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펜젤러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전 기감 교육국 총무 김낙환 목사(D.Min)
아펜젤러기념사업회 사무총장, 전 기감 교육국 총무 김낙환 목사(D.Min)

다. 뛰어난 졸업 연설

우남은 1897년 7월 8일에 배재학당을 졸업하였다. 이 날 개최된 배재학당 졸업식에서 그는 미국 대학에서 본 딴 졸업생 대표 연사로 선정되어 배재학당 장 아펜젤러 및 서재필은 물론 벙커(Dalize A. Bunker) 존스(George H. Jones), 헐벗( Homer B. Hulbert) 등 선교사 내지 교사들과 미국 공사관의 씰(John M. Sill)공사와 알렌(Horace N. Allen) 서기관, 그리고 영국 총영사 조오단(J.N. Jordan) 등 외국인 하객 그리고 궁내부대신 이재순, 내부대신 박정양, 탁지부대신 심상훈, 법부대신 한규설, 학부대신 민종묵, 농상공부대신 이윤용, 군부대신 안경수, 학부협판 윤치호, 한성부 판윤 이채연, 전 일본 공사 이하영 등 정부의 여러 고급 관료들을 포함한 천여 명의 청중 앞에서 한국 역사상 처음으로 영어 연설을 행하고 독립가(獨立歌)를 불렀다.

아펜젤러가 편집하는 월간 영문잡지,『한국소식, The Korean Repository』에도 이날의 행사에 대해 언급하고 있는데, 우남과 관련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제 막 피어오르는 이 졸업생 대표는 "한국의 독립(The Independence of Korea)"이라는 주제를 택했는데, 이는 한국에서는 처음 있는 대학 졸업 예식에서의 주제로 매우 적절한 것이었다. 이 나라의 독립만이 젊은이들이 받아온 훈련의 결과를 필요로 하는 일터를 제공할 것이다. 국가의 독립은 실질적이고, 굳건하며, 영속적이어야 한다는 것이 행사에 활기를 불어넣어 주는 것 같은 그날의 정신이었다. 이씨의 어법은 상당히 좋았고, 그의 감정은 거침없이 표현되었으며, 그의 발음은 똑똑했고, 명확했다." (이정식 『이승만의 구한말 개혁운동』 p.50.)

우남의 연설 제목은「한국의 독립(Independence of Korea)」이었다. 이 연설 제목은 제목 자체가 시기적절 했을 뿐만 아니라, 우남의 영어 어휘 구사와 표현 방법이 돋보였기 때문에 졸업식에 참석하였던 하객들로부터 크게 칭찬을 받았다. 배재학당에서 행한 이 연설을 계기로 우남은 일약 온 장안이 주목하는 유망한(Embryonic) 청년으로 부상했던 것이다. 우남의 영어연설과 관련해 독립신문의 영문판에서는 그의 연설은 창의적이었는데, 그는 한국과 중국의 과거의 관계를 그리고 청일전쟁을 통한 한국독립의 성취과정을 뒤돌아보고, 한국이 현재 직면하고 있는 과제들과 위태로운 사항에 대하여 논의를 전개하였으며 그의 거침없는 말들은 관객들로부터 열렬한 박수를 받았다고 평하였고 윤치호도 ‘한국의 독립’이라는 영어연설은 좋았다고 자신의 일기에 적고 있다.

22세에 배재학당을 졸업한 우남은 1898년 1월 1일 협성회의 초대 회장이며 배재학당의 조교사였던 양홍묵과 함께 주간지『협성회보』를 창간하여 그 주필이 되었다. 이로써 그는 언론인, 즉 사회적 공인으로서의 첫발을 내디딘 것이다. 그러나 그 후 몇 달이 지나자 아펜젤러 당장이 회보에 실릴 원고에 대해 사전 검열을 받으라고 요구하였기 때문에 우남은『협성회 회보』를 포기하고, 그 대신 유영석, 최정식 등 동지들과 함께 1898년 4월 9일 순 한국인이 만든 최초의 일간지인『매일(每日)신문』을 창간하여 이 신문의 주필 겸 사장직을 맡게 되었다.

그 후에 협성회의 직제개편을 둘러싸고 내분이 발생, 우남이 그 회에서 제명 처분되자, 그는『매일신문』에서도 손을 떼고 1898년 8월 10일 이종일과 함께『제국신문(帝國新聞)』을 창간하여 이 신문의 주필 내지 논설자로 활약하였다. 순 한글의『제국신문』은 부녀자들과 하층민들을 대상으로 기획된 신문으로서 1910년 9월에 폐간될 때까지 국한문 혼용체의『황성신문』과 쌍벽을 이루면서 민중계몽을 선도하였다. 매일신문은 1899년 4월 4일에, 독립신문은 그 해 12월 4일에 폐간되었다. 우남은 『제국신문』논설자로서 1년 2개월간 그 신문의 논설을 집필하였으며 한성감옥에 투옥된 다음에도 2년 2개월간 (1901년 2월-1903년 4월) 이 신문에 논설을 기고하였다.

배재학당을 졸업한 이승만은 한편으로는 언론인으로서 필봉을 휘두르고, 다른 한편으로는 1896년 여름 서재필이 창립한 「독립협회」의 회원으로서 이 협회가 추진하는 정치개혁 운동의 선봉에 섰다. 특히 그는 1898년 3월부터 발동된 독립협회의 만민공동회 운동에서 선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만민공동회는 서재필의 발상으로 이루어졌으며 아관파천(俄館播遷) 후 노골화된 제정러시아의 한국 침략정책을 사전에 막으려는 민중시위 운동이었다. 우남은 1898년 3월 10일 러시아의 부산 절영도 조차(租借) 요구에 반대하기 위하여 종로에 모인 제일차 만민공동회의에서 가두연설을 행하여 민중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웅변가로 인기를 모았고, 이 모임의 총대 위원으로 선출되어 만민공동회의 결의서를 외부대신 민종묵에게 전달하는 임무를 맡기도 하였다. 우남은 이 만민공동회를 통하여 당시 황실을 상대로 투쟁하였고 첫 승리를 거두게 되어 17명의 개화파 인사들이 석방되는 경험을 하게 된다. <계속>

※일부 각주는 지면상 생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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