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우 목사
이희우 목사

친정 가는 사람의 얼굴과 시댁 가는 사람의 얼굴이 다르다. 불편한 게 싫기 때문이다. 그런데 교회 올 때 표정은 어땠나? 친정 가는 사람 표정이었나? 아니면 시댁 가는 사람 표정이었나? 시133편의 배경이 된 이스라엘 민족공동체의 표정은 친정 온 사람들의 표정, 그 이상이었던 모양이다. 내용이 해피하다. 우선 짧아서 해피하고(?), 또 너무 아름다워서 읽기만 해도 해피하다. 마치 나태주 님의 시를 읽는 느낌이랄까? 읽거나 노래하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다윗의 시다.

나태주 님은 ‘행복’이라는 시에서 행복을 “저녁 때/ 돌아갈 집이 있다는 것, 힘들 때/ 마음 속으로 생각할 사람 있다는 것, 외로울 때/ 혼자서 부를 노래가 있다는 것”이라고 했는데 다윗은 성전에 모여든 사람들의 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하다. 바라보는 방향과 가고자 하는 방향이 같은 사람들, 파장과 주파수와 결이 맞는 사람들이랄까? 같은 목적으로 몰려온 사람들이고, 함께 하나님께 예배드리겠다는 일념으로 달려온, 예배를 위해 연합한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시편 133편을 “연합에 감탄한 노래”라는 제목으로 불러본다.

연합하여 드리는 예배

시는 “보라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1절), ‘같이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의 연합이 너무 아름답다는 감탄으로 시작된다. 형제가 밤낮 다투고 으르릉거리며 산다면, 사이가 나빠서 서로 왕래도 하지 않고 산다면, 소 닭 쳐다보듯 하며 산다면 불행한 것, 두 편으로 갈라진 광화문의 집회 모습과는 사뭇 다른 하나된 공동체! 2년 전에 소천 되신 인천순복음교회 최성규 목사께서는 유난히 ‘하모니’(harmony)를 강조하셨다. 그 분은 우리말 성경에는 이 단어가 시133편에 딱 한 번 나오지만 영어성경은 다름을 강조하셨다.

맞다. 1996년 Living Bible의 후신으로 출간된 NLT 성경(New Living Translation Bible)에는 하모니라는 단어가 1절부터 3절까지 매절마다 나온다. NLT성경 번역으로 읽으면 “형제가 하모니를 이루며 함께 사는 것이 얼마나 경이롭고 즐거운가 이 하모니는 아론의 머리 위에 부어져 그의 수염과 옷과 흘러내리는 기름과 같이 귀하다 하모니는 시온 산으로 흘러내리는 헐몬 산의 이슬처럼 상쾌하다. 거기서 주께서 그분의 은총 곧 영원한 생명을 선포하셨다”

현대 구어체 영어로 번역되어 좋게 말하면 쉽게 읽히고, 나쁘게 말하면 가벼운 느낌이 난다고들 하지만 제임스 이넬 패커(J.I. Packer) 박사는 NLT Bible을 “지금까지 세상에 나온 번역 중 가장 표현이 매끄럽고, 가장 성공적으로 번역된 성경”이라 했다. NLT Bible에서 특별히 강조한 하모니, 이 하모니는 다윗이 감탄한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핵심 단어(key word)이다.

새번역에서는 ‘아름답고 즐겁다’는 표현을 썼다. “그 얼마나 아름답고 즐거운가! 형제자매가 어울려서 함께 사는 모습!”, ‘아름답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상을 바라보며 연이어 외치시던 ‘좋았더라’와 같은 단어(창1:4, 1:12),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아름다움이다. 그리고 ‘즐겁다’는 것은 결혼 잔치 같은 최고조의 흥겨움을 말한다. 가인과 아벨 사이에는, 이스라엘 지파들 사이에는, 다윗의 자녀들 사이에는 피의 제전이 벌어졌었는데 형제자매가 연합한다. 연합이 예루살렘 예배 공동체에서 실현된 거다.

흩어져 살면서 단절됐던 관계, 깨졌던 하모니가 다시 회복된 것, 그 모습이 아름답다. 이거다. 아름다움은 관계가 살아나는 것, 좋은 공동체 안에서 좋은 사람들과 사귀는 조화, 화목, 이건 최고의 자산이다. 좋은 신앙 공동체, 구성 좋은 교제권 형성이 최고의 축복인데 다윗의 눈앞에 관계를 회복한 이스라엘, 하모니를 이룬 공동체의 모습이 장관이다. 그래서 다윗이 감동한 거다.

프랑스의 장 모네(Jean Monnet)는 유럽 통합의 아버지라 불린다. 1차 대전 전에 영국으로 유학을 갔는데, 떠나기 전에 아버지가 “영국 갔다 오면서 절대 책을 싸 오지 말고, 그 나라 사람들과 많이 사귄 우정을 가지고 돌아오라”고 당부하신 대로 대인관계에 집중했기 때문이다. 그는 대인관계로 프랑스 정부를 개혁하고 유럽을 통합했다. 관계가 성공의 핵심이다.

우리나라가 혼란에 빠진 가장 큰 원인은 권력에 대한 욕심과 더불어 ‘관계’가 깨진 거다. 정치도 관계인데 근래에 우리가 듣는 소리는 관계가 깨지는 소리, 관계가 깨지면 무너질 수밖에 없다.

시편 133편의 하나님의 백성들의 모습은 연합하는 모습, 실현되기 어려운 영적 과제였는데 너무 아름답다. 너무 고귀하다. 1년에 세 차례 명절 때마다 수도 예루살렘에 모여 함께 동거하며 즐거운 축제를 즐기는 민족, 각 지방에 흩어져 살던 사람들이 다 한곳으로 몰려와 함께 머물며 교제한다. 목적이 같은 사람들이라 금방 친해진다. 다윗은 예루살렘 궁전에서 창밖을 내다보다 광장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의 축제적 사귐의 풍경을 보면서 시상이 떠올라 이 노래를 불렀다. 1절을 유진 피터슨(Eugene H. Peterson)이 바꿔서 소개한 메시지 성경(Message) 버전으로 읽어 본다. “얼마나 멋진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형제자매들이 어울려 지내는 모습!”

그저 ‘가정의 화합’을 노래한 게 아니다. 대제사장 아론의 대관식이 언급되고, 시온의 복이 언급되는 것을 보면 이스라엘 공동체에 대한 감탄이다. 순례자가 먼 길을 힘들게 걸어 예루살렘 성전에 도착했다. 보고 만지는 성전의 모든 것들이 다 너무 성스럽고 아름답다. 성전은 이미 많은 순례자로 북적이고 있다. 한쪽에서는 제사의 향이 오르고, 다른 쪽에서는 삼삼오오 둘러앉아 화목제물을 나눠먹는다. 열두 지파가 다 골고루 모였다. 이스라엘의 이름으로 모인 형제자매들, 그들이 연합하여 예배를 드린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는 예배

다윗은 성도들의 연합과 모임의 아름다움을 두 개의 상징어로 감격했는데 먼저는 ‘기름’이다.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의 옷깃까지 내림 같고”(2절). 다윗은 그 기름을 ‘보배로운 기름’(precious oil)이라 했다. 제사장 임명식을 연상한 다윗, 아론이 제사장으로 안수받을 때 머리에 부어진 기름이 수염을 타고 허리춤까지, 옷깃까지 흘러내려오는 광경을 연상하며 감탄한다. 향기가 진동하고 빛이 나는 영광스러운 모습이다.

기름은 성령의 임재, 성령 강림의 상징, 제사장이 되는 사람의 머리에 기름을 붓는 것은 성령의 능력과 은사가 임하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상징한다. 기독교 초기에 120명의 성도들이 마가 다락방에 모여 기도하며 교제할 때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었다. 죄를 씻고, 거룩한 자 되게 하는 성령의 기름 부으심, 사도행전에 보면 성령 강림과 기름 부으심은 언제나 성도들이 모일 때 이루어졌다. 사마리아 성읍에도 그랬고, 고넬료의 집에서도 그랬고, 아볼로의 집에서도, 안디옥 교회에서도 함께 모여 기도할 때 성령이 임하셨다. 가족들이 함께 모여 동거할 때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기를 바란다. 또 성도들이 함께 모여 교제할 때도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기를 바란다.

성경에서 기름 부음은 사랑의 표현이며 축복의 사인이자 권위의 상징이었다. 기름은 상처나 염증의 치료제와 감염 예방제, 그래서 목자는 양떼를 위해 아마유와 유향을 섞은 기름을 준비해 수시로 양의 머리에 발라준다. 성령의 기름 부으심으로 예배 중에 낫는 역사, 회복되는 역사가 일어나기 바란다. 그리고 중동엔 손님을 초대하면 머리에 기름을 발라주는 관습이 있었다. 먼지가 많은 지역이기에 기름을 바르면 먼지가 씻기고 윤기가 나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귀한 분으로 인정하고 정중하게 환영한다는 뜻이다. 구약에서 왕과 선지자, 그리고 제사장에게 기름을 붓는 것은 권위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인정’을 의미했다.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예배, 죄인이 아니라 의인이다. 천덕꾸러기가 아니라 사랑받는 하나님의 자녀다. 나를 인정해주시는 예배, 그래서 행복한 이 시간이 되기 바란다.

예수님이 시몬이란 바리새인의 집에서 식사하실 때 마리아가 향유 옥합을 깨뜨려 예수님께 부어드린 건 사랑의 표시였다. 시몬은 못마땅해 했고, 가룟유다는 비싼 향유를 낭비했다고 마리아를 나무랐지만 예수님은 손님을 초청하고도 입 맞추지 않고 발 씻을 물도 주지 않았으며,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않았다고 시몬을 책망하셨고, 가룟유다보다 마리아의 편을 들며 칭찬하셨다.

마태와 마가는 마리아가 예수님의 머리에 기름을 부었다고 했고, 요한은 예수님의 발에 부었다고 했는데 머리와 발 두 곳에 다 부었을 수도 있고, 머리에 부은 것이 발로 흘러내렸을 수도 있다. 머리에 기름을 부었다면 “당신은 나의 왕이십니다”라는 고백으로 보고, 발에 기름을 부었다면 “당신의 종입니다”라는 고백으로 보면 된다. 기름 부으심이 있든 기름을 부어드리든 둘 다 은혜, 우리 예배가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는 예배 되기 바란다.

영생의 복이 이슬처럼 임한 예배

더 나아가서 다윗은 성도들이 예루살렘 광장에 함께 모여 연합하는 아름다움을 두 개의 상징어를 쓰며 감격했다고 했는데 ‘기름’에 이어 두 번째는 ‘새벽이슬’이다.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3절), 축복의 광경을 산 정상에서 내려오는 아침 이슬(dew)로 묘사했다. 이스라엘, 시리아, 레바논 세 나라 국경이 맞물려 물 확보를 위한 3개국의 각축장이 되기도 하는 헬몬 산의 이슬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은 양, 그 ‘이슬’이 은혜와 축복, 생명의 상징이다. 모세가 죽기 전에 요셉 자손을 축복할 때 이슬을 ‘하늘의 보물’(신33:13)로 표현하기까지 했다.

다윗은 ‘내려온다’는 단어를 3번이나 반복한다. 이스라엘 북쪽에 있는 3,000m 가까운 이스라엘에서 가장 높은 산인 헐몬 산, 산이 높아서 산머리에 1년 내내 눈이 쌓인 산(‘눈의 산’이라 아랍어로 ‘예벨 엘 탈리’와 ‘잿빛 머리털의 산’이라고 ‘에벨 엘-세이크’로 불린다), 그 물이 요단강의 수원지가 되고, 갈릴리 호수, 사해로 흘러 들어간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산에서 부는 바람을 타고 이스라엘 전역에 이슬이 뿌려진다고 믿었다. 이스라엘의 연평균 강수량은 500-800mm에 불과하지만 이슬량은 연간 200mm, 이 소리 없이 내리는 이슬을 먹고 주변 땅이 옥토가 되고, 모든 동식물이 생명을 유지하며 번성한다.

물이 있는 곳에 생명이 자라듯 형제자매가 연합하여 예배하는 곳에 생명의 역사가 일어난다. 생명의 풍성함! 홀로는 이루어지지 않는 것, 홀로 있는 생명은 외롭다. 우리 교회가 소재한 미추홀구에 1인 가구가 45%나 된다는데 장작도 혼자면 곧 꺼진다. 함께 있어야 활활 타오르는 생명, 그러므로 왕따나 소외나 차별은 나쁜 것, 죄악이다. 『장자』에 ‘학 다리가 길다고 자르지 말라’는 말이 있다. 긴 데는 이유가 있고, 나름의 쓸모가 있는 것, 연약한 지체를 공격하고 제거하면 결국 공동체 전체가 죽고 만다. 우리나라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상 아닌가?

마음에 안 든다고 자르고, 배신자라고 따돌리고, 말 안 듣는다고 제거하려는 온갖 악행들, 그 죄악들이 나라를 어지럽게 하고 있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인간 최초의 죄가 하나님을 피해 나무 뒤에 숨어 하나님과 결별(separation)한 것이었다는 것, 두 번째 죄 역시 가인이 아벨을 시기하고 질투하여 죽음의 결별을 맞이한 것이다. 결별에는 은혜 없다. 그저 관계가 깨진 거다. 장작이 모여야 잘 타듯, 성도들이 열심히 잘 모이는 교회라야 은혜가 넘친다.

모이라. 모이는 일에 열심을 품으라. 소그룹 모임이 살아야 한다. 교회학교도 잘 모여야 부흥한다. 한마음으로 모여 연합하면 하늘의 은혜가 헐몬 산의 아침이슬처럼 내려올 거다. 메마른 황무지에도 살아나는 생명의 축제가 벌어질 거다.

다윗은 성도의 연합과 교제, 이 축제를 두 개의 큰 주제로 노래하고 있다. 연합의 아름다움(beauty of unity)과 연합의 축복(blessing of unity)이다. 한마음 한뜻으로 즐겁게 잘 모이면 하나님이 아름답게 보신다는 것(1절), 그래서 풍성한 축복을 아침이슬 내리듯 부어주신다는 것, 이게 곧 영생의 복인데 3절에 보면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거기는 시온이고, 오늘날의 시온은 교회다. 교회를 중심으로 연합하면 하나님이 복 주신다. 다윗은 ‘여호와께서 복을 명령하셨다’고 한다. 히브리어로 ‘올람’(עולם), ‘끊어지지 않는 영원한 삶’, 헬라어 70인역 성경은 ‘조에 아이오노스’(ζωη αιωνος)로 번역했는데, 이는 요한복음의 ‘영생’이라는 단어와 동일하다.

아직도 죽어서 가는 곳이 천국이라고 생각하나? 안 된다. 천국, 곧 영생은 이생과 저생에서 누리는 것, 이 땅에서도 누려야 한다. 서로 다툼이 없는 화목한 공동체, 연합이 잘 이루어지는 그곳이 바로 천국, 먹을 것을 차별 없이 나누고, 각자가 자기의 역할을 하며 그 역할의 소중함을 자기나 다른 사람이 인정해주는 공동체, 좀 부족해도 서로가 만족하며 격려하는 곳, 서로 사랑으로 돌보고 짐을 나누어지는 관계 중심의 사랑의 공동체라면 그곳이 바로 천국이다.

천국을 사는 행복, 이래도 이 다음에 천국 가서 누릴 건가? 이 땅에서부터 누리라. 오늘 예배에서도 누리고, 예배 후에도 누리라. 바쁜 일정을 멈추고 하나님의 보좌를 향해 발걸음을 내딛는 예배자들, 함께 모여 예배하는 예배자들 위에 세상 풍파 잘 이기고, 본문의 영생의 복이 흘러넘치기를 축복한다.

인천신기중앙교회 담임 이희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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