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인트하우스 평택 정재우 목사
세인트하우스 평택 정재우 목사 ©세인트하우스 평택

요즘 한 편의 영화가 엄청나게 깊은 파장을 일으키고 있다. <왕사남>으로 불리는 '왕과 사는 남자'라는 영화다. 세조의 왕위 찬탈로 유배간 단종과 열악한 유배지 백성과의 조우와 관계를 다룬다. 화려한 액션도, 압도적인 반전도 없다. 대신 사람과 사람이 함께 살아가는 이야기를 담담하게 풀어낸다. 그럼에도 많은 관객이 이 작품을 찾는다. 1,500만 넘는 관객을 동원하게 되리라고 감독도 주연배우도 예측하지 못했다고 한다. 이유는 단순하지 않다.

이것은 장르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의 징후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사는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 연결되어 있다. 손 안의 화면 하나로 누구와도 이어질 수 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관계는 점점 얕아지고 있다. 대화는 짧아지고, 공감은 줄어들고, 사람들은 점점 더 쉽게 서로를 판단한다. 가까워졌지만 깊어지지 못한 시대, 함께 있지만 외로운 시대다.

이 영화의 흥행을 분석한 평론들은 공통된 방향을 가리킨다. 한 평론은 이를 ‘궁금증의 시대’라고 설명한다. 사람들은 더 이상 누군가의 평가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대신 스스로 보고 판단하려 한다. "도대체 왜 이 영화가 사람들을 끌어당기는가?"라는 질문에서 출발한다. 직접 자신이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고 평가하려 한다.

또 다른 평론은 이 작품을 ‘감정의 기록’이라고 부른다. 이 영화는 사건을 설명하지 않는다. 대신 사람 사이에 흐르는 공기를 보여준다. 권력의 구조보다 관계의 온도를 드러낸다. 관객은 줄거리를 따라가기보다 그 안에 머물게 된다. 그것이 이 영화가 가진 힘이다.

세 번째 평론은 조금 더 냉정하다. 이 영화는 새로운 시도를 한 작품이 아니라, 이미 검증된 서사를 가장 안정적으로 완성한 영화라는 것이다. 과장되지도, 지나치게 낯설지도 않다. 오히려 익숙하기 때문에 편안하게 받아들여진다. 그러나 바로 그 점이 지금 시대에는 가장 강력한 힘이 된다.

이 세 가지 해석을 함께 놓고 보면 하나의 결론에 이르게 된다. 이 영화의 성공은 작품 자체의 완성도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것은 지금 우리가 무엇을 잃어버렸는지를 정확히 건드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랫동안 개인의 시대를 살아왔다. 혼자 살아가는 법을 배웠고, 관계를 선택의 문제로 여겨왔다. 그러나 그 결과는 예상보다 차가웠다. 고립은 깊어졌고, 신뢰는 무너졌다. 사람들은 서로를 필요로 하면서도 동시에 서로를 경계한다.

이 영화는 그 틈에서 아주 단순한 질문을 던진다. “그래도 우리는 함께 살아갈 수 있는가.” 이 질문은 새롭지 않다. 그러나 지금 이 시대에는 다시 들어야 할 질문이다.

과거의 영화들이 권력을 비판하고 진실을 폭로하는 데 집중했다면, 오늘의 영화는 관계를 회복하는 데 더 많은 관심을 둔다. 이전에는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밝히는 것이 중요했다면, 지금은 어떻게 다시 살아갈 수 있는지를 묻는다.

그래서 이 영화는 과거를 배경으로 하지만 철저히 현재를 향하고 있다. 왕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결국 우리 자신의 이야기다. 함께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 그러나 동시에 얼마나 필요한지 보여준다.

따뜻한 햇살로 다가온 봄날처럼 그렇게 누군가와 더불어 훈훈하게 살아가기를 소망한다. 소소한 일상을 나누는 공동체이든지 종교적 신념을 나누는 끈끈한 공동체이거나 이것이 절실히 필요한 게 아닐까?

사람은 혼자서 완성되지 않는다. 결국 우리는 누군가와 함께 걸어갈 때 비로소 인간이 된다. 고립되었던 단종이 비로소 청령포 사람들과 함께하면서 새 삶을 찾게 된 것처럼. 아마도 관객들은 그 사실을 잊지 않았기 때문에 이 영화를 선택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만으로도 이 영화의 의미는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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