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성전에 이르렀다. 시편 132편은 초막절과 성전 봉헌을 겸한 예식에 참여하는 순간을 떠올리게 하는 노래다. 순례자가 여호와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 앞에 엎드려 예배하는 감격을 누린다. 순례 여정과 연속선상에 있는 감격, 이 순간을 생각하지 않았다면 순례는 방랑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예배를 드린 것, 20세기 최고의 신학자인 칼·바르트(Karl Barth)는 예배를 “가장 중요하고, 가장 긴급하고, 가장 영광스러운 것”이라 했다. 그리고 성경에 보면 주요 인물들이 하나같이 예배에 목숨을 건 사람들이었다.
그만큼 중요한 예배를 다룬 132편, 다윗과 솔로몬의 이야기가 겹쳐있는, 순례자의 노래 중 가장 긴 시다. 대부분이 8절 이내이고, 길어야 9절, 그리고 3절의 짧은 시편도 3개나 되는데 18절, 매우 길다.
15개의 순례자의 노래는 층계송으로 유명하다. 성전 여인의 뜰에서 이스라엘과 제사장의 뜰로 올라가는 곳에 있는 미문(일명 Nicanor Gate)으로 오르는 층계가 15개인데, 120편부터 한층 씩 오르거나 내리며 이 시편들을 낭송했다는 거다. 만일 이게 사실이면 열세 번째 계단에서는 아마 정체 현상이 있었을 것이다. 내용도 길지만 성전에 도착한 예배자의 감격을 다루고 있기 때문이다. 시편 132편을 “예배자가 부른 감격의 노래”라는 제목으로 불러 본다.
하나님을 위한 예배
역대상에 보면, “이 성전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요,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것이라. 내가 이미 내 하나님의 성전을 위하여 힘을 다하여 준비하였나니”(대상29:1-2)라는 말씀이 나온다. 법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겼던 다윗이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을 위한 성전 건축을 가장 우선할 숙원사업으로 생각하고, 건축에 필요한 모든 자료와 기금을 다 준비했다는 말씀이다.
하지만 다윗의 소원인 성전 건축을 하나님이 허락하시지 않는다. 이유는 다윗이 손에 피를 많이 흘렸기 때문이라 한다(대상22:7-8), 통일왕국을 세우는 과정에서 정적 제거와 전쟁으로 피를 많이 흘린 것 때문에 안 된다는 거다.
이해가 되나? 다윗은 최고의 정적 사울 왕을 죽일 기회가 몇 번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죽이지 않았고, 자기를 저주한 시므이 같은 사람도 죽이지 않았다. 그런데도 예배의 사람 다윗의 소원이라면 “너무 좋지”가 아니라 피를 많이 흘렀다며 “No”? 하나님의 건수 잡기일까? 출애굽의 영웅 모세가 가나안에 들어가지 못한 것과 같은 맥락, 물론 억지처럼 보이는 하나님의 거절에 당황할 이유는 없다. 왜냐하면 다윗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이 변함없기 때문이다. 다만 하나님의 거절은 다윗이 모든 영광을 다 누려서는 안 된다는 뜻이 담긴 것 같다. 인간의 심성을 너무 잘 아시는 하나님, 하나님은 다윗이 교만해지는 걸 원치 않으셨다. 고대 사회에서 대체로 왕들은 거의 모든 것을 다 마음대로 할 수 있었는데 이스라엘의 왕이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 하나님은 다윗이 왕이지만 겸손한 예배자가 되기를 원하셨다.
결국 성전은 다윗의 아들 솔로몬 때 건축된다. 그런데 역사서나 시편을 비롯한 성경은 성전을 솔로몬의 성전이 아니라 다윗의 성전으로 인정하는 분위기다. 솔로몬은 다윗이 다 준비해 놓은 것을 그저 집행한 사람일 뿐이라는 거다. 성전과 관련한 축복도 다윗에게 주어진다. “네 자손이 내 언약과 그들에게 교훈하는 내 증거를 지킬진대 그들의 후손도 영원히 네 왕위에 앉으리라 하셨도다”(12절)라는 시인의 노래나 “그는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을 건축할 것이요 나는 그의 나라 왕위를 영원히 견고하게 하리라”(삼하7:13)는 사무엘서 말씀을 보라. 다윗의 언약이 다윗 대에 주어졌다.
다윗은 성전 건축의 주인공이자 1등 공신이다. 그리고 여기서 우리는 다윗의 준비를 잘한 것도 주목해야 하지만 그보다 성전을 향한 그의 마음을 봐야 하는데 132편에도 성전을 향한 그의 사랑과 열정이 잘 나타난다. “여호와여 다윗을 위하여 그의 모든 겸손을 기억하소서” 이게 시작이다. 그리고 “내 침상에 오르지 아니했고, 내 눈으로 잠들게 하지 아니하였다”(3-4절), 주님은 집도 없이 떠도시는데 자기는 편안한 침상에서 잠을 잘 수 없다는 것, 그만큼 하나님을 위해 성전을 지어드려야겠다는 열망이 대단했다.
이거다. 이게 바로 예배자의 자세다.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요,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성전”, ‘여호와의 처소’(5절), ‘그의 발등상’(7절), ‘자기 거처’(13절), ‘나의 영원히 쉴 곳’(14절)이라고 표현한 성전, 그 성전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위하여 예배드리는 것이 소원이었다. “우리가 그의 계신 곳으로 들어가서 그의 발등상 앞에서 엎드려 예배하리로다”(7절). 다윗의 예배에 대한 간절한 소원이 우리의 소원 되기 바란다.
기쁨이 넘치는 예배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권능의 궤와 함께 평안한 곳으로 들어가소서”(8절), 성전 건축을 완성한 솔로몬이 감격하며 “하나님, 건축이 끝났으니 당신의 법궤와 함께 평안하게 성전으로 들어가소서” 그러는 거다. 솔로몬이 하나님을 성전 안에 가두고 싶었을까? 아니다. 그럼 하나님은 성전에만 계시는 분이라는 뜻인가? 그것도 아니다. 솔로몬의 기도 내용을 보면, “하나님이 참으로 사람과 함께 땅에 계시리이까 보소서 하늘과 하늘들의 하늘이라도 주를 용납지 못하겠거든 하물며 내가 건축한 이 성전이오리이까”(대하6:18), 잘 지었지만 하나님을 모시기에는 너무 좁다는 거다.
그런데도 솔로몬은 본문에서 “평안한 성전으로 들어가소서”라고 기도했다. 그 뜻은 “하늘은 나의 보좌요 땅은 나의 발판이니 너희가 나를 위하여 무슨 집을 지으랴 내가 안식할 처소가 어디랴 나 여호와가 말하노라 내 손이 이 모든 것을 지었으므로 그들이 생겼느니라 무릇 마음이 가난하고 심령에 통회하며 나의 말을 듣고 떠는 자 그 사람은 내가 돌보려니와”(사66:1-2), 하나님은 사람이 지은 성전에 거할 수 없다고 하시며 “내가 거할 곳은 심령이 가난한 자, 마음에 통회하는 자, 나의 말을 두렵고 떨림으로 받는 자, 그 속에 내가 거하며 내가 그들을 돌보겠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에 거하기를 원하신다. 그렇다면 솔로몬의 “일어나사 평안한 곳으로 들어가소서”는 “하나님, 제 마음의 문을 여오니 제 속에 들어오셔서 제 마음 중심에 좌정하소서” 이렇게 적용하면 된다.
솔로몬은 지금 감격하고 있다. 성전을 완공하고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것이 너무 감사하기 때문이다. 드디어 선친 다윗의 기대대로 법궤가 여기저기 옮겨다니지 않고 한 곳에서 여호와의 임재를 경험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기쁨은 포로지에서 해방된 귀환 공동체도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예배드릴 때 8절을 사용하며 누린 감격이었을 것이다. “여호와여 일어나사 주의 권능의 궤와 함께 평안한 곳으로 들어가소서” 여기서 ‘여호와여 일어나사’는 히브리어로 ‘쿰마 야훼’(קוּמָה יְהוָה), 광야에서 행군을 시작할 때 신호로 쓰였던 외침, 지금은 너무 좋아서 외치는 찬양이다.
아버지 다윗 왕이 법궤를 모실 때 너무 좋아서 온 이스라엘 족속들과 함께 누렸던 기쁨과 흡사하다. 사무엘하서에 보면 그때 다윗은 여호와 앞에서 힘을 다하여 춤을 춘다(삼하6:14-15). 아마 전통춤으로 시작했다가 막춤으로 발전했을 거다. 그래서 미갈이 족보에도 없는 그 춤을 보고 심중에 다윗을 업신여겼다. 다윗은 온 이스라엘 족속과 함께 즐거이 환호하고 나팔을 불며 여호와의 궤를 모셨다. 얼마나 힘을 다하여 춤을 추었으면 아랫도리가 다 내려가 알몸이 되기까지 했을까? 그런데 기억하라. 이게 바로 예배다. 품위있는 예배가 중요한 게 아니라 예배는 감격이어야 한다.
미갈은 다윗 왕에게 “방탕한 자가 염치없이 자기 몸을 드러내는 것처럼 계집종 눈앞에서 몸을 드러내셨다”며 핀잔을 주지만 예배는 기쁨으로, 그것도 넘치는 기쁨으로 드려야 한다. 다윗이 그랬다. “이는 여호와 앞에서 한 것이니라 그가 네 아버지와 그의 온 집을 버리시고 나를 택하사 나를 여호와의 백성 이스라엘의 주권자로 삼으셨으니 내가 여호와 앞에서 뛰놀리라 내가 이보다 더 낮아져서 스스로 천하게 보일지라도 네가 말한 바 계집종에게는 내가 높임을 받으리라”(삼하6:21-22), 핀잔을 듣고도 “난 괜찮아”(That’s OK), 더 낮아지고 천해 보여도 “난 괜찮아” 그런 거다. 반면에 남의 예배를 함부로 말한 미갈은 어떻게 되나? “그러므로 사울의 딸 미갈이 죽는 날까지 그에게 자식이 없으니라”(삼하6:23), 하나님의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고, 예배를 함부로 판단하면 안 된다는 강력한 경고였다.
132편 시에서도 key word 중 하나가 ‘즐거이’다. 9절과 16절에서 “주의 성도들은 즐거이 외칠지어다” 반복해서 선포했다. 대상 29장에서 다윗과 백성들이 성전을 위해 예물을 드리는 모습을 보면 “자원하여, 힘을 다하여, 즐거이”, 그들은 예물 드리는 게 즐거웠다. 여러 번 그런 모습이 보이지만 17절을 보면, “내가 정직한 마음으로 이 모든 것을 즐거이 드렸사오며, 이제 내가 또 여기 있는 주의 백성이 주께 즐거이 드리는 것을 보오니 심히 기쁘도소이다” 헌금은 기쁨으로 드려야 한다. 억지로 하지 말고, 마지 못해 하지 말고 기쁨으로!!! 이 말에 은혜 받고 “나 지금 안 기쁘니 안 드려도 되네”가 아니라 드리는 게 기쁨 되어 더 많이 드리고 싶다는 소원을 가져보라. 그게 복된 인생 되는 비결이다.
그리고 9절에 보면, “주의 제사장들은 의를 옷 입고 주의 성도들은 즐거이 외칠지어다”, 솔로몬은 제사장은 물론 모든 주의 성도들과 함께 기쁨을 누리고 싶다. 개인 예배나 코로나 이후에 나타나는 현상인 온라인 예배와 현장에서 성도들과 함께 드리는 예배는 차이가 많다. 가족들과 함께, 그것도 앞자리에 앉아 기쁨으로 예배하는 행복한 예배자가 되기 바란다.
약속 믿고 기다리는 예배
아버님을 모시고 사는 어느 교회 담임목사님은 예배 시간마다 앞자리에 앉으시는 아버님이 거의 예배 때마다 주무셔서 교인들에게 너무 민망해 고민하다가 초등학생인 어린 아들에게 할아버지 옆에 앉았다가 주무시면 깨워드리라고, 그러면 한주에 천 원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몇 주간 통했다. 그런데 어느 주일에 아버님이 또 주무시는데, 아들이 깨우지 않아 저녁에 화를 내며 다그쳤다. “왜 약속 안 지키니?” “할아버지하고 약속했기 때문이야” “무슨 약속?” “할아버지가 안 깨우면 2천원 주시기로 했거든”. 약속에도 더 좋은 약속이 있다.
예배하던 시인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한 다윗과 맺은 하나님의 언약을 생각한다. ‘다윗의 언약’, 시인이 그 언약에 근거해 축복 베푸시길 기대한 거다. “여호와께서 다윗에게 성실히 맹세하셨으니 변치 아니하실지라 이르시기를 네 몸의 소생을 네 위에 둘지라 네 자손이 내 언약과 저희에게 교훈하는 내 증거를 지킬진대 저희 후손도 영원히 네 위에 앉으리라 하셨도다”(11-12절), 다윗 왕조를 영원히 견고케 하시겠다는 약속! 그 약속을 믿는다는 거다.
하나님과 이스라엘 사이에 맺은 언약은 크게 둘이었다. 시내산 언약과 다윗의 언약, 시내산 언약은 이스라엘이 율법을 지키면 복을 받게 하겠다는 언약이다. 율법을 지키면 하나님이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셔서 보호하신다는 것, 선지자들은 이 시내산 언약을 근거로 축복과 저주를 선포했다. 대표적인 것이 신명기 28장일 것이다.
반면에 다윗의 언약은 왕이 잘되면 백성도 잘되는 것, 이름은 다윗의 언약이지만 사실 이스라엘을 향한 축복이다. 다윗 왕조가 영원히 이어지도록 하겠다는 약속, 12절에 “교훈과 증거를 지킬진대”라고 했지만 여기에 초점이 있는 게 아니다. “네 집과 네 나라가 네 앞에서 영원히 보전되고 네 위가 영원히 견고하리라”(삼하7:16). 시내산 언약이 조건부 언약이라면 다윗의 언약은 무조건적 언약, 아무 조건 없이 무조건 지키고 보호하겠다는 일방적 약속이다.
그래서 쿠데타의 연속이었던 북왕국 이스라엘에 비해 남왕국 유다는 다윗 단일 왕조가 유지되었다. 바벨론 포로기나, 이후 왕위에 끊겼을 때 그들은 다윗의 언약에 근거해 기도했다. “다윗 왕조를 영원히 견고케 하신다는 약속을 믿습니다. 속히 회복케 하여 주옵소서”.
10절과 17절의 ‘주의 기름 받은 자’는 히브리어로 ‘메시야’, 순례자들은 예배 중에 메시아 신앙이 생긴다. 위기 때마다 다윗과 같은 메시아를 기다린 거다. 기억하라. 신앙은 기다림, 예배도 주님의 임재를 기다림으로부터 시작된다.
재미있는 것은 11-18절까지의 내용이 1-10절까지의 내용과 대칭을 이룬다는 거다.
그리고 15-18절까지 나오는 ‘내가’는 하나님이시다. “내가 이 성의 식료품에 풍족히 복을 주고 양식으로 그 빈민을 만족케 하리로다”(15절), 하나님이 우리 미래를 책임지신다는 말씀이다. 나라가 어지럽다. 법이 무너진 느낌, 이럴 때일수록 예배에 집중하기 바란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내가 그의 원수에게는 수치를 옷 입히고 그에게는 왕관이 빛나게 하리라”(18절)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우리를 공격하는 원수들은 수치를 당하고, 우리에게는 다윗의 모든 축복이 함께하는 것, 우리 머리에는 빛나는 왕관이 있다. 기억하라. 우리는 거룩한 예배자! 우리의 미래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다. 그래서 예배 성공이 곧 인생 성공, 예배에 집중하라. 그러면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경멸하리라”(삼상2:30)는 말씀대로 될 것이다. 예배가 기쁨 되시길 축복한다.
인천신기중앙교회 담임 이희우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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