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룻기에 목숨을 건 여인이 등장한다. 룻이다. 귀향을 결심한 시어머니 나오미가 축복기도를 해주며 모압으로 돌아가 살길을 찾으라고 강권했지만 룻은 왠지 멋있어(?) 보이는 시어머니, 존경하며 늘 그 곁을 지켜야 할 롤모델로 보였는지 죽어도 같이 죽겠다며 시어머니를 따른다.
부귀영화는커녕 고생길이 열리는 것, 얼떨결에 짐 싸 들고 따라나선 것인데 동서 오르바는 시어머니 나오미의 강권에 따라 자기 고향 모압으로 돌아갔지만 룻은 끝까지 어머님 따라가겠다고 굳게 결단한다. 고생이 언제 끝난다는 보장도 없는 모험, 젊은 사람이 너무 착한 걸까? 아니면 앞뒤 분간을 못하는 무모한 멍청이일까? ‘룻의 결단’이 돋보인다.
베들레헴으로 가겠다
룻은 모압 여인이다. 모압은 신명기 23장 3-6절에 의하면 하나님이 저주하셨고, 영원히 여호와의 총회에 들어갈 수 없는 하나님과 하나님 백성의 원수였고,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가나안땅으로 가고 있을 때 길을 내주지 않고 오히려 거짓 선지자 발람을 불러들여 저주하려고 했던 민족이다. 그들은 그래도 안 되니까 모압 여인들로 하여금 유혹하여 음란죄를 범하게 해 하나님의 백성들로 하여금 징계를 받게 했던 민족이었고, 사사기 3장 14절에 의하면 18년 동안 이스라엘을 압제했던 사람들이기도 하다.
또 베들레헴으로 가는 것은 나오미 입장에서는 컴백이지만 룻 입장에서는 본토, 친척, 아버지 집을 떠나는 이주, 환영은커녕 어떤 냉대를 당할지 알 수 없다. 무시당하거나 멸시 천대당하거나 어쩌면 제 명을 다 살지 못할 수도 있다.
더욱이 지금 시어머니나 자신은 빈털터리, 도와줄 사람도 없다. 고향에 남아 있으면 그래도 누군가의 도움을 받을 가능성이 있지만 아는 사람 하나 없는 곳으로 가 젊은 사람이 수절하며 살아야 한다. 외로울 게 뻔하다. 망한 시어머니, 동네 사람들은 남편 잡아먹고 자식들 다 잡아먹은 여자라고 다들 한마디씩 할지도 모른다. 아니 옛날 우리 조상들이었다면 고려장을 치를 만한 상황, 발걸음이 잘 떨어졌을까? 이제 가면 언제 다시 고향 산천을 밟을 수 있을지 기약도 없는데...
그런데 남편과 사별하고 두 아들과 사별하는 인생의 가장 큰 스트레스를 느끼고 견디다 못해 혈혈단신으로 귀향하겠다는 시어머니, 차마 ‘마라’(מָרָה, ‘고통’, 쓰다’는 뜻)라고 표현된 절망과 고독과 우수에 젖은 인생 말로의 시어머니를 버리고 모압으로 돌아갈 수 없다. 이게 바로 시어머니를 자기 어머니처럼 생각하는 착한 며느리의 마음이다. 하지만 이 결단은 행복을 포기한 결단, 어쩌면 그날따라 날아가는 철새들 울음소리마저 슬프게 들렸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룻은 시어머니를 따라 기어이 베들레헴으로 가겠다고 굳게 결심한다.
행복을 포기하겠다
처음에는 동서 오르바도 룻과 같이 완강히 거부했다(룻기 1:10). 하지만 나오미가 모압으로 돌아가야 할 이유를 대며 설득하고, 여성들의 운명이 어떠함을 잘 보여주자 그들은 소리를 높여 울었다. 이 표현이 9절과 14절 두 번밖에 나오지 않지만 1장은 그야말로 눈물바다였다. 기구한 운명, 장례를 치르고 치르고, 또 치르면서 울고, 울고, 울었는데, 지금 세 과부가 또 다시 서로를 마주 보며 서글프게 운다. 얼마나 울었을까? 오르바의 생각이 바뀐다. 시어머니와 입 맞추고 모압으로 돌아간다. 눈물로 범벅이 된 슬픈 이별, 하지만 재혼해서 행복의 길을 찾고 싶다는 본능이다. 이 과정에서 서로 상대방을 설득하고 굴복시키려고 애쓰는 치열한 논쟁이 너무 아름답다.
나오미가 절반은 승리했지만 룻 설득에는 실패했다. 성경은 룻이 나오미를 ‘붙좇았다’고 했다(룻기 1:14). 이 단어는 히브리어로 ‘다바크’(דבק), ‘붙다’ ‘착 달라붙다’ ‘접착하다’ ‘하나가 되다’라는 뜻, 두 물체가 물리적으로 딱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상태를 나타내는 단어다. 그렇게 바짝 달라붙는 룻에게 나오미가 또 권한다. “너도 너의 동서를 따라 돌아가라 하니”(룻기 1:15).
행복을 포기한 걸까? 시어머니가 돌아가라고 재촉하지만 기어이 이 한(恨) 많은 어머니, 곤궁에 처한 초라한 노인네를 끝까지 따라가겠다고 고집을 부린다. “내게 어머니를 떠나며 어머니를 따르지 말고 돌아가라 강권하지 마옵소서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룻기 1:16). 여기서 끝이 아니다. 룻은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묵힐 것이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룻기 1:17).
고대 여성들은 남편이나 그 아들에 기대어 살아야 하는 운명이었다. 그래서 시어머니 나오미는 함께 베들레헴에 가도 자기가 줄 수 있는 씨가 없다고 한다. 자신은 너무 늙어 결혼할 수도 없고, 설사 결혼해서 아들을 낳는다고 해도 너무 오래 기다려야 한다며 모압으로 돌아가 다시 재혼해서 행복하게 살라고 한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하는 것은 당시의 생활풍습이었던 ‘계대결혼’(繼代結婚)이다. 이 계대결혼은 남편이 사망한 후 미망인이 남편의 형제 중 한 사람과 재혼하는 혼인 형태인 취수혼(娶嫂婚), 레비레이트혼(levirate)이라 불리는데 구약성경 신명기에서 이 제도가 잘 설명된다. “형제들이 함께 사는데 그중 하나가 죽고 아들이 없거든 그 죽은 자의 아내는 나가서 타인에게 시집 가지 말 것이요 그의 남편의 형제가 그에게로 들어가서 그를 맞이하여 아내로 삼아 그의 남편의 형제 된 의무를 그에게 다 행할 것이요 그 여인이 낳은 첫아들이 그 죽은 형제의 이름을 잇게 하여 그 이름이 이스라엘 중에서 끊어지지 않게 할 것이니라”(신명기 25:5-6).
이 제도는 죽은 자의 이름을 잇게 해주고, 가문의 재산을 보존하거나 홀로 남은 여성을 보호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고구려 10대 왕이었던 산상왕(山上王) 때 고구려에서도 왕실이 형제상속에서 부자상속으로 전환하는 시기에 왕실 강화를 위해 취수혼을 시행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 계대결혼을 포함한 고엘 제도가 룻기의 주요 소재였다. 고엘 제도에 대해서는 추후에 구체적으로 보겠지만 주목할 것은 룻기에서는 이 고엘 제도의 의무조항이 친척에게까지 확대되었다는 것이다.
들판에서 이삭을 줍던 룻이 어느 날 보아스라는 남자를 만난다. 룻과 나오미는 보아스를 생명줄로 여긴다. 룻이 시모 나오미를 ‘붙좇았다’라고 한 것처럼 룻과 나오미가 이때부터 보아스를 붙좇는다. 그리고 악착같은 생명의 의지로 보아스와 재혼한다. 룻은 결국 재혼을 제일 잘한 여인이 되었다. 부정적으로 나오미와 룻이 작당하여 보아스라는 남자를 홀렸다는 신학자도 있지만 이는 하나님의 은혜를 세속적 남녀의 불륜처럼 오해하게 만드는 위험한 해석이다.
은혜를 알아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섭리를 알아야 한다. 결국 이 만남으로 다윗의 혈통이 이어지지 않나? 생존을 위한 필사의 노력으로 볼 수도 있지만 성경이 주는 메시지는 단순한 생존 차원이 아니다. 성경은 룻의 보아스와의 재혼을 구속사와 하나님의 뜻이 실현되는 과정으로 다룬다.
구약성경의 첫 책인 창세기에도 유사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38장에 나오는 유다의 며느리 다말의 이야기이다. 가나안 사람인 다말은 유다의 장남 엘과 결혼했던 유다의 맏며느리였다. 그런데 이방인과의 결혼이었기에 하나님이 악하게 보시고 장남 엘을 죽이셨다. 장남이 죽자 차남 오난에게 가계가 이어질 수 있도록 형사취수법을 따르게 했지만 오난은 아들을 낳아도 자기 아들이 아니라 형의 아들이 되니까 제도대로 제대로 이행하지 않았다. 하나님이 이를 악하게 보시고 둘째 아들 오난도 죽이신다. 연이어 두 아들이 죽자 유다는 다말에게 형수를 취하는 형사취수법을 셋째 셀라에게는 행하려 하지 않는다. 친정으로 가서 수절하고 셋째 셀라가 클 때까지 기다리라고 둘러댄다. 성경은 유다가 셋째 아들마저 죽을까봐 염려해서 그랬다고 한다.
얼마가 지났는지는 모르지만 다말은 시아버지 유다가 셀라가 장성했음에도 불구하고 형사취수법을 행하지 않는 것을 보고 매춘녀로 분장해서 시아버지 유다와 동침하고 임신을 한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알게 된 유다가 분노하여 며느리 다말을 죽이려 하자, 다말이 바로 당신의 씨라고 밝힌다. 그때 유다가 다말에게 했던 말이다. “그는 나보다 옳도다 내가 그를 내 아들 셀라에게 주지 아니하였음이로다”(창세기 38:26). 여기서 ‘옳도다’는 ‘체다카’(צדקה)라는 단어다. ‘표준에서 벗어나지 않은 것’ ‘법도를 바르게 지키는 것’ ‘의롭다’는 뜻이다. 무엇이 의롭다는 뜻이었을까?
동양사회의 잣대로는 패륜적 행동이다. 하지만 성경은 의롭다고 평가한다. 다말은 이를 통해서 베레스와 세라를 낳았고 그들을 통해 유다 가문이 이어졌기 때문이다. 부도덕한 다말의 행동이 유다 아들 엘의 이름을 살렸을 뿐만 아니라 구원사를 잇게 했다. 윤리에 앞서는 것이 생존인데, 이 생존은 단순한 생존이 아니라 구원사를 잇게 한 생존이었다. 다말의 결단이 결국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가 되었다. 마찬가지다. 룻과 나오미, 하나님 은혜를 입고 생존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결국 하나님의 뜻을 이루며, 두고두고 빛나는 가문을 이루게 된다. 하지만 여기서의 룻의 결단은 분명 행복을 포기한 엄청난 결단이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어머니와 함께하겠다
성경은 오르바도 처음에는 따라나섰던 것을 분명히 밝히고, 모압으로 돌아간 것도 비난하지 않는다. 하지만 오르바의 선택이 합리적 선택이었다면 룻의 선택은 눈물의 길, 결코 가고 싶지 않은 좁은 길이었다. 그런데 결과적으로 보면 최고의 선택, 룻의 선택은 빛나는 선택이 된다. 오르바가 지평선 너머로 사라진 후에도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나오미가 룻에게 “너도 가라”고 하자 룻은 꿈쩍도 하지 않고 매몰차리만큼 당차게 고백한다. “어머니께서 가시는 곳에 나도 가고 어머니께서 머무시는 곳에서 나도 머물겠나이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 어머니께서 죽으시는 곳에서 나도 죽어 거기 묻힐 것이라 만일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룻기1:16-17).
사랑한다면 함께 가는 것, 힘들어도 함께 가고, 즐거울 때나 고통스러울 때도 함께하는 것, 마치 결혼식 때 신랑 신부가 하는 서약 같다. 또 ‘어머니’ 대신 그 위치에 ‘예수님’을 넣어서 읽어보면 이건 신앙고백이다.
앞에서 “붙좇았다”는 단어에 대해 살펴봤는데 이 단어는 창세기에서 아담과 하와의 결합에 사용되었던 단어다.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여기 ‘합하여’와 같은 단어, 둘이 하나가 되었음을 보여주는 단어라면 그만큼 룻의 의리가 대단했다는 뜻 아닌가? 아마 생존의 위기가 둘을 이렇게 강하게 연대하게 만들었던 것 같다.
인간은 홀로 설 수 없는 존재, 함께해야 없던 힘도 생기고 위기도 견딜 수 있다. 교회도 마찬가지다. 어떤 분들은 기독교 교리나 예수님 말씀은 좋은데 기독교인들이 싫어서 교회가 싫다고 한다. 그래서 혼자 기도하고, 혼자 말씀 읽고, 혼자 신앙생활 하겠다는 분들이 가끔 있다. 하지만 그런 사람은 아무리 큰소리쳐도 곧 신앙을 버릴 사람이다. 잘 타던 장작도 떼어놓으면 곧 꺼지고 마는 것과 같을 것이다.
신앙은 가치관 싸움이자 악한 영들과의 투쟁이다. 그래서 긴 싸움, 모여서 함께 기도하며 함께 찬양하며 서로를 격려해야만 지치지 않고 이길 수 있다. 말 한 마리가 끄는 힘을 1마력이라 하고, 두 마리가 끄는 힘을 2마력이라 한다. 그런데 이게 한 마리가 끄는 힘이 2톤이고, 두 마리가 끄는 힘은 4톤이란 말이 아니다. 말 두 마리가 끄는 힘은 무려 24톤, 시너지 효과라는 것인데 대단하지 않나?
연합(Unity)과 조화(Harmony), 그리고 협력(Cooperation)이 시너지의 원리이다. 연합이 팀의 힘이라면 조화는 함께 어울리는 힘이고, 협력은 같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힘이다. 가정도 교회도 이게 필요하다. 힘들 때 옆에서 도와주고, 풍족할 때 다른 사람을 돕고, 서로 격려하면 서로 힘이 나는 것, 그때 사랑도 불붙고, 신앙도 불붙는다.
룻의 결단, 결심 한번 잘한 정도가 아니라 엄청난 결단이었다. 민족을 버리고, 종교를 버리고, 고향을 버리는 것이 쉬운 일인가? 마치 아브라함이 고향, 친척, 아비 집을 버리는 결단과 같다. 아니 아브라함의 결단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있었지만 룻의 결단에는 하나님의 약속도 없다. 그래서 더 대단한 것, 어떤 약속도, 어떤 보장도 없는 결단, 그저 어머니를 봉양하겠다는 일심으로 내린 빛나는 결단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더 주목해야 할 사항이 있다. “어머니의 백성이 나의 백성이 되고 어머니의 하나님이 나의 하나님이 되시리니”(룻기 1:16) 룻의 결단은 신앙의 결단을 내포한 위대한 결단이었다. 이게 바로 하나님이 룻에게 복을 주신 이유였다.
나오미에게 선대를 베푸는 룻을 하나님께서 선대하신다. “너희가 죽은 자들과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 너희를 선대하시기를 원하며”(룻기 1:8). 여기서 ‘선대’는 히브리어로 ‘헤세드’(חֶסֶד), 변치 않는 관계와 사랑을 전제한다. 헤세드의 여인 룻은 그 헤세드로 남편을 얻고, 아들을 얻고, 결국은 여호와를 얻는다. 우리에게도 헤세드가 필요하다. 우리 사회가 생각이 다른 사람들을 지나칠 정도로 무시하고 냉대하기 때문이다. 가족들은 물론 이웃들, 특히 생각이 다른 사람까지 선대하며 살아야 한다. 그래야 하나님의 헤세드를 받고, 그래야 사랑의 열매를 맺는다. 룻과 같은 빛나는 결단으로 사랑의 마음이 풀(full) 충전되어야 한다.
인천신기중앙교회 담임 이희우 목사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