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희우 목사
이희우 목사

미국 TV 스포츠 중계를 보다보면 가끔 관중석에서 ‘JOHN 3:16’이라는 피켓을 든 사람이 보인다. 요한복음 3장 16절이라는 복음을 전국의 시청자들이 보게 하려는 매우 지혜로운 전도 방법이다. TV에 정식으로 전도 광고문을 내려면 엄청난 돈이 들지만 중계를 위해 카메라로 잡지 않으면 안 되는 쪽에 자리만 잡으면 매우 효과적인 전도가 될 수 있다.

미국서 TV를 직접 본 사람에 의하면 웃지 못할 해프닝도 있었던 모양이다. 미 프로야구 월드시리즈인지 리그 챔피언 결정전 시리즈였는지는 확실치 않지만 홈플레이트 바로 뒤쪽에서 'JOHN 3:16'의 피켓을 들었다 내렸다 하는 관중이 한 명 있었는데 마침 그 사람이 앉아 있는 자리 각도가 너무나 좋아서 센터 필터 쪽 외야석 카메라가 홈플레이트를 비출 때 우타자가 나오면 그 'JOHN 3:16'의 피켓이 화면의 좌측 상단에 또렷하게 돋보이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 플래카드가 화면에 여러 번 잡히던 중, 갑자기 해설자가 “지금 저 플래카드를 들고 있는 사람은 John의 열렬한 팬이 틀림없다”고 했단다. 마침 타자의 first name이 John이었고, 그 선수의 시리즈 타율이 하필이면 3할 1푼 6리였기 때문에 오해한 것다. 해설자는 졸지에 자신의 몰상식을 전국에 생방송하고 말았다.

JOHN 3:16, 선교사들이 선교지에 가서 그들의 말을 배운 다음 가장 먼저 번역하는 말씀이고, 주일학교에서 가장 먼저 외우는 구절이다. 모든 사람의 성구, 기독교의 마그나 카르타, 기독교 복음의 심장이다. 우주 최대의 빅 뉴스를 담고 있기 때문이다. 이 뉴스는 칭기즈 칸이 백만 대군을 몰고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간 뉴스나 콜럼버스가 대서양을 횡단해서 신대륙을 발견한 뉴스, 그리고 나폴레옹이 온 유럽을 지배한 뉴스나 닐 암스트롱이 달에 착륙했다는 뉴스 정도가 아니다. 우주 최고 최대의 뉴스, 마르틴 루터는 이 구절을 ‘복음 속에 있는 복음’ ‘축약된 복음’이라고 불렀다. 복음의 진수가 압축되어 있는 성경의 백미(白眉), 복음의 에센스다. 신구약 66권 전체를 딱 한 절로 압축하라면 나올 법한 성경 최고 핵심 구절이다.

어떤 분은 요한복음 3장 16절을 이렇게 설명했다. “하나님이(가장 위대하신 아버지) 세상을(가장 위대한 필요) 이처럼 사랑하사(가장 위대한 사랑) 독생자를 주셨으니(가장 위대한 희생)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가장 위대한 초청) 멸망하지 않고(가장 위대한 구원)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가장 위대한 소망)” 한 마디 한 마디를 음미하게 하는 멋진 설명이다.

요한은 복음의 핵심을 ‘사랑’으로 여겼다. 그래서 자신의 복음서인 『요한복음』에서 ‘사랑’이라는 단어를 36회나 썼다. 요한일서를 제외한 나머지 신약성경에 쓰인 횟수의 두 배에 해당되는 분량이다. 16절에서 그 사랑이 독생자를 주셨고, 그 사랑이 멸망 받을 세상에 영생을 선물했다고 한 요한은 예수께서 세상에 오신 성육신(成肉身)도, 십자가(十字架)도, 선포하고 가르치고 고쳐주신 예수님의 3대 사역도 다 사랑 때문이라 한다. 16절의 ‘이처럼 사랑하사’를 ‘3S Love’로 펼쳐본다.

주권적 사랑(Sovereign Love)

‘이처럼 사랑하사’, 하나님의 주권적 사랑에 대한 표현이다. 사랑의 대상은 세상(κοσμος), 지구나 땅덩어리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사랑하신다는 말씀이다. J.R.힐(Hill)의 표현대로 ‘세상’이라는 단어가 헬라의 저작들 속에서는 매력적이고 질서 잡힌 어떤 것을 가리키는 단어로 나타나지만 신약성경에서는 오히려 하나님과 적대적이고, 대항적이다. 사탄의 권세로 인해 흑암과 혼돈 속에 있는 어둠의 세계,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세상에 있는 사람들, 신앙이 있든 없든 간에 다 사랑한다고 하신다. 매력적이라서? 마음이 맞아서? 느낌이 좋아서? 아니, 사랑할만해서가 아니다. 무조건적 사랑이며 주권적 사랑이다. 사랑의 정도는 “독생자를 주셨으니”, 요한은 하나님이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내어줄 만큼 사랑하신다고 했다. 하나님의 사랑이 주권적 사랑인데 독생자를 통한 일방적, 무조건적인 내리사랑이라는 거다. 이 사랑이 기독교의 근본정신이자 최고의 가치관이다.

그런데 코로나 시대가 지나가면서 돌이켜보면 기독교의 이미지는 사랑은커녕 이기적이고 고집불통 독선적인 집단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대면 예배를 고수했던 교회들은 목숨 걸고 고집스럽게 예배를 드린 것을 자랑한다. 교회의 이미지 추락에 대해서는 외부만 탓하고 있다. 정말 우리가 반성할 게 없을까? 산상수훈에서 예수께서 “예물을 제단에 드리려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마5:23-24)라고 하신 말씀은 어떻게 봐야 하나? 예수님은 예배보다 형제 화목, 예배보다 사랑이 먼저라고 하셨다. 이게 구약 예언자들의 정신이기도 하다.

온라인 예배를 권장할 생각은 없지만 온라인 예배는 예배가 아닌가? ‘비대면 예배’라는 용어는 부적절하고, 온라인의 한계는 인정한다. 하지만 예배의 본질을 생각한다면 우리의 관심은 ‘영과 진리로 드리는 예배’에 모아져야 한다(요4:240. 사마리아 그리심 산에서 예배해야 하는지 예루살렘 예배 처소에서 예배해야 하는지 묻는 사마리아 여인에게 주님은 영이신 하나님은 장소나 공간이나 시간에 매이는 분이 아니라고 하셨다. 예배의 핵심은 하나님의 임재다. 그런데 한국교회는 말씀보다 인간의 말로 억지를 부리며 본질 아닌 것에 집중하다가 세상에 미운털이 박히고 말았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이 세상을 사랑하셨다고 한다. 주권적 사랑이다. 세상이라 해서 느낌이 덜하면 안 된다. 송명희 자매가 ‘나 하나’라는 시를 썼었다. “나/ 하나만 있더라도/ 세상을 지으신/ 주, 나/ 하나가 죄를 짓더라도/ 십자가에 죽으신/ 주, 나/ 하나가 있더라도/ 천국을 마련하신/ 주.” 기독교 초기의 어거스틴(St, Augustine)이 “하나님은 마치 나 하나밖에는 사랑할 대상이 없는 것처럼 날 사랑하시고, 내가 이 세상에 남아 있는 유일한 생존자라고 할지라도 나를 위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셨을 것”이라 한 고백을 연상케 하는 시다. 성육신의 사랑, 생명까지 내어준 사랑, 그 사랑은 나를 향한 사랑이자 이웃을 향한 사랑이다. 그렇다면 교리나 신앙을 따지기 전에 먼저 이 사랑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주님은 “서로 사랑하라”(요13:34)고 하셨다. 우리끼리만의 사랑이 아니다. 세상을 향한 사랑이어야 한다.

물론 세상이 옳다는 말이 아니다. 사실 세상은 틀렸다. 약육강식의 세상, 여론몰이는 끔찍하다. 악이 활개를 친다. 하나님이 목숨을 내어놓아야 했을 정도로 이 악은 만만치 않다. 그래서 피하자는 게 아니다. 하나님은 그 악과 싸우신다. 그리고 주님은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그러셨다. 사랑으로 이기신 것, 세상은 결국 하나님의 주권적 사랑에 굴복할 것이다.

바울 사도은 승리를 확신했다. “다른 어떤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8:37-39). 모든 답은 십자가에 있다.

희생적인 사랑(Sacrificial Love)

‘이처럼 사랑하사’, 하나님의 희생적 사랑에 대한 표현이다. 『매일 성경』의 집필자인 J.R.힐(Hill)은 “요한복음 3장 16절에서 요한은 모든 사람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께서 ‘단번에 취하신 행동’으로 묘사하되 특별히 ‘주신 사랑’으로 그렸다”고 한다. 하나님은 사랑하셨을 뿐만 아니라 ‘주신 분’(giver)이다. 주는 것은 희생이다.

그래서 이 구절을 F.F.브루스(Bruce)의 제자인 김세윤 박사는 ‘내어줌의 형식’(giving-up formula)이라 했다. 이 형식의 패턴은 ‘(주어) 하나님께서 + (동사) 아들을 내어주심 + (목적어) 구원을 위하여’, 요한복음 3:16절 외에도 로마서 8:32과 갈라디아서 2:20절이 이 패턴이다. 메시지는 언제나 ‘사랑’이고, 그 내어줌의 절정이 십자가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메시지의 의미를 요한의 표현대로 “이처럼 사랑하사”, 하나님이 너무너무 사랑하셨다고 받아들이면 된다. 여기서 ‘이처럼 사랑하사’는 “이것처럼 사랑하사”가 아니라, “너무너무 사랑하사” “이토록 많이 사랑하사” 영어로 "loved so much"라는 뜻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의 계시자(啓示者)로서의 모습을 드러내셨고, 하나님의 본질이 ‘사랑’이심을 충분히 입증하셨다.

요한은 내어주신 그 분이 ‘독생자’(μονογενης)이며, 대상은 ‘세상’이라 했다. ‘하나님은 하나님으로만 계시된다’는 계시의 제1원칙대로 ‘독생자’는 ‘하나님과 동질’(同質), 하나님 편에서 내줄 수 있는 가장 귀한 존재이자 하나님을 계시할 자격을 충분히 갖춘 존재라는 뜻이다.

그리고 ‘이처럼 사랑하사’, 하나님은 동질의 아들을 죽기까지 내어주신 목적,을 ‘세상 구원’이라 하셨다(17절). ,적대적이고, 대항적이며 사탄의 권세로 흑암과 혼돈 속에 있는 어둠의 세계라 할지라도 성경은 그 ‘세상’을 사랑의 대상, 구원의 대상으로 삼으셨다는 것이다. ‘위대하고도 무한한 사랑’, 그야말로 ‘최고 최대의 사랑’이다.

그 큰 사랑에 감동한 요한은 결국 요한일서에서 아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God is Love)라고 선언한다(요일 4:8). 사랑이 기독교 진리의 핵심이며 인간을 변화시킬 수 있는 가장 위대한 창조의 예술이기 때문이다. 물론 사랑은 아픔을 동반할 때도 있다. 그래서 ‘주님을 십자가에 박게 한 것은 못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말도 있다. 천국문을 여는 열쇠가 ‘믿음’이라면 천국의 헌장은 ‘사랑’이다. 또 믿음이 신앙생활의 알파라면 사랑은 신앙생활의 오메가다.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 하나님은 세상을 향해 ‘내가 너를 사랑하노라’고 절규하셨다.

소설 『침묵』의 작가인 엔도 슈사쿠(遠藤周作, Endo Shusaku)는 큰 수술을 받았을 때 마취에서 깨어나 보니 너무 고통이 심해 진통제를 놓아달라고 소리쳤지만 의사가 그의 요구를 거절해서 더 크게 소리 지르니 간호사가 달려와 따스하게 손을 잡아주었는데 신기하게도 아픔이 누그러지고 고통이 사라졌다고 했다. 사랑은 최고의 치료제이다.

기억하자. 하나님은 사랑이시다. 그 사랑은 배고픈 사람에게 떡 한 덩이를 주는 구제 정도가 아니다. 소외된 자들에게 친구가 되어 주는 박애정신 정도도 아니다. 그 사랑은 십자가 대속의 사랑, 독생자를 내어주신 사랑의 절정이다. 벼랑 끝 같은 십자가는 우리의 손을 끝까지 잡아주신 하나님의 사랑이고, 승리이며 영광이다. 십자가를 통해 결국은 우리의 구원이 이루어졌다. 그래서 요한복음의 골고다의 십자가에는 비통함이나 비극이 없다. 영광스럽고 예수님은 마지막에 “다 이루었다”(요19:30)는 승리의 선언으로 최후를 마치신다. 요한복음을 볼 때 십자가에 높이 달린 것은 수치나 비극이 아니다. 십자가는 하늘나라로 가는 첩경이요 대로다.

구원하는 사랑(Saving Love)

‘이처럼 사랑하사’, 하나님의 구원하는 사랑에 대한 표현이다.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믿는 자마다’라도 했다. 현재진행형, 믿고 또 믿고 계속 믿으라는 거다. 성령의 콘트롤을 계속 받는 것을 의미한다. 요한복음의 중심주제는 ‘믿어야 할 예수’, 요한은 믿음이라는 명사를 사용하는 대신 ‘믿어야 한다’는 ‘피스튜오’(pistuo), 동사를 썼다. 예수 믿어야만 구원받기 때문이다. 이 단어가 요한복음에서 98번이나 반복된다. 3장에서도 7번이나 쓰였다. 요한복음의 기록목적을 밝힌 결론에서도 예수를 믿어야만 구원받는다고 거듭 강조한다.(20:31)

이어서 ‘멸망하지 않고’, 멸망할 수밖에 없는데 예수 믿으면 영생, 곧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말씀이다(10:10). 생명의 삶 그리고 풍성한 삶, 생기가 넘치고, 활력이 넘치고, 역동적인 인생을 살게 하려고 오신 예수, 생수의 강이 흘러넘치는 것과 같은 기쁨이 있는 삶, 분에 넘치는 초과분의 인생을 살게 하려고, 멸망이 아니라 영생과 풍성한 삶을 주려고 오셨다는 거다. 그래서 ‘생명’은 요한복음의 또 하나의 주제, 예수님은 생명을 주는 분이시다(23번 강조).

니고데모의 관심이 ‘하나님의 나라’(KOG)였다. 공관복음서에서 다룬 핵심 단어다. 요한복음에서는 이 ‘하나님 나라’란 말은 니고데모와 관련된 3장에서만 언급되고, 요한은 같은 개념을 ‘영생’이라 표현했다. 사도 바울도 다른 단어로 ‘구원’ 또는 ‘그리스도 안에서’라는 표현을 즐겨 썼다. 기독교가 단순한 도덕 종교나 인격 수양의 종교가 아니라 생명의 종교라는 말이다.

스펜서 존슨(Spencer Johnson)의 『선물』(The Present)에 보면 한 노인이 소년에게 인생의 가장 중요한 선물을 주겠다는 대화를 펼치면서 정작 선물의 내용은 얘기해주지 않는다. 그저 스스로 찾아야 한다는 암시만 줄 뿐이다. 소년은 성년이 될 때까지 많은 시행착오를 겪으며 살다가 어느 날 옛날 그 노인을 만나 그분이 가장 행복한 분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다시 인생의 진지한 대화를 나누다가 드디어 인생 최고의 선물을 찾는다. 그 선물은 바로 ‘현재’(The Present)라는 단순한 진리였다. 현재를 뜻하는 영어 단어가 선물이란 뜻도 된다. ‘The Present는 곧 The Present’, 현재가 곧 선물이다.

성경은 현재 내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밝히고 있다. 그 선물이 구원과 영생이다. 세상에서 가장 비싼 선물, 그 선물을 하나님은 믿으면 그냥 주신다고 했다. 공짜라는 얘기다. 얼마나 엄청난 선물인가? 기억하자. 하나님이 생명이시다. 빛이시다. 그 분 안에 모든 부요함과 충만함이 있다. 그런데 ‘이처럼 사랑하사’, 그 하나님이 우릴 사랑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그 사랑에 걸맞는 사랑의 삶을 살아야 한다.

인천신기중앙교회 담임 이희우 목사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희우 #기독일보 #기독일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