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

제목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새사람
본문
골로새서 2장 20절–3장 4절

서론

골로새서는 우리 신앙의 중심이 어디에 있어야 하는지를 매우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사도 바울은 흔들리는 시대 속에서 성도들에게 단 하나의 진리를 붙들게 합니다. 그것은 다른 어떤 것도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는 단순한 종교적 인물이 아닙니다. 그분은 만물의 창조자이시며, 교회의 머리이시고, 우리의 구원을 완성하시는 유일한 길이 되십니다. 그러므로 신앙은 무엇을 더하는 문제가 아니라, 이미 우리 안에 계신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고 온전히 따르는 삶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바울이 골로새서를 쓴 이유는 분명했습니다. 당시 골로새 교회 안에는 복음을 흐리게 만드는 여러 사상들이 들어오고 있었습니다. 인간의 철학과 율법주의, 신비주의가 뒤섞이면서 성도들은 점점 “그리스도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에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단호하게 선언합니다. 그리스도는 부족한 분이 아니라 이미 충만하신 분이며, 그 안에 모든 지혜와 지식과 구원이 다 있습니다. 그래서 이 편지는 결국 “다른 것을 더하지 말고, 오직 그리스도를 붙들라”는 강력한 외침입니다.

바울은 골로새서 2장 4절에서 “교묘한 말”을 경계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교묘한 말이란 겉으로는 지혜롭고 옳아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리스도의 충분성과 복음의 본질을 흐리게 하여 사람을 진리에서 벗어나게 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노골적인 거짓이 아니라, 진리의 일부를 담고 있으면서 핵심을 비틀어 사람을 속이게 만드는 설득력 있는 언어입니다. 그래서 더 위험합니다. 완전히 틀린 말은 쉽게 경계하지만, 반쯤 맞는 말은 오히려 더 쉽게 받아들이기 때문입니다.

본론

1. 속지 않는 신앙의 세 가지 기준

교묘한 말에 속아 넘어가는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이 분명하지 않고, 진리 위에 깊이 뿌리내리지 못한 채 무엇인가를 더 붙들어야 안정감을 얻으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미 복음을 알고 있으면서도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고 느끼기 때문에 더 안전해 보이고, 더 지혜로워 보이며, 더 특별해 보이는 것을 찾다가 결국 진리와 섞인 거짓에 마음을 열게 됩니다. 사람이 교묘한 말에 속는 이유는 명백한 거짓 때문이 아니라, 그 말이 자신의 불안과 욕망, 그리고 인정받고자 하는 마음을 건드리기 때문입니다. 바로 그 지점에서 분별력을 잃고 진리보다 설득력에 끌리게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질문해야 합니다. 어떻게 이 교묘한 말에 속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바울이 강조하는 것은 단순한 경계가 아니라 분별의 기준입니다. 신앙은 느낌이나 분위기 위에 설 때 흔들리지만, 분명한 기준 위에 설 때 무너지지 않습니다.

첫째, 그 말이 정말 그리스도를 높이는가를 보아야 합니다. 모든 말과 가르침은 결국 하나로 분별됩니다. 그리스도를 더 분명하게 드러내는가, 아니면 흐리게 만드는가입니다. 사람을 속이는 말의 특징은 그리스도를 노골적으로 부정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오히려 그리스도를 인정하면서도 그분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느끼게 만듭니다.

그러나 복음의 본질은 분명합니다. 그리스도는 이미 충분하신 분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을 더 의지하게 만드는 말은 이미 진리를 벗어난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더 깊이 알게 하고 더 사랑하게 만드는 말은 은혜이지만,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을 더하게 만드는 말은 미혹입니다.

이러한 말은 결국 사람의 시선을 그리스도에게서 돌려 다른 것에 의지하게 만듭니다. 겉으로는 신앙을 돕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리스도의 충분성을 약화시키고 복음의 중심을 흐리게 합니다. 바울은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골 2:3)라고 말합니다. 참된 지혜와 지식은 오직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둘째, 그 말이 말씀 위에 서 있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점검하려면 기준을 알아야 하고, 기준을 알려면 말씀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모르면서 분별하려는 것은 자 없이 길이를 재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에 오래 다닌 것과 말씀을 아는 것은 같지 않습니다. 예배 자리에 오래 앉아 있었다고 해서 저절로 분별력이 생기는 것은 아닙니다. 말씀을 읽지 않고 배우지 않으며 마음에 쌓지 않으면 사람은 결국 분위기에 끌리고 감정에 흔들리며 말 잘하는 사람에게 넘어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그 말이 말씀 위에 서 있는가”를 점검하려면 먼저 내가 말씀 위에 서 있어야 합니다.

말씀이 없는 마음에는 분별의 기준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채워지지 않으면 세상의 그럴듯한 말과 종교적으로 포장된 미혹을 분별할 힘도 약해집니다. 진리는 느낌으로 익히는 것이 아니라 말씀으로 배우는 것입니다. 분별은 감각이 아니라 훈련입니다.

말씀을 가까이하지 않는 신앙은 결국 누군가의 해석과 분위기에 끌려다니게 됩니다. 그러나 말씀을 아는 사람은 듣는 순간 이상함을 느끼고, 화려한 말보다 진리의 무게를 먼저 봅니다. 그래서 주님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마 7:24)이라고 하셨습니다. 말씀 위에 선 신앙만이 흔들리지 않습니다.

셋째, 그 말이 나의 욕망을 자극하는지를 보아야 합니다. 여기서 말하는 욕망은 단순한 필요가 아니라 하나님보다 앞서 나를 움직이게 하는 내면의 갈망입니다. 사람이 속는 가장 큰 이유는 말이 틀려서가 아니라, 내 마음이 그것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더 인정받고 싶고, 더 특별해지고 싶고, 더 쉽게 얻고 싶은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교묘한 말은 바로 이 지점을 파고듭니다. 그래서 욕망은 분별력을 흐립니다. 진리는 “십자가를 지라, 기다리라, 내려놓으라”라고 말하지만, 욕망은 “더 빨리, 더 쉽게, 더 크게”를 원합니다.

이때 사람은 진리보다 자신의 욕망을 만족시키는 말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래서 귀에 좋고 마음에 맞는 말에 끌리게 됩니다. 그러나 진리는 때로 불편하고 좁고 부담스럽습니다. 귀에 좋은 말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마음을 찌르고 회개하게 하는 말이 진리일 수 있습니다.

바울은 “사람이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둔다”(딤후 4:3)고 경고합니다. 사람은 진리를 몰라서가 아니라, 자기 욕망을 만족시켜 줄 말을 원하기 때문에 진리에서 멀어지기도 합니다.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약 1:15). 그러므로 우리는 항상 물어야 합니다. 이 말이 나를 주님께로 이끄는가, 아니면 내 욕망을 정당화하는가. 이 세 가지 기준을 붙들 때, 우리는 어떤 시대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신앙 위에 설 수 있습니다.

2. 무너지지 않는 신앙의 구조와 세 가지 경계

이제 바울은 골로새서 2장 6–7절에서 신앙이 어떻게 무너지지 않는 구조로 세워지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 그 안에 뿌리를 박으며 세움을 받아 교훈을 받은 대로 믿음에 굳게 서서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 이 말씀은 신앙이 감정이나 순간적인 결단이 아니라, 구조적으로 세워지는 과정임을 보여줍니다.

신앙은 기초를 깊이 파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그리스도를 주로 받았다는 것은 단순한 종교적 고백이 아니라 삶의 중심이 바뀌는 사건입니다. 아파트를 지을 때 가장 먼저 하는 일은 외형을 꾸미는 것이 아니라 깊이 터파기를 하는 것입니다. 기초가 깊지 않으면 건물은 높이 올라갈 수 없습니다.

신앙도 같습니다. 내 생각과 기준, 자존심과 방식이 내려가고 그 자리에 그리스도가 중심이 되어야 합니다. 이것이 뿌리를 박는 일입니다. 눈에 잘 보이지 않지만 가장 중요한 작업입니다. 에베소서 4장 14절은 “온갖 교훈의 풍조에 밀려 요동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합니다. 기초가 없는 신앙은 결국 흔들리지만, 그리스도 안에 뿌리내린 신앙은 흔들리지 않습니다.

그다음은 세움을 받는 단계입니다. 터파기만으로 건물이 완성되지 않듯이, 그 위에 기둥이 서고 구조가 세워져야 합니다. 신앙의 기둥은 말씀입니다. 말씀 위에 세워진 신앙만이 무너지지 않습니다. 마태복음 7장 24절의 반석 위에 세운 집이 바로 이것입니다.

말씀이 없는 신앙은 순간의 감동으로는 버틸 수 있어도, 긴 시간의 시험과 유혹 앞에서는 무너지게 됩니다. 그러나 말씀으로 세워진 신앙은 다릅니다. 말씀은 생각을 지키고 감정을 다스리며 삶의 방향을 정해 줍니다. 바울이 “세움을 받아”라고 말할 때, 그것은 한 번의 결단이 아니라 말씀 위에 계속 세워져 가는 신앙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그다음 단계는 믿음에 굳게 서는 것입니다. 잘 세워진 건물은 외부의 충격을 견뎌냅니다.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상황이 흔들어도, 사람의 말이 흔들어도, 교묘한 말이 다가와도 무너지지 않는 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 58절에서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라”고 권면합니다. 견실함은 잠시 뜨거운 상태가 아니라 끝까지 서 있는 힘입니다. 신앙은 시작보다 지속이 중요합니다. 믿음은 감정이 아니라 진리 위에 서서 끝까지 견디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그 구조가 바르게 세워지면 감사가 열매로 나타납니다. “감사함을 넘치게 하라”는 말은 억지로 감사하라는 명령이 아니라, 기초가 깊고 구조가 안정될 때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결과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장 18절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합니다. 감사는 형편이 좋아서가 아니라, 기초가 바로 선 삶에서 나오는 열매입니다. 시편 1편 3절도 뿌리 깊은 나무가 열매를 맺는다고 말합니다. 신앙도 같습니다. 깊이 뿌리내린 신앙은 감사의 열매를 맺습니다.결국 신앙은 보이는 것을 쌓는 일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곳을 깊이 세우는 일입니다. 그렇게 세워진 신앙만이 끝까지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바울은 왜 이렇게까지 “뿌리를 박고 세움을 받고 굳게 서라”고 말합니까? 그 이유가 2장 8절에 나옵니다.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사로잡을까 주의하라.” 여기서 “사로잡다”는 것은 단순한 영향이 아니라, 끌려가고 지배당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신앙이 바로 서지 않으면 사람은 결국 다른 것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바울은 그 위험을 세 가지로 요약합니다. 첫째는 사람의 전통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사람이 만들어 놓은 종교적 관습과 규칙입니다. 겉으로는 오래되고 경건해 보일 수 있지만, 그것이 말씀보다 위에 올라가는 순간 신앙은 형식주의로 기울게 됩니다.

특히 교회 안에서 오래 신앙생활을 한 사람일수록 이 부분을 더 조심해야 합니다. 신앙의 연륜이 쌓일수록 ‘말씀’이 아니라 ‘익숙함’이 기준이 되기 쉽기 때문입니다. “원래 우리는 이렇게 해 왔다”는 말이 말씀보다 앞서게 될 때, 신앙의 중심은 하나님이 아니라 사람의 방식으로 옮겨가게 됩니다.

그 결과, 교회 안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으면서도 말씀에는 둔감하고 변화에는 닫힌 상태가 될 수 있습니다. 오래 다닌 것이 곧 바른 신앙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오래될수록 더 말씀 앞에서 자신을 점검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너희의 전통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폐하는도다”(막 7:13)라고 책망하셨습니다.

둘째는 세상의 초등학문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없이 세상을 설명하려는 모든 사고 체계를 말합니다. 철학, 사상, 시대정신, 인간 중심적 가치관은 겉으로는 세련되어 보이지만 중심에 하나님이 없습니다. 그래서 결국 사람을 하나님께로 이끄는 것이 아니라 자기중심적 사고 안에 머물게 합니다.

오늘날에도 이러한 모습은 분명하게 나타납니다. 교회의 성장을 숫자와 성과로 판단하고, 말씀과 기도보다 프로그램과 전략을 의지하며, 거룩보다 효율을 앞세우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또한 시대의 흐름에 맞추어 진리를 재해석하거나, 죄의 기준을 흐리는 태도 역시 같은 맥락입니다. 이러한 방식은 겉으로는 합리적이고 효과적으로 보이지만, 하나님 없이도 돌아갈 수 있다는 점에서 위험합니다.

셋째는 그리스도를 따르지 않는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본질적인 문제입니다. 사람의 전통과 세상의 사상도 결국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지 않으면 모두 방향이 틀린 것입니다. 문제의 핵심은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으로 충분해지려는 시도입니다. 겉으로는 보충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그리스도를 대체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분명하게 말합니다. 참된 신앙은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을 붙드는 신앙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로 충분함을 아는 신앙입니다.

3. 왜 우리는 이미 충만한데도 계속 찾는가

바로 이 지점에서 골로새서 2장 9–10절이 강력하게 선언됩니다.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 너희도 그 안에서 충만하여졌으니…” 이 말씀은 신앙의 중심을 세우는 결정적인 선언입니다.

첫째, 그리스도는 완전하신 분입니다. “아버지께서는 모든 충만으로 예수 안에 거하게 하시고”(골 1:19)라는 말씀처럼,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일부만 담고 계신 분이 아니라 신성의 모든 충만이 거하시는 완전한 분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보충이 필요한 분이 아니라, 이미 충만하신 분입니다. 그분께는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을 찾는다는 것은 결국 그리스도의 완전성을 충분히 믿지 못한다는 뜻이 됩니다.

둘째, 우리는 그 안에서 이미 충만한 존재입니다. 바울은 “충만해질 것이다”라고 말하지 않고 “충만하여졌다”라고 말합니다. 현재형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무엇을 더 채워야 완전해지는 존재가 아니라,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충분한 존재라는 뜻입니다.

요한복음 1장 16절은 “그의 충만한 데서 우리가 다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도 사람은 왜 흔들립니까? 이미 충만한데도 부족하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더 강한 체험을 찾고, 더 특별한 은혜를 찾아다니고, 더 높은 수준의 비밀을 알고 싶어 합니다. 심지어 어떤 사람은 더 많은 지식을 쌓아야 완전해진다고 생각하고, 또 어떤 사람은 어떤 사람이나 어떤 교회 시스템이나 어떤 프로그램이 자신을 완전하게 만들어 줄 것이라고 기대합니다.

그러나 이런 태도는 결국 그리스도보다 다른 것을 더 의지하는 신앙으로 변질됩니다. 진리는 더 많이 얻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미 받은 것 안에 거하는 데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거하는 사람은 계속 다른 것을 찾아 헤매지 않습니다. 이미 받은 은혜의 풍성함 속에 머뭅니다.

셋째, 그리스도는 모든 권세 위에 계신 분입니다. 바울은 “그는 모든 통치자와 권세의 머리시라”고 말합니다. 당시 사람들은 보이지 않는 영적 존재들, 천사와 권세와 능력들을 두려워하고 거기에 의지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분명히 선언합니다.

“만물이 다 그로 말미암고 그를 위하여 창조되었고”(골 1:16),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빌 2:10). 그 어떤 권세도 그리스도를 넘어설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두려워할 이유도, 다른 영적 장치에 매일 이유도 없습니다. 참된 평안은 오직 모든 권세 위에 계신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결론

이제 설교의 결론으로 나아갑니다. 바울은 골로새서 3장 1–4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리심을 받았으면 위의 것을 찾으라… 위의 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 이 말씀은 단순한 권면이 아니라 정체성의 선언입니다. 우리는 이미 그리스도와 함께 살아난 사람들입니다. 이미 충만한 자이며, 새 생명을 가진 자입니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의 삶의 방향은 분명해야 합니다. 위의 것을 찾는 삶, 위의 것을 생각하는 삶, 곧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고 살아가는 삶이어야 합니다.

여기서 “위의 것을 찾으라”는 말은 현실을 무시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세상에서 도피하라는 말도 아닙니다. 오히려 땅을 딛고 살지만, 삶의 기준과 소망과 시선은 하늘에 두고 살라는 뜻입니다. 세상 속에서 일하고, 관계하고, 책임을 감당하지만, 그 모든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해석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살아가라는 뜻입니다. 우리의 문제는 종종 현실이 너무 커 보여서 위를 보지 못하는 데 있습니다. 눈앞의 문제, 사람의 평가, 경제적 불안, 관계의 갈등, 몸의 연약함이 너무 크게 보여서 위의 것을 생각하지 못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너희 생명이 그리스도와 함께 하나님 안에 감추어져 있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 성도의 진짜 생명은 세상이 건드릴 수 없는 곳에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이 다 빼앗아도 빼앗을 수 없는 생명, 상황이 다 흔들어도 흔들 수 없는 정체성이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더 채워야 할 사람들이 아닙니다. 이미 받은 것을 붙들고 살아가야 할 사람들입니다. 이미 충만한 자로 살 것인가, 아니면 여전히 부족한 자처럼 살 것인가. 이것이 오늘 우리의 신앙을 결정합니다.

충만을 아는 사람은 위를 바라보고 살고, 충만을 모르는 사람은 계속 땅을 바라보며 다른 것을 찾습니다. 위를 본다는 것은 막연한 이상을 좇는 것이 아니라, 내 생명의 근원이 어디 있는지를 분명히 아는 것입니다. 내 만족의 근원이 그리스도께 있고, 내 안전의 근거가 그리스도께 있으며, 내 정체성의 뿌리가 그리스도께 있음을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결단해야 합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이미 충만한 자로 살 것입니까? 아니면 여전히 무엇인가를 찾아 헤매는 삶을 살 것입니까? 나는 위의 것을 찾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땅의 것에 묶여 사는 사람입니까? 나는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고 살아가는 사람입니까, 아니면 여전히 그리스도 외의 다른 것에서 만족을 구하는 사람입니까?

오늘 바울의 말씀은 우리를 다시 신앙의 중심으로 부릅니다. 오직 그리스도입니다. 그리스도는 완전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 안에서 이미 충만합니다. 그분은 모든 권세 위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사는 새사람으로 살아야 합니다. 위의 것을 찾고, 위의 것을 생각하고, 이미 받은 은혜 안에 거하며, 흔들리지 않는 믿음으로 끝까지 서야 합니다. 바라기는 오늘 이 말씀이 우리 안에 깊이 뿌리내려서, 더 이상 교묘한 말에 흔들리지 않고, 더 이상 부족한 자처럼 살지 않으며,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한 자답게 살아가는 믿음의 결단으로 이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최원호 목사
최원호 목사(서울 상봉동 은혜제일교회)

마무리 기도
사랑의 하나님 아버지,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가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한 자임을 깨닫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을 더 찾으려 했던 우리의 마음을 내려놓게 하시고, 오직 주님만으로 만족하는 믿음을 허락하여 주옵소서. 교묘한 말에 흔들리지 않게 하시고, 말씀 위에 굳게 서서 분별하는 신앙을 살게 하옵소서. 땅의 것이 아니라 위의 것을 바라보며, 그리스도를 중심에 두고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최원호 목사 (서울 상봉동 은혜제일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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