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백스터의 공공신학적 논의

본 소고는 지면의 한계상 백스터의 방대한 저작 가운데 ‘공공선, 공동선’에 대하여 비교적 많이 다룬 책을 중심으로 그의 공공신학적 논의를 살필 것이다. 백스터의 “A Christian Directory” 전집은 총 4권인데, Ⅰ.Christian Ethics(개인윤리), Ⅱ.Christian Economics(가정윤리), Ⅲ.Christian Ecclesiastics(교회윤리), Ⅳ.Christian Politics(사회윤리)으로 구성되어 있다. Christian Politics에는 ‘public good’이 42회, ‘common good’이 39회 사용되었다. A Treatise of Self-Denial에는 ‘public good’이 16회, ‘common good’이 29회 등장하고, How to Good to Many: the Public Good Is the Christian’s Life에는 ‘public good’이 14회, ‘common good’이 20회 나온다. 이상 세 권은 백스터의 22권의 주요 작품 중에서 공공선, 공동선’을 다룬 빈도가 높은 것을 기준으로 상위 세 권을 연구자가 임의로 선정한 것이다.
1) 공공선의 근거와 이해
백스터는 공공선의 근거를 하나님의 본성에서 찾는다. 하나님이 본성상 선하시고, 완전하시고, 거룩하시며, 궁극적으로 완전한 사랑 자체이기 때문에 그분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은 마땅히 선을 실천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지어진 하나님의 작품으로, 좋은 나무로 거듭난 신자는 좋은 열매를 당연히 맺으며,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신 대로 그 가운데서 행한다(엡 2:10). 백스터는 공공선의 표면적 결과나 행동만 강조한 것이 아니라 그 동기에도 주목했는데, 신자가 선한 동기를 따라 선행을 추구해야 하는 이유를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첫째, 성부 하나님을 닮아가고자 하는 열망을 그 안에 주셨기 때문이다. 하늘 아버지는 그분의 완전하심과 같이 자녀인 우리도 완전하기를 원하신다. 하나님과 가장 닮은 사람이 가장 좋은 사람이며, 가장 거룩하고, 가장 행복하며, 하나님과 가장 많은 교제를 나눌 것이다. 둘째, 성자 그리스도께서 육신을 입고 오셔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하나님에게서 멀어진 우리를 하나님과 화해시키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구속 사건은 신자에게 선행의 원천이 될 뿐 아니라 모본이 된다. 비참한 죄인이었던 우리는 그리스도와 접붙임 받았기에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가 있고, 그리스도의 모본을 따라 그분의 제자됨을 확증한다. 셋째, 거룩하신 성령께서 우리의 내면에 새 생명의 원리를 심으셔서 성화를 이뤄가기 때문이다. 신자는 선행의 실천을 통해 새 생명을 활성화하는데, 만일 실천하지 않는다면 생명이 없는 거나 다름이 없다. 넷째, 다른 사람과의 관계에서 서로의 필요를 발견하고 느끼게 하시기 때문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선을 행함으로 온 세상 안에 사랑이 흘러가게 하는 것은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의 표현이다. 다섯째, 하나님은 청지기에 대한 보상을 이생에서뿐 아니라 내생에서도 보응하는 심판주이시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소자에게 베푸는 냉수 한 컵에 대해서도 이생에서 백배로, 오는 세상에서는 영생으로 약속하셨다. 사랑과 선행을 가장 충만히 행하는 사람이 대개 가장 많이 사랑받는다는 사실은 이러한 동기를 촉진한다. 선행은 그 자체로 커다란 보상이 있는데, 선행을 실천하는 순간 현재의 기쁨이 있고, 타인에 대한 사랑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리스도를 본받는다는 양심의 증거가 그 사람을 즐겁게 한다.
공공선의 주체는 모든 사람이고, 그 대상과 범위도 모든 사람이다. 공공선을 실천할 시기는 기회가 닿는 대로 미루지 말고, 서둘러야 한다. 자신의 영혼과 삶에서 시작하여 가장 가까운 관계, 친구, 지인, 이웃으로 나아가야 한다. 이 등불은 집에서 시작하여 교회, 공동체, 도시, 사회, 국가, 그리고 온 세상으로 확장되어야 한다. 특별히 참된 신자는 은혜를 통해 그렇게 할 수 있으며,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 백스터는 신자는 선행의 실천을 통해 땅의 소금과 세상의 빛이 되어야 한다고 강론하며, 그리스도의 공로를 내세우며 선행의 실천을 거부하는 반율법주의자(antinomian)를 ‘위선자(hypocrite)’로 규정하며 다음과 같이 책망했다.
오류에 빠진 자는 악을 선으로, 거짓을 진리로 여긴다. 게으른 위선자는 많은 선을 바라지만 거의 행하지 않는다. 형식적이고 의례적인 위선자는 선함의 이름과 이미지만 높인다. 세속적인 위선자는 자신의 육신에 아무런 손실이나 고통 없이 선을 행할 수 있다면 기꺼이 그렇게 할 것이다. 자유주의적 위선자는 선을 행할 필요성에 반대하여 그리스도의 공로를 내세우며 자신이 열매 없고 경건하지 않더라도 그리스도께서 선하시기에 구원받기를 바란다.
2) 공공선(정의)을 판단하는 기준
역사 속에서 정의가 무엇인지에 대한 다양한 담론이 철학자나 정치학자 사이에 지속되어 왔다. 플라톤은 「국가」(The Republic)에서 각 계층(통치자, 수호자, 생산자)간의 조화로 설명했고, 아리스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각자에게 합당한 것을 나눠 주는 도덕적 자질을 강조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의 뜻에 온전히 따르는 것으로, 아퀴나스는 「신학대전」에서 자연법에 부합하는 것으로 이해했다. 근대에 이르러 홉스는 「리바이어던」에서 자연 상태에는 정의가 없으므로 사회 계약을 통해 정의가 생겨난다고 주장했고, 로크는 자연권(생명, 자유, 재산)을 보장하는 것이 정의라고 했다. 벤담과 밀 등 공리주의자가 양적, 질적 행복이라는 결과에 집중했다면, 칸트는 행위의 결과보다 내면의 동기를 중시했다. 존 롤스는 공정으로서의 정의를 강조했고, 오늘날 다원화된 시대에는 구조적 불평등을 해소하고, 다양성, 평등, 포용을 실현하는 데 정의의 주안점을 두고 있다.
그렇다면, 백스터가 말하는 정의의 기준은 무엇인가? ‘공공선’과 ‘정의’의 개념이 완벽히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다양한 군상들의 이해관계 속에서 무엇이 공동의 선인가에 대해 백스터가 제시한 기준들은 정의에 대한 논의와 일맥상통한다고 볼 수 있다. 백스터는 가장 큰 선에 대해 하나님이 가장 큰 관심을 갖고 계심을 언급하며, 그분의 영광과 그분의 성취를 공공선의 초석으로 삼는다. 병립하는 다양한 선들, 서로 상충하는 선들, 악과 더 큰 악의 회피, 수단 또는 목적으로서의선, 정당방위, 이것들을 판단하기 위해 필요한 신중함과 공정성 등 선을 행하고 판단하는 기준 12가지를 다음과 같이 제시한다.
① 하나님의 가장 큰 관심사는 가장 큰 선이다. 그리고 그의 관심사는 그의 영광과 그의 성취된 뜻에 대한 기쁨이다.
② 그러므로 세계, 교회, 국가, 다수의 선은 소수의 선보다 더 크다. ③ 영혼의 선은 육체의 선보다 더 크다.
④ 가장 큰 악을 피하는 것이 더 작은 악을 피하는 것보다 낫다.
⑤ 영원한 선은 짧은 선보다 낫다.
⑥ 어떤 악도 남기지 않는 보편적 선은 특정한 선보다 낫다.
⑦ 수단으로서 가장 좋은 선은 목적에 가장 잘 이바지하는 것이다. ⑧ 어떤 악과도 섞이지 않은 지상의 선은 없으며, 어떤 불편함이나 불리함이 없는 상품도 없다.
⑨ 어떤 선을 위해서도 죄를 짓지 말아야 한다.
⑩ 어떤 일들은 그것이 행해지는 선을 위해서라면 죄가 아닐 수 있다. 강도에게 돈을 주는 것은 생명을 구하거나 다른 이익을 위해서가 아니라면 죄가 될 것이다. 주일에 어떤 일을 하는 것은 필요성이나 더 큰 선이 있다면 의무가 될 수 있다. 자기방어는 타인을 치는 것을 의무로 만들 수 있는데, 그렇지 않으면 그것은 죄가 될 것이다.
⑪ 그러한 경우에는 선과 악 중 어느 것이 더 우세한지 알기 위해 큰 신중함과 공정성이 필요하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삶의 행위 중 큰 부분이 죄가 될 것이다.
⑫ 그러므로 목사의 의무 중 작지 않은 부분은 현명하고 노련하며 신실한 윤리학자로서 사람들에게 조언하는 것이다.
백스터는 복수(複數)의 ‘선’ 사이에 우열이 있음을 인정하며, 소수보다 다수에, 육체보다 영혼에, 현재보다 영원에, 개별적인 것보다 보편적인 것에 우위를 두었다(②~⑥). 선한 목적이 악한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음을 표방했으며, 생명과 관련해서 극히 제한된 예외를 허용했다(⑦⑨⑩). 공공신학은 이론이 아니라 늘 죄악이 관영하는 세상과 일상에 맞닿아 있기 때문에 완벽한 선은 구현되기 어렵다는 현실을 인정하며[선지자적 비관주의], 그러기에 신중함과 공정함이 요구된다고 역설했다(⑧⑪). 그의 대표작으로 「참 목자상」이 기억될 만큼 목회와 심방에 혼신을 다한 그였지만, 공공선에 대한 연구로 사람들을 조언하는 것을 목사의 중요한 역할 중 하나로 꼽았다(⑫).
3) 공공선 실천에 필요한 요소
백스터는 “정직한 옛 로마인은 자기 재산이나 생명을 공동복지보다 앞세우는 자를 가치 없는 짐승이라 불렀을 것이다”라고 하며 공공선의 적극적 실천을 촉구하였다. 삶 속에서 구체적으로 공공선을 실천하기 위해 어떤 덕목이 필요한지에 대한 백스터의 답변을 살펴보자. 첫째, 많은 사람에게 선을 행하려는 진실한 사랑을 가져야 한다. 사랑은 다른 사람에게 선을 베푸는 원리이다. 사랑은 많은 사람을 하나로 만들며, 몸의 각 지체가 다른 지체를 돕기에 준비되어 있듯이 서로 돕기에 준비되어 있게 한다. 사랑은 남의 필요와 고통과 슬픔을 자기 것으로 삼는다. 사랑은 선을 행하기 위해 연구하며, 항상 더 많이 행하기를 원하며, 타인의 연약함을 인내한다. 백스터가 말하는 사랑은 추상적이 아니라 구체적이며, “가서 너도 가서 이와 같이 하라”(눅 10:37)는 말씀대로 교회 안이 아니라 교회 담장을 넘어서는 이웃 사랑이며, 로맨틱한 사랑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따르는 자기 부인의 사랑이다.
둘째, 넓은 시야(a very large perspective)로 온 세상을 바라보며 우리의 모든 행동이 다른 나라와 지상의 교회와 어떤 관계가 있고, 나아가 후손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고려하고, 예견할 수 있어야 한다.다. 2024년 송도에서 개최된 제4차 로잔대회에서 한 패널은 프랑스 통계이긴 하지만, 85%의 그리스도인은 직장 동료가 묻는 세상의 이슈들에 대해 어떻게 대답할지 모른다는 심각한 통계 결과를 언급하였다. 이것은 오늘날 세속 사회 속의 신자가 공공선을 실천하기에는 얼마나 좁은 시야와 믿음의 보폭을 가지고 있는지를 반증한다. 보편적 안목의 결여는 많은 사람을 비난하고 분열시킬 수 있다는 백스터의 조언은 세대 간, 계층 간, 이념 간, 지역 간, 남녀 간 양극화로 신음하는 한국 사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할 것이다.
셋째, 담대한 용기를 가져야 한다. 이 용기는 위선자와 반대자에 대한 용기요, 선을 악으로 갚고 도리어 모함하는 배은망덕한 자에 대한 인내요, 자신을 저주하는 자들을 향한 기도요, 자신을 핍박하는 자에 대한 축복이며, 어떤 상황에서도 뒤로 물러나 낙담하지 않고 선을 행하되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끈기이다. 낙담하여 뒤로 물러서서도 안 되며, 무슨 일이 있어도 그를 끝까지 이끌어가는 담대한 용기가 필요하다.
넷째, 온유와 겸손과 경청이다. 신자는 자신들이 하나님께 용서를 받은 것처럼 타인을 용서하고, 남을 비방하거나 거칠거나 잔인하게 대하지 말고, 편견과 위선에 사로잡히지 말고, 온유와 겸손으로 서로의 덕을 세우기 위해 힘써야 한다. 신자는 배타적인 진리를 가졌지만, 그것을 배타적인 자세로 선포할 것이 아니라 온유하고 두려운 심령으로 그리해야 한다(벧전 3:15). 백스터는 “논쟁이 되는 문제에 대해 당신 홀로 재판장이 되지 말고, 지혜롭고 편견이 없는 다른 사람들의 판단에 귀를 기울이라”고 권면한다. 비록 당신이 가르칠 만한 사람들 사이에 있더라도 배우려고 하고 가르치려 하지 말라며, 그 구체적 방안으로 ‘경청’을 강조한다. “당신이 무엇을 말할까 열망하지 말고 당신이 무엇을 들을지 열망하라. 그런 경우 질문하는 것은 대부분 당신이 해야 할 일이다.” 오늘날 한국교회는 이기적, 위선적, 권위적이라는 대사회적 이미지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공공선의 관점에서 교회는 자신의 이야기와 주장만 내세우며 정답만 관철하려는 ‘대화의 종결자’나 ‘답정너’의 태도에서 벗어나 자신 또한 진리의 담지자가 아닌 진리를 지향하는 용서받은 죄인임을 인식하며 겸손히 상대의 말에 경청하는 자세가 필요하다.
다섯째, 기독교와 참된 경건은 세상에서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계명을 실천할 의지와 거룩한 성향을 포함한다. 백스터는 황제와 왕을 폐위하고 자신들을 하나님의 대사로 자처한 교황주의자들이나 정부의 권위에 도전하는 재세례파의 열광주의를 비판하며, 가장 진지하고 경건한 그리스도인은 이 땅에 있는 시민사회의 훌륭한 구성원이라는 점을 적시하였다. 오늘날 비신자들의 눈에 비친 기독교의 이미지가 이기적이고, 위선적이고, 몰상식하다는 언론의 보도는 그렇지 않은 교회들도 많다는 점에서 전적으로 옳다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과 소통하고 빛의 역할을 감당하기 위해서 백스터가 지적한 참된 경건을 향한 거룩한 의지와 성향이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세상속에서 공공선으로 구현되고 있는지 진지하게 성찰해 볼 필요가 있다.
여섯째, 상대가 알아들을 수 있도록 이중언어의 자질을 갖추어야 한다. 백스터는 말하는 사람에게 최선인 것이 듣는 모든 사람에게 최선은 아닐 수도 있음을 환기하며, 대화의 주제와 방식을 상대에 따라 다양하게 해야 한다고 말한다. 상대의 ① 지식의 다양함에 따라, ② 도덕적 자질의 다양함에 따라, ③ 그들이 빠지기 쉬운 죄의 다양함에 따라 성경적 가치와 본질을 훼손하지 않으면서도 상대의 눈높이로 전달하려는 노력이 요구된다. 사람마다 의견이 다양하고, 같은 의견에 대해서도 놀랍도록 다양한 이해가 있으며, 그 이해도 다양하게 제시되고, 삶의 여러 과정에서 다양하게 형성되기 때문이다. 모든 지혜로운 의사는 질병의 종류뿐 아니라, 환자의 병증과 체질에 따라 처방을 다양하게 하는 것처럼 말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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