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대복 목사의 『예배에 목숨을 걸라』는 책이 있다. 200명에서 불과 몇 년만에 15,000명 대형 교회로 성장하는 데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이 예배였다고 한다. 건성으로 드리는 예배, 자리만 채웠다가 가는 예배가 아니라 간절하게 하나님의 은혜를 사모하며 온 맘 다해 예배한 것, 성도들이 예배에 목숨을 거니 신앙이 뜨거워지고 메마른 심령이 살아나고 무기력한 심령이 새 힘을 얻고 교회가 부흥하더라는 거다. 그들은 조금만 늦어도 예배당에 들어갈 수 없다. 하나님 만나려고 오는 사람이 어슬렁거리며 오는 것은 은혜를 사모하는 태도가 아니기에 그런 사람에게는 예배당 문을 닫았다. 그래서 성도들은 미리 나와서 기도로 준비한다. 예배에서 은혜받지 못하면 한 주간 세상에서 승리할 수 없다고 믿고 예배에 목숨을 건 거다. 그렇다. 그들에게 예배는 허기진 영혼에 양식을 공급하는 영혼의 식탁이고 생명의 통로, 변화와 충전의 시간이다. 하나님께 사랑을 쏟고, 말씀대로 살려고 몸부림치는 그들의 열정을 배워야 한다.
묻는다. 예배가 생명줄 맞나? 영혼의 식탁 맞나? 명심하라. 예배가 밥이다. 거를 수 없다. 예배가 탯줄, 생명의 통로이다. 용광로처럼 모든 근심을 녹이는 기도와 모난 곳을 날선 검처럼 도려내는 말씀과 천군 천사의 소리처럼 심령을 뛰놀게 하는 찬송, 그리고 고독을 물리치는 성도의 교제가 있는 예배, 생명을 유지하는 영적 종합 비타민 같은 예배, 예배에 목숨을 걸어야 인생이 바뀐다.
시편 134편에도 오직 예배가 답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들, 밤에도 예배를 위해 성전에 서 있다. 예배를 존재의 이유이자 목적으로 여기고, 삶의 구심점이자 원동력으로 여기며 예배에 목숨을 걸고 먼 길을 달려온 순례자들, 이제 성전에 머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축제의 마지막 밤, 성전을 떠나는 게 너무 아쉬워 밤에도 성전을 찾을 수밖에 없다.
‘밤’이란 단어가 시선을 끈다. 원래 구약시대에는 정기적인 밤예배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늦은 밤까지 철야하며 성전을 지키는 무리가 있었다는 것, “밤에 여호와의 집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1절), 이사야 30장에 보면 “너희가 거룩한 절기를 지키는 밤에 하듯이 노래할 것이며”(29절)라고 했는데, 순례자들이 밤새 여호와를 송축한 거다.
심장이 쉬지 않고 피를 뿜어내듯 우리 영혼의 심장이 기도와 찬양을 쉴새 없이 뿜어내는 교회, 그래서 순례자들이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찬양으로 뜨거웠던 바로 그날 밤 예루살렘 성전처럼 우리 교회가 생명 에너지가 충만하고, 은혜로 행복한 교회 되기를 기대하며 시편 134편을 “밤새도록 부른 해피송”이라는 제목으로 불러 본다.
여호와를 송축하는 행복
시편 134편도 133편처럼 3절밖에 안 되는 짧은 시다. 그러나 짧아도 아름다울 뿐만 아니라 예배의 부름과 설교, 그리고 축도를 갖춘, 심오함이 담긴 시다. 1-2절은 순례자들이 야간 근무자인 제사장과 레위인들을 향하여 외친 것이고, 3절은 성전을 떠나는 순례자를 향한 제사장의 축도였던 것 같다. 교독문 같은 교송으로 이해하면 된다.
시는 “보라”(Behold)라는 말로 시작된다. “보라 밤에 여호와의 집에 서 있는 여호와의 모든 종들아 여호와를 송축하라”(1절), 시인에게 송축은 기쁨이고 행복이다. 그래서 함께 “여호와를 송축하자”고 한다. 얼마나 행복한지 2절에도 “여호와를 송축하라”고 또 선포한다. 이 ‘송축하라’는 단어는 3절에 언급된 ‘복’과 같은 단어, ‘바라크’(ברך)라는 단어인데 이 단어는 ‘복’이라는 뜻으로 시편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단어 중 하나이다. 영어 번역본에 보면 “bless the LORD”, “bless you”로 번역했다. “하나님을 축복하라” “당신을 축복해요”라는 말, 하나님이 축복하신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을 축복한다는 말이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이 아니다.
시편 95편에 보면 “오라, 우리가 굽혀 경배하며 우리를 지으신 여호와 앞에 무릎을 꿇자”(6절)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무릎을 꿇자”가 ‘바라크’, 상대방의 능력이나 지위를 인정한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인간이 하나님을 바라크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과 위대함을 인정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여호와를 송축’한다는 것은 “하나님은 위대하십니다” “하나님은 능력이 있으십니다”라는 찬양이다. 물론 우리가 기대하는 대로 “하나님은 인간을 바라크하는 분”이시다. 하나님이 복을 주시는데 그 복은 능력, 위대함의 복이다. 그렇다면 우리의 찬양은 존귀함이고 승리이며, 충만함이자 탁월함이다.
시인은 이어서 하나님이 어떤 분이신지를 노래한다.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3절), 찬송의 대상이신 하나님을 ‘창조주 하나님’이시라 한다.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원, 기억하나? 시편 8편에서 다윗이 불렀던 행복의 노래, “주의 영광이 하늘을 덮었나이다”(1절), 다윗은 하늘을 바라보며 경탄했다. 비 온 뒤 사람들을 부르는 무지개, 해 질 무렵 붉게 물들어 타는 듯한 저녁노을, 황혼과 함께 밀려와 밤하늘을 밝혀주는 친구 같은 달, 그리고 반짝반짝 웃으며 손짓하는 빛나는 별들을 바라보며 행복에 젖어 ♬ 주의 손가락으로 만드신 주의 하늘과 주께서 베풀어 두신 달과 별 내가 보오니... ♬” 다윗은 기가 막히게 아름다운 자연을 만드신 하나님을 찬양했다.
미켈란젤로(Michelangelo)는 이 천지창조에 감동받고 4년 동안 눕거나 뒤로 버틴 채 시스틴 천정화 작업을 했다. 얼굴에 무수히 회반죽이 떨어지는 것을 감수하며 프레스코화(Fresco)를 그린 거다. “사람이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생각하시며 인자가 무엇이기에 주께서 그를 돌보시나이까”(시8:4), 하나님의 돌보심을 믿고 부르는 찬양, 이제 곧 성전을 떠나도 나를 케어해 주실 것을 확신하며 올려드리는 찬양, 우리도 순례자들처럼 해피송을 부르며 살아야 한다.
손을 들고 송축하는 행복
시인은 “성소를 향하여 너희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2절)고 한다. 창세기에 보면 역사가 예배에 의해 갈라진다. 농사꾼인 가인은 땅의 소산을 재물로 예배드렸고, 목동인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을 제물로 예배드렸다. 그런데 하나님이 아벨의 예배만 받으신다. 이유는 하나님이 삶을 보시기 때문, 예배 후 가인의 태도를 보면 하나님께 화를 낸다. 교만한 거다. 그는 예배 실패의 책임을 동생에게 전가하고 증오심으로 동생을 죽인다. 삶과 예배 태도에 문제가 있었던 거다. 반면에 아벨의 예배는 히브리서에 보면 믿음의 예배로 평가된다. 결국 아벨은 예배 성공으로 순교자가 되지만 가인은 예배 실패로 동생을 죽이는 살인자, 방랑자가 된다.
그 결과 가인은 자손들까지 버림받는다. 후손 라멕은 두 아내를 취한 음란한 사람의 조상이다. 그리고 아브라함의 조카 롯은 유랑자라는 뜻, 하나님을 떠나 유리방황한다. 이 세상을 헤매는 거다. 후손들 중에 구원의 사람이 없다. 제사도 없다. 반면에 아벨을 대신해 이어지는 셋의 자손 가운데 노아가 나오고, 아브라함이 나온다. 인류 구원의 길이 열리고 아브라함은 복의 근원이 된다. 그 축복이 이삭과 야곱으로, 요셉으로 이어지며 심히 창대케 되고, 이어서 모세가 나오고 여호수아가 나온다. 한 사람도 예배와 끊어진 사람이 없다. 그 후손들이 계속 예배드리며 살면서 예수님까지 이어진다.
예배 성공이 사람의 운명을 결정한다. 예배에 축복이 있다. 솔로몬은 왕이 되면서 첫 번째로 한 일이 기브온으로 올라간 거다. 취임 파티하려고 간 게 아니다. 찾아오는 사람들 만나려고 간 것도 아니다. 그는 기브온에서 일천번제를 드렸다. 하나님 앞에 예배드린 것, 그 모습에 감동하신 하나님께서 예배가 상달되었다며 소원을 물으신다. 솔로몬이 지혜를 구하자 그에게 지혜는 물론 부귀영화를 누리게 하신다.
예배는 행복의 디딤돌이다. 그렇다면 자세가 중요한데 134편 시인은 너무 행복해서 “성소를 향하여 너희 손을 들고 여호와를 송축하라”고 외친다. 손을 드는 행동, 시편에서는 주로 기도하는 자세다. 시편에서의 기도는 ‘찬양한다’ ‘예배한다’는 의미와 일맥상통하는 것,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성소를 향해, 하나님을 향해 ‘손을 들고’ 송축한다. 손을 든 것은 기쁨과 평화의 표시, 그런데 언제부턴가 찬양의 기쁨이 하나님께 있지 않고 마치 우리의 즐거움에 있는 것 같더니 결국 사람들은 기쁨과 평화를 상실하고 산다. 그래서 현대인들은 영적으로 궁핍하다. 손을 들어야 한다. 손을 들면 회복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출애굽기 17장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가나안으로 갈 때 아말렉 족속이 길목을 막는다. 전쟁이 벌어진다. 그런데 모세가 산 위에서 손을 들고 기도하면 이스라엘 군사들이 이기고, 손을 내리면 아말렉이 이기는 전황이 펼쳐진다. 그래서 아론과 훌이 모세의 두 팔을 받쳐주며 모세로 하여금 두 손을 들고 기도하게 도와주면서 이스라엘이 아말렉을 물리친다(출 17:8~13). 손을 든 게 승리를 불러온 거다.
시편 63편에 보면 다윗은 “나의 평생에 주를 송축하며 주의 이름으로 말미암아 나의 손을 들리이다”(3-4절), 평생 주님을 송축하며 손을 들겠다고 한다. 구원을 믿는 감사, 인도하심과 지켜주심, 소원성취를 확신하며 손을 들겠다고 한 거다.
감사하거나 사랑하면 손을 들고, 간절하면 두 손 들어 표현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겸손과 항복의 표시일 수도 있고, 누구를 환영하는 표시일 수도 있다. 쌍수를 들고 주님을 환영하듯 손을 들고 송축하는 거다. 지금은 위기의 때, 시편 88편에 보면 위기의 순간에 손을 들었다. “곤란으로 말미암아 내 눈이 쇠하였나이다 여호와여 내가 매일 주를 부르며 주를 향하여 나의 두 손을 들었나이다”(9절). 물에 빠진 베드로도 손을 들고 “살려주세요” 소리쳤을 거다. 손을 드는 것은 강력한 구조 요청, 우리는 손을 들어야 한다.
다른 것 다 차치하고 하나님을 높이며 경배하는 의미로 손을 들어 보라. 어린 아이가 두 손을 벌리고 아빠를 향해 달려가 아빠 품에 안기듯,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때 “호산나”를 외치며 두 손에 종려나무를 들고 흔든 것처럼 주님을 향한 열정을 보이는 것, 마음껏 손을 들고 송축하는 해피송을 불러야 한다.
여호와의 복을 누리는 행복
이제 시인은 “천지를 지으신 여호와께서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3절), 하나님이 주실 복 때문에 기쁨이 고조된다. ‘복’은 ‘송축’과 더불어 시편 134편의 핵심 단어(key word), 순례자의 최대 관심사이자 예배자인 우리의 관심사다. 아마 제사장이 순례자들을 위해 축도(benediction)를 했던 것 같다. “시온에서 네게 복을 주실지어다”, 축복의 장소는 ‘시온’, 성전이 있는 시온은 성경에서 하나님의 발전소, 시온을 통해 하나님의 전능한 힘이 흘러나간다.
어디를 가든 순례자들이 복을 누리길 원하는 마음으로 축도를 한 건데 기억할 것은 하나님이 예배자를 축복하신다는 거다. 아브라함이 그랬다. 부름받은 이후 한평생 예배 중심으로 산 아브라함, 그는 예배의 조상이 된다. 어디를 가든 단을 쌓고 예배부터 드렸다. 한글 개역으로보면 “아브람이 자기에게 나타나신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창12:7), “그가 그곳에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고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더니”(창12:8), “아브람이 장막에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단을 쌓았더라”(창13:8), 단을 쌓았다는 것은 예배드렸다는 것, 주목할 것은 ‘여호와를 위하여’라는 표현이다. 예배는 나를 위해 드리는 게 아니라 여호와를 위해 드리는 거다. 기억하라. 독자 이삭까지 제물로 드리려 했던 아브라함은 철저한 예배의 사람이었다(창22:9-10).
하나님은 예배의 사람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신다.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또 그에게 이르시되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15:5), “내가 내 언약을 나와 너 사이에 두어 너를 크게 번성하게 하리라”(창17:1-2),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도 아끼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네게 큰 복을 주고 네 씨로 크게 성하여 하늘의 별과 같고 바닷가의 모래와 같게 하리니 네 씨가 그 대적의 성문을 차지하리라”(창22:16-17)...
이용규 선교사의 『내려놓음』에 보면 몽골 베르흐 지역의 예배 처소를 방문했을 때의 이야기가 소개된다. 주일 예배를 드리던 중 ‘별러르’라는 자매가 몸에 땀이 범벅이 된 채 교회에 들어왔다. 이 자매는 기도를 통해 듣지 못하던 귀가 열린 자매였다. 이 자매가 예배 몇 시간 전에 소를 잃어 찾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니다 예배 시간이 임박한 것을 알고, 소 찾는 것을 중단하고 말씀을 들으려고 예배처로 달려왔던 거다. 몽골에서 소는 삶의 기반, 재산목록 1호이다. 소 한 마리가 보통 사람의 1년치 월급과 같은데 믿은 지 몇 달 되지도 않은 이 자매가 예배를 위해 결단을 내린 거다. 선교사는 이 결단이 부끄럽지 않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런데 예배를 마치자 밖에서 소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잃었던 소가 집이 아닌 예배 처소로 찾아온 거다.” 이거다. 소 찾는 기쁨보다 예배의 기쁨을 알고 예배를 선택했는데 소 찾는 기쁨과 예배의 기쁨, 모두를 얻었다. 예배의 문을 열면 하늘 문이 열린다!
시므온과 안나는 성전에서 기도하며 예배하다가 아기 예수님을 아기를 안고 찬양했고(눅2:28, 눅2:36,37), 고넬료는 기도하고 예배드리다 성령 충만 받았고, 루디아는 강변에서 기도하고 예배드리다 바울을 통해 주님을 만나 유럽 복음화의 선구자가 되었다. 세상 끝날까지 하나님이 함께하시며 풍성한 삶을 살게 하실 거다. 영원토록 해피송을 부르는 행복한 순례자 되기를 축복한다.
인천신기중앙교회 담임 이희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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