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 6장 10절
주전 605년 아브라함의 후손인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은 지금 머나 먼 이방 땅 바벨론의 포로로 끌려와 있습니다. 도대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요? 그 이유를 성경은 이렇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1 유다 왕 여호야김이 다스린 지 삼 년이 되는 해에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 이르러 성을 에워쌌더니 2주께서 유다 왕 여호야김과 하나님의 전 그릇 얼마를 그의 손에 넘기시매 그가 그것을 가지고 시날 땅 자기 신들의 신전에 가져다가 그 신들의 보물 창고에 두었더라 (단1:1-2)
이스라엘에게 일어난 이 모든 일들은 바로 주께서 하신 일들이었습니다. 바벨론이 예루살렘을 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치신 것입니다. 바벨론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치기위해 사용하신 몽둥이에 불과했던 것입니다.
이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은, 공중에 나는 새 한 마리가 땅에 떨어지는 일부터 한 나라의 흥망성쇠에 이르기까지, 모두 다하나님께서 친히 행하고 계시는 일들입니다.
주의 명령이 아니면 누가 이것을 능히 말하여 이루게 할 수 있으랴. 화와 복이 지존자의 입으로부터 나오지 아니하느냐 (애3:37-38)
나는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들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 (사45:7)
그렇다면, 하나님께서는 왜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복이 아닌 화를 허락하시고, 빛이 아닌 어둠을, 평안이 아닌 환난을 허락하시는 것일까요?
오직 하나님 한 분만이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시며, 평안도 짓과 환난도 창조하실 수 있는 유일한 주권자이심을 가르쳐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해 뜨는 곳에서든지 지는 곳에서든지 나밖에 다른 이가 없는 줄을 알게 하리라. 나는 여호와라. 다른 이가 없느니라. (사45:6)
바로 이 진리를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가르쳐 주시기 위한 것입니다. 바꿔 말하면, 하나님께서 하나님의 백성들을 바벨론이라는 몽둥이로 치고 계신 이유는, 하나님의 백성들이 모든 화와 복을 주관하고 계시며, 빛과 어둠, 평안과 환난을 다스리고 계시는 만군의 하나님의 주권을 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 환란으로부터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길은 아주 단순합니다. 그리고 유일합니다. 그것은 바로 여호와 하나님의 주권을 다시 기억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외에는 다른 신이 없으며, 오직 하나님만이 빛과 어둠의 창조자요, 개인과 민족의 생사 그리고 화복의 주관자이심을 다시 기억하는 것입니다.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임한 환난 속에 바로 그와 같은 하나님의 뜻이 담겨져 있음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 모든 환란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환난이며, 이 환난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재앙을 주시기 위한 환난이 아니라, 미래와 소망을 주시기 위한, 하나님의 뜻 가운에 있는 환난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그와 같은 환난 속에서 한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바로 “뜻을 정하는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그 뜻은 어떤 뜻이었습니까? 바벨론 왕이 하사하는 음식과 포도주로 자신을 더럽히지 않겠다는 뜻이었습니다.
바벨론 사람들이 먹는 음식들에는 돼지고기, 산토끼, 물고기들이 있었는데, 이것들은 레위기에 규정된 모세의 율법에서 부정한 음식으로 규정된 음식들이었습니다. 또한 느부갓네살은 자기가 섬기는 신 벨므로닥에게 헌주를 바쳤고, 음식도 일부를 따로 떼어 놓아 벨므로닥에게 제물로 바쳤습니다. 그래서 다니엘과 그의 세 친구들은 왕이 마시는 포도주와 음식들을 먹지 않기로 뜻을 정한 것입니다.
물론 이와 같은 결정은 다니엘과 그 세 친구들의 출세길은 물론, 그들의 안전까지도 위협할 수 있는 매우 위험한 결정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뜻을 정했습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은 없다.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의 생과 사, 화와 복을 주관하시는 우리의 유일한 왕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하나님만을 예배한다”는 뜻을 정한 것입니다.
그와 같은 뜻을 정하고 나자 하나님은 다니엘로 하여금 환관장에게 은혜와 긍휼을 얻게 하셨습니다. 열흘 후에 그들의 얼굴은 더욱 아름답고 윤택하여 왕의 음식을 먹는 다른 소년들보다도 더 좋아 보이게 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께서는 이 네 소년에게 학문을 주시고 모든 서적을 깨닫게 하시고 지혜를 주셔서 모든 환상과 꿈을 깨달아 알 수 있는 지혜와 총명을 주셨는데, 그들의 지혜와 총명은 온 나라 지혜자들보다 열 배나 더 탁월한 지혜와 총명이었습니다.
여러분의 삶에 어둠이 찾아왔습니까? 이 나라 이 민족 가운데 환난이 찾아왔습니까? 하나님 외에 다른 왕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빛도 짓고 어둠도 창조하시며, 평안과 환난을 창조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 스스로 그 어둠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 하는 것이 아닙니다. 환난을 피하기 위해 도망치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로 “뜻을 정하는 일”입니다. 하나님 외에 다른 신이 없음을 인정하고, 그 하나님만을 예배하기로 뜻을 정하는 것입니다. 그것만이 이 모든 어둠과 환난으로부터 구원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배란 무엇입니까? 예배란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올바른 반응입니다.
인간은 반응하는 존재입니다.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행복하고, 맛없는 음식을 먹으면 뱉어냅니다. 인간은 더러운 것을 보면 피하게 되어 있고, 아름다운 것을 보면 환호를 하게 되어 있습니다. 이처럼 인간은 반응하는 존재입니다.
하물며 인간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게 된다면, 하나님의 그 거룩하심을 맛보게 된다면, 인간은 어떤 반응을 보이게 될까요? 그 거룩하신 하나님 외에 다른 것이 눈에 보일까요? 이 세상의 군왕들과 관원들의 권세가 눈에 들어올까요? 그 거룩하신 하나님 외에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도대체 무엇이 있을까요?
바로 그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합당한 반응이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예배의 시작은 거룩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아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거룩하신 하나님은 도대체 어떤 분이십니까?
“거룩하신 이가 이르시되 그런즉 너희가 나를 누구에게 비교하여 나를 그와 동등하게 하겠느냐 하시니라.” (사40:25)
이 세상에는 하나님과 동등하게 비교할 수 있는 존재가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거룩하심”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하나님이 거룩하신 하나님이라는 사실은 이 세상에 아무리 좋은 것이 있어도 하나님은 그것보다 “더 좋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에 아무리 강력한 것이 있어도 하나님은 그것보다 “더 강력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에 아무리 선한 것이 있어도, 아무리 지혜로운 분이 있어도, 이 세상에 아무리 높은 분이 있어도, 하나님은 그 모든 것들보다 “더 선하시고, 더 지혜로우시고, 더 높으신 분”이라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이 세상에서 우리 하나님이 “최고”라는 사실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바로 거룩하신 하나님의 의미입니다. 바로 이 사실을 아는 것으로부터 우리의 참된 예배는 시작됩니다.
두 번째로 알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 거룩하신 하나님, 지존하신 하나님이 나와 항상 함께 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은, 천지를 창조하신 주권자 하나님이 항상 우리와 함께하고 계신다는 사실에 대한 약속으로 가득합니다.
6. 너희는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 앞에서 떨지 말라 이는 네 하나님 여호와 그가 너와 함께 가시며 결코 너를 떠나지 아니하시며 버리지 아니하실 것임이라 (신31:6)
2.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너와 함께 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하지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지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사43:2)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시23:4)
10. 두려워하지 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라 놀라지 말라 나는 네 하나님이 됨이라 내가 너를 굳세게 하리라 참으로 너를 도와 주리라 참으로 나의 의로운 오른손으로 너를 붙들리라 (사41:10)
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28:20)
내가 어떤 상황 가운데 있든지 간에,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나와 함께 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자신의 마음으로 인정하는 것. 바로 그와 같은 마음이 거룩하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마음이요, 그와 같은 마음으로부터 참된 예배는 시작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해 우리가 알아야 할 한 가지 사실이 더 남아 있습니다. 그 거룩하고 지존하신 하나님은 “내 안에” 나와 함께 하고 계신다는 사실입니다.
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리니
17. 그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그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그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그를 아나니 그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요14:16-17)
그 누구와도, 그 무엇과도 동등되이 여김을 받으실 수 없는 지존하신 하나님은 내 마음 안에서 나와 항상 함께 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이와 같은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올바른 반응은 무엇입니까?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합당한 예배는 어떤 것이어야 하겠습니까? 거룩하신 하나님만을 예배하기 위해 우리는 오늘 어떤 뜻을 정해야겠습니까?
우리와 항상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항상 의식하며 살아가기로 뜻을 정해야 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이 항상 내 안에 나와 함께 하고 계심을 인정한다면, 우리는 항상 그 하나님을 의식하며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우리의 올바른 반응이요, 예배입니다.
세상에 가장 모멸감을 느끼게 되는 일 가운데 하나가 바로 “투명 인간” 취급을 받는 일입니다. 사람이 있는데 없는 사람 취급을 하는 것처럼 모욕감을 느끼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하물며 지극히 높으신 거룩하신 하나님이 항상 내 안에 나와 함께 하고 계시는데, 우리가 만약 그 하나님을 항상 의식하지 않고 살아간다면, 그보다 하나님을 경멸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여러분이 혼자 있던 공간 안에 어떤 사람이 들어오게 되면, 그 사람을 의식하게 될 것입니다. 나의 마음 안에 나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함께 하고 계심을 인정하는 사람은 내 마음 안에 계신 하나님을 항상 “의식”하며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지금 나의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 나의 생각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 나의 입술과 나의 모든 눈과 손과 발이 하고 있는 모든 일들을 다 보고 계시고 듣고 계신다는 사실을 “의식”하며 살아가게 되어 있습니다.
이와 같은 마음을 다른 말로 “여호와를 경외하는 마음”이라고 부릅니다. 이처럼 만군의 여호와께서 내 마음 속에서 항상 나와함께 하고 계심을 인정하는 사람은 항상 나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에 대한 “경건한 두려움”을 갖고 살아가게 됩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말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행동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생각하게 됩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건한 두려움이 나의 삶을 제어하게 됩니다.
14.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구속자이신 여호와여 내 입의 말과 마음의 묵상이 주님 앞에 열납되기를 원하나이다 (시19:14)
16.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17.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고전3:16-17)
이처럼 거룩하신 하나님이 내 안에서 나와 항상 함께 하고 계심을 인정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시선과 하나님의 임재를 의식하며, 항상 하나님에 대한 “경건한 두려움”을 갖고 살아가게 되는데, 우리가 이와 같은 하나님에 대한 두려운 마음을 경건한 두려움이라고 표현하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 외에 다른 모든 것들에 대한 두려움을 소멸시켜 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향한 경건한 두려움은 하나님 외에 다른 그 어떤 것도 두려워할 필요가 없음을 인정하는 두려움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두려움을 경건한 두려움이라고 표현하는 것이고, 성경은 이와 같은 두려움이 모든 지혜의 시작이요, 모든 형통의 출발점이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항상 내 안에서 나와 함께 하시는 거룩하신 하나님을 의식하며, 그 거룩하신 하나님에 대한 경건한 두려움을 갖고 살아가는 사람은 어떤 상황 속에서도 흔들림이 없습니다. 흔들림이 없이 하나님만을 예배합니다. 하나님만을 의식합니다.
다니엘은 바로 그와 같은 뜻을 정한 것입니다. 페르시아 제국의 다리오 왕은 다니엘을 시샘하는 총리와 관원들의 요청으로 삼십일 동안 다리오 왕 외의 어떤 신에게나 사람에게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하는 사람을 사자 굴에 던져 넣는 법률안에 서명을 하게 됩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이 조서에 왕의 직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는 윗방에 올라가 예루살렘으로 향한 창문을 열고 “전에 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거룩하신 하나님, 지존하신 여호와 하나님을 향하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바로 이것이 다니엘이 정한 뜻이었습니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오늘 저와 여러분들이 정해야 할 뜻입니다.
이와 같은 뜻을 정하였을 때 하나님은 어떤 일을 행하셨습니까?
21. 다니엘이 왕에게 아뢰되 왕이여 원하건대 왕은 만수무강 하옵소서
22. 나의 하나님이 이미 그의 천사를 보내어 사자들의 입을 봉하셨으므로 사자들이 나를 상해하지 못하였사오니 이는 나의 무죄함이 그 앞에 명백함이오며 또 왕이여 나는 왕에게도 해를 끼치지 아니하였나이다 하니라
23. 왕이 심히 기뻐서 명하여 다니엘을 굴에서 올리라 하매 그들이 다니엘을 굴에서 올린즉 그의 몸이 조금도 상하지 아니하였으니 이는 그가 자기의 하나님을 믿음이었더라 (단6:21-23)
그러자 다리오 왕은 즉시 다니엘을 참소한 사람들과 그들의 아내와 자식들까지 다 사자 굴에 집어 넣었고, 사자들은 그들이 굴에 들어오자마자 그 뼈까지도 다 부서뜨려 삼켜 버렸습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조서를 내립니다.
26. 내가 이제 조서를 내리노라 내 나라 관할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다 다니엘의 하나님 앞에서 떨며 두려워할지니 그는 살아 계시는 하나님이시요 영원히 변하지 않으실 이시며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아니할 것이요 그의 권세는 무궁할 것이며
27. 그는 구원도 하시며 건져내기도 하시며 하늘에서든지 땅에서든지 이적과 기사를 행하시는 이로서 다니엘을 구원하여 사자의 입에서 벗어나게 하셨음이라 하였더라
28. 이 다니엘이 다리오 왕의 시대와 바사 사람 고레스 왕의 시대에 형통하였더라 (단6:26-28)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17살 때부터 17년간 야쿠자에 몸을 담으면서 방탕한 생활을 거듭하다가 1985년 결혼한 한국인 부인 한금자씨의 간절한 기도를 통해 결국 예수님을 만나고 목사가 된 스즈키 히로유키 목사님이란 분이 계십니다. 이 분은 1992년 7명의 전직 야쿠자들과 함께 “미션 바라바”라고 하는 선교단체를 결성하게 됩니다. 이들은 한 때 야쿠자가 되기 위하여 자기의 새끼 손가락까지 칼로 잘라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랬던 그들이 지금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가 되었습니다. 온 몸에는 문신이 새겨져 있고, 이곳 저곳에 칼자국이 남아 있는 이 전직 야쿠자들의 찬양 소리가 얼마나 아름답고 은혜로운지. 그들의 찬양 소리가 그토록 아름답고 은혜로울 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
예수님을 예배하기 위해 자신의 새끼 손가락도 아까워 하지 않았던 사람들의 찬양이 어떻게 아름답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오른 눈을 뽑아내고, 오른 손을 잘라낸 사람들의 목소리가 어떻게 사람들의 영혼을 감동시키지 않을 수가 있겠어요?
예수님은 마지막 때를 살아가는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만일 네 오른 눈이 실족하게 하거든 오른 눈을 빼어내 버리고, 만일 네 오른 손이 너로 실족하게 하거든 그 손을 찍어내 버리는 한이 있더라도 너의 그 범죄한 오른 눈 때문에, 범죄한 너의 그 오른 손 때문에 천국에 들어오지 못하는 일은 없게 하라.”
여러분, 새끼 손가락을 포기해서라도 포기할 수 없는 것이 아니 포기 하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우리의 거룩하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오른 눈을 뽑아내는 한이 있더라도 포기할 수 없는 것, 아니 절대로 포기하지 말아야 할 것이 바로 거룩하신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입니다.
예배는 생명을 걸고 드려야 합니다. 우리가 생명을 걸고 예배를 드려야 하는 이유는 예배에 생명이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이 사자굴에 들어가더라도 지키고자 했던 것은 자신의 생명이 아니었습니다. 바로 예배였습니다. 왜냐하면 예배에 우리의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예배에 이 민족의 생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흔들림이 없는 예배로 사자굴을 이긴 다니엘. 이와 같은 예배자들이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은 예배자들을 통해 이 땅에 부흥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살기 위해 예배 하는 사람은 죽을 것입니다. 예배하기 위해 사는 사람만이 살게 될 것입니다.
6월 3일 대선을 앞두고 있습니다. 대선의 결과는 오직 우리 하나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그 결과가 우리가 기대했던 결과이든 아니든, 우리는 상관없이 항상 하던대로 우리의 여호와 하나님을 예배할 것입니다. 모든 일들을 합력하여 하나님의 선을 이루시는 여호와 하나님께 감사할 것입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리바이벌 코리아는 계속됩니다. 그리고 계속 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길 바랍니다.
우리 모두에게 힘과 능력을 주시고, 모든 필요들을 공급해 주시며, 사탄 마귀의 훼방과 방해로부터 우리를 지켜 주셔서, 한반도의 거룩한 영적 부흥이 일어날 때까지, 저 북한 땅의 우상숭배 체제가 무너지고 이 땅에 거룩한 통일이 임할 때까지, 아니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하던대로” 광장에서, 골방에서, 가정에서, 교회에서, 일터에서, 우리의 삶의 일상에서 지극히 높으신 여호와 하나님만을 예배하는 다니엘과 같이 뜻을 정한 예배자들이 일어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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