이러한 좋은 본능 아래에는 때때로 불안한 전제가 숨어 있다. “하나님은 한결같은 사람 곁에 머무시는데, 나는 한결같지 못했다”는 생각이다. 필자는 예수님을 따른 지 4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러한 긴장을 한두 번 경험한 것이 아니며, 아마 많은 그리스도인도 비슷한 경험을 해봤을 것이다.

그렇다면 기독교 신앙이 우리가 하나님을 찾아가는 노력보다 먼저 우리를 찾아오시는 하나님의 노력에 의해 유지되는 것이라면 어떨까. 우리가 애써 발견하려 했던 자비가 사실은 처음부터 우리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면 어떨까. 우리가 느끼는 것보다 우리는 훨씬 더 깊이 ‘이미 찾아진’ 존재라면 어떨까.

우리를 추적하는 자비

시편 23편의 마지막에는 많은 그리스도인이 익숙하게 알고 있는 구절이 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시 23:6).

영어 성경에서 흔히 ‘따르다(follow)’로 번역되는 표현은 마치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몇 걸음 뒤에서 조용히 따라오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여기 사용된 히브리어 ‘라다프(radaph)’는 ‘추적하다’, ‘뒤쫓다’라는 뜻으로도 자주 사용된다. 다윗이 표현한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은 수동적으로 뒤따르는 무엇이라기보다 결코 포기하지 않고 사람을 뒤쫓는 적극적인 자비에 가깝다.

다윗은 누군가에게 쫓긴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잘 알고 있었다. 질투와 분노에 사로잡힌 사울 왕은 군대를 이끌고 광야를 뒤지며 다윗을 추격했다. 그러나 다윗의 삶에는 자신이 자초한 어둠도 있었다. 그는 하나님을 향한 깊은 신뢰를 노래한 시편을 남겼지만, 동시에 왕의 권력을 이용해 밧세바를 취하고 그녀의 남편 우리아를 죽음으로 내몰았으며 자신의 죄를 감추려 했다.

성경은 다윗을 흠 없는 영웅으로 포장하지 않는다. 그의 믿음뿐 아니라 실패와 죄까지 그대로 보여준다. 그럼에도 다윗은 성령의 감동 가운데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자신의 ‘평생’에 자신을 추적했다고 고백한다. 그 평생에는 믿음이 충만하고 기도가 뜨거웠던 날만 포함되지 않는다. 두려움과 타협, 무감각과 슬픔, 심지어 도덕적으로 무너졌던 날까지 모두 포함된다.

하나님은 다윗이 행한 모든 일에 승인하신 것이 아니다. 그러나 그의 최악의 순간만으로 다윗을 규정하고 버리시지도 않았다. 하나님은 선지자 나단을 보내 그를 대면하셨고, 징계하셨으며, 회개하게 하시고 다시 자신에게로 이끄셨다. 이것이 잘못된 선택에는 아무런 결과도 따르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며, 죄에는 실제적인 결과가 있고 하나님과 멀어진 것처럼 느끼는 경험도 분명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의 도덕적 성공과 실패만으로 하나님의 임재와 우리를 향한 그분의 태도를 판단할 수는 없다.

시편 23편에는 푸른 풀밭과 쉴 만한 물가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도 있다. 다윗은 그 골짜기가 즐겁다거나 짧을 것이라고 약속하지 않았고, 우리가 언젠가 그 길을 지나야 했던 이유를 완벽하게 이해하게 될 것이라고도 말하지 않았다. 다만 하나의 사실을 고백한다.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은혜로부터 도망칠 수 없었던 사람

영국 시인 프랜시스 톰슨(Francis Thompson)은 한때 사제가 되기 위한 교육을 받았고 이후에는 의학을 공부했지만, 어느 길도 제대로 이어가지 못했다. 의학 시험에 여러 차례 실패한 그는 1885년 런던으로 떠났고, 이후 노숙과 악화된 건강, 아편 중독 속에서 오랜 시간을 보냈다. 거리에서 잠을 자고 성냥과 신문을 팔며 생활하기도 했다.

그 시기에 그는 가톨릭 잡지인 《메리 잉글랜드(Merry England)》에 자신의 글을 보냈다. 편집자 윌프리드 메이넬(Wilfrid Meynell)은 그의 글에서 재능을 발견했고, 결국 톰슨을 찾아냈다. 메이넬과 그의 아내 앨리스는 톰슨이 오랫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돌봄과 안정된 환경을 제공했다.

이러한 삶의 경험 속에서 탄생한 작품이 톰슨의 대표작인 「하늘의 사냥개(The Hound of Heaven)」다. 시의 화자는 하나님에게서 끊임없이 도망치고, 자신의 생각과 쾌락, 슬픔 속으로 달아나며, 하나님을 멀리 떼어놓을 수 있을 것 같은 모든 현실과 상상의 피난처로 숨어든다. 그러나 그가 아무리 멀리 달아나도 뒤에서 들려오는 하늘의 발소리는 멈추지 않는다.

그 추적은 조급하지 않지만 포기하지도 않는다. 톰슨이 묘사한 하나님의 사랑은 인간의 방황 때문에 분노하여 돌아서거나, 반항에 지쳐 추적을 중단하는 사랑이 아니다. 끈질기고도 인내하며 끝까지 다가오는 사랑이다.

‘하늘의 사냥개’라는 이미지가 오랫동안 사람들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과의 관계를 자신이 얼마나 그분을 잘 찾고 붙들었는가의 이야기로 이해한다. 하지만 톰슨은 실패와 강박, 빈곤과 수치심을 깊이 경험한 사람으로서 전혀 다른 이야기를 들려준다. 은혜는 인간이 하나님을 찾아내는 데 성공한 뒤 얻게 되는 전리품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에게서 달아날 때조차 우리를 향해 뻗어오는 손이며 우리가 숨어 있을 때도 포기하지 않고 우리를 찾아오는 사랑이다.

은혜의 순서

누가복음 15장은 이와 같은 은혜의 순서를 세 번 반복해 보여준다. 잃어버린 양은 스스로 목자를 찾아 돌아오지 않고 목자가 잃어버린 양을 찾을 때까지 나선다. 잃어버린 동전은 스스로 움직일 수도 없기에 여인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발견할 때까지 찾는다. 탕자는 제정신을 차리고 집으로 돌아갈 결심을 하지만, 그가 아직 멀리 있을 때 아버지가 먼저 그를 발견하고 측은히 여겨 달려간다.

아들의 귀환이 아버지의 사랑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그의 고백이 아버지 안에 없던 자비를 새롭게 끌어낸 것도 아니다. 아들이 자신의 잘못을 수습하거나 회개의 진정성을 증명하기도 전에 아버지는 그를 끌어안고 입을 맞추며 가장 좋은 옷을 입히고 잔치를 준비한다.

필자가 쓴 『자비의 왕(The Mercy King)』에서도 이러한 복음의 원리를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가장 깊은 낙담과 실망, 심지어 자기혐오의 순간조차 예수님을 밀어내지 못한다. 오히려 그분을 더 가까이 끌어당긴다. 아버지가 탕자를 맞이하러 달려갔던 것처럼 예수님은 당신을 향해 달려오시고, 당신이 준비해 둔 사과의 말을 다 끝내기도 전에 아무런 대가를 요구하지 않는 품으로 당신을 안으신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조차 당신 혼자 알아내야 할 몫이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순서’다. 우리는 하나님을 찾고, 돌아가며, 회개하고 순종한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이 먼저 하나님의 사랑을 불러일으킨 것은 아니다. 그것들은 하나님께서 이미 우리를 향해 품고 계신 자비와 사랑에 대한 반응이다. 은혜는 인간의 반응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그 반응을 가능하게 한다.

하나님을 찾고 싶다는 아주 희미한 갈망조차 그분이 이미 우리를 찾고 계셨다는 흔적일 수 있다. C. S. 루이스(C. S. Lewis)는 자신에게 아무런 소망도 없다고 생각했던 한 사람에게 “그분이 당신을 원하지 않으셨다면 당신도 그분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라고 썼다.

이 진리는 우리를 수동적으로 만들지 않는다. 오히려 하나님의 호의를 되찾기 위해 끊임없이 스스로를 증명해야 한다는 지치고 절망적인 부담으로부터 자유롭게 한다. 우리는 여전히 기도하고 성경을 읽으며, 죄를 고백하고 성찬에 참여하고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모인다. 그러나 하나님의 호의를 얻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도 아니고, 하나님이 가까이 오시도록 설득하기 위해 그렇게 하는 것도 아니다. 그분이 이미 가까이 계시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이러한 것들은 ‘은혜의 수단’이다. 하나님께서 이미 약속하신 은혜를 우리가 반복해서 받아 누리도록 주신 선물이다.

자비 앞에서 숨지 않아도 된다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태도가 자비라는 사실을 믿기 시작하면, 우리는 오랫동안 숨겨둔 것들을 조금씩 빛 가운데로 가져올 수 있다. 외면했던 슬픔과 붙들고 있던 분노, 다른 사람은 물론 하나님에게조차 보여주기 두려웠던 수치심을 마주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에게서 자신을 보호할 필요가 없으며, 그분의 목적은 우리를 수치스럽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치유하는 데 있다.

달라스 윌라드(Dallas Willard)는 “당신이 하나님 나라에서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한, 이 세상은 완벽하게 안전한 곳”이라고 말했다. 이 말은 그리스도인에게 고통이나 위험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어떠한 상황도 우리를 하나님의 손에서 끊어낼 수 없다는 의미에 가깝다.

이 사실은 미래를 바라보는 방식까지 바꾼다. 시편 23편은 골짜기와 원수와 그림자가 없는 삶을 약속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모든 것이 실제로 존재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곳에도 선한 목자가 함께 계신다고 약속하며, 그분의 임재가 닿지 않는 날도, 그분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찾아오지 못할 장소도 없다고 말한다.

앞으로 우리에게는 스스로 선택하지 않았을 일들이 분명히 찾아올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찾고 붙들며 축복하고 지키기 원하지 않으시거나, 그렇게 하실 능력이 없는 상황은 존재하지 않는다.

복음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내려오신 이야기다

복음은 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방향으로 움직인다. 인간이 하나님께 기어 올라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내려오시는 이야기다. 하나님의 아들은 하늘의 영광을 떠나 구유의 가난함 속으로 들어오셨고, 죄인들을 밀어내지 않고 그들과 함께 식사하셨다. 많은 사람을 위한 대속물로 자신의 생명을 내어주셨으며, 십자가에서는 우리가 받아야 할 죄의 심판을 대신 짊어지셨다.

그리고 부활하심으로 죽음조차 그분의 자비를 멈추게 할 수 없음을 보여주셨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가장 깊은 확신은 자신이 하나님을 얼마나 잘 붙들고 있는가에 달려 있지 않다. 더 근본적인 진실은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먼저 우리를 붙드셨다는 사실이며, 아무도 우리를 그분의 손에서 빼앗을 수 없다고 약속하셨다는 데 있다.

하나님이 멀게 느껴지는 순간에도

이 진리는 하나님이 아주 멀리 계신 것처럼 느껴지는 순간에도 변하지 않는다. 기도가 무미건조하게 느껴지고, 성경이 자신과 무관한 이야기처럼 보이며, 예배가 아무런 감동을 주지 않을 때가 있을 수 있다. 그럴 때는 왜 그런 상태에 이르렀는지 스스로에게 정직한 질문을 던질 필요가 있으며, 다시 회복해야 할 영적 습관이 있을 수도 있고 회개해야 할 죄나 정리해야 할 삶의 문제가 있을 수도 있다.

그러나 영적인 무감각 자체를 곧 하나님이 자신을 버렸다는 증거로 해석해서는 안 된다. 영적 메마름은 하나님의 약속보다 더 큰 권위를 갖지 못한다. 히브리서 13장 5절은 “내가 결코 너희를 버리지 아니하고 너희를 떠나지 아니하리라”고 분명히 말한다.

이 약속은 아무리 작은 발걸음이라도 다시 하나님을 향해 돌이킬 수 있는 자유를 준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솔직하게 하나님께 말씀드리고, 평범한 은혜의 수단으로 다시 돌아가면 된다. 그것은 하나님께 돌아갈 자격을 얻기 위한 노력이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이미 자신을 우리에게 내어주셨기 때문에 가능한 응답이다.

지금 선한 목자가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그분이 골짜기에서 우리를 잃어버리신 것은 아니다. 우리의 변덕스러움과 머뭇거림, 의심이 그분의 신실하심을 무효로 만들 수도 없다. 처음 우리를 찾아오셨던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찾고 계시며, 마침내 자신의 백성을 안전하게 집으로 데려가시겠다는 그분의 뜻은 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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