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뜻이 지닌 이 두 가지 측면, 즉 그분의 말씀에 이미 구체적으로 나타나 있는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인식할 때 비로소 우리는 청사진이라는 정적인 개념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은 하늘에서 줄로 달아 내리는 요술보따리 같은 것이 아닙니다. 기도할 때 하나님은 때로 성령에 의한 깊은 확신을 주시는데, 그것은 어떤 행동 방침에 대해 옳다는 느낌이나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는 느낌을 심화시킵니다. 이것은 우리를 충동질하여 오늘은 홍콩행 비행기를 타게 하고 내일은 시카고로, 그다음 날은 카누를 타고 아마존강 상류 쪽으로 노를 저어 가게 하는 등 매일 색다른 방향으로 눈을 돌리는 ‘변덕이 심한’ 정서 상태와는 전혀 다릅니다. 하나님은 쥐덫을 놓는 식으로 우리를 다루지 않습니다. 그분은, “하하, 너는 이 길이 옳은 길인 줄 알았지? 틀렸어. 다시 돌아가거라. 다음 기회에는 부디 운이 좋기를!” 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에 대한 그런 왜곡된 개념을 버려야 합니다. 우리를 위해 죽으실 정도로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삶을 가지고 장난을 치시겠습니까? 우리는 그분에게 매우 의미 있는 존재입니다.
폴 E. 리틀 -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주님께서는 수난 예고를 통해 자신에게 다가올 죽음을 연습하고 준비하셨습니다. 그러나 아직 죽음을 준비하지 못하고 연습하지 못한 베드로는 주님의 뜻, 더 나아가 하나님의 뜻을 반대하고 자기의 뜻으로 주님을끌어당기려고 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단호하게 그를 밀어내십니다. 자기의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일을 그리고 하나님의 유익을 추구하시길 원하셨습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죽음을 준비하고 또한 죽음을 연습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것이 자기 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지는 삶입니다. 죽어야만 할 수 있는 것이 자기 부인이며 자신에게 주어진 죽음을 받아들여야만 자기 십자가를 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광재 – 죽음 사용 설명서
예수께서는 요한복음 10장 10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다.” 마치 우리의 고립과 외로움을 아셨던 듯, 예수님은 단지 죽음 이후의 영원한 삶만이 아니라 지금 이 땅에서 ‘더 풍성한 삶’을 누리게 하시려 이 땅에 오셨음을 말씀하셨다. 나는 오늘날 교회가 바로 이 사명을 이어가야 한다고 믿는다. 섬처럼 흩어진 개인들을 공동체로 불러 모으고, 스스로 쌓아 올린 벽을 허물어 서로 관계 맺고 성장하도록 돕는 것, 이것이 교회의 본질적 사명이다. 급속히 발전하는 AI와 다양한 기술들을 생각할 때, 교회에게 주어진 이 사명은 더욱 절실하다. 예수님은 죄 사함만이 아니라 병든 자를 고쳐주시고, 눈먼 자를 보게 하셨다. 굶주린 이들을 위해 떡과 물고기로 먹이시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으셨다. 그리고 부활 후에도 이러한 돌봄 사역은 초대 교회를 통해 이어졌다. 사도행전 6장에서 일곱 집사가 선출된 이유도, 헬라파 과부들과 히브리파 과부들 사이의 음식 분배 문제 때문이었다. 곧, ‘더 풍성한 삶’을 위해 교회가 반드시 감당해야 할 사명 중 하나는 바로 ‘돌봄’이다.
이효주 - 목회상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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