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희 목사
이태희 목사

어떻게 해야 우리의 완악한 마음이 고침을 받고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변화될 수 있을까?

(1) “하나님의 생각”과 “나의 생각”이 다르다는 사실을 먼저 인정해야 한다.

“여호와의 말씀에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사 55:8-9)

물론 “하나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이 항상 다른 것은 아닐 것이다. 그래서 무조건 내 생각과 반대로만 생각하면 하나님의 생각을 알 수 있다는 그런 기계적인 방식으로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오해다. 이 말씀의 보다 본질적인 의미는 하나님의 생각과 인간의 생각은 하나님과 인간이 서로 다른 것처럼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는 사실을 말씀하고 계신 것이다. 하나님은 창조주요 인간은 피조물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수준”과 “인간의 수준”은 다를 수 밖에 없으며, 그래서 “하나님의 관점”과 “인간의 관점”이 다를 수 밖에 없는 것이고,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과 “인간의 뜻”은 하늘과 땅 만큼이나 다를 수 밖에 없음을 인정하는 마음, 즉 “겸손한 마음”을 가져야만 한다는 의미다. 바로 이 겸손한 마음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는 착하고 좋은 마음이다. 그리고 이 마음이 솔로몬이 구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하는 종의 마음”이다. 생명의 근원인 우리의 마음을 지켜야 한다는 솔로몬의 잠언은 바로 이와 같은 “겸손한 마음”을 지켜야 함을 의미하는 것이다.

(2) “하나님의 생각”이 “나의 생각”보다 더 높고 더 좋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완악한 마음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언제나 나의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보다 더 좋다고 생각하는 것에 있다. 나의 길이 하나님의 길보다 더 높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병들고 완악한 마음의 특징이다.

“내 백성이 두 가지 악을 행하였나니 곧 그들이 생수의 근원되는 나를 버린 것과 스스로 웅덩이를 판 것인데 그것은 그 물을 가두지 못할 터진 웅덩이들이니라.” (렘2:13)

“터진 웅덩이” 주제에 “생수의 근원”을 무시하는 마음이 완악한 마음의 본질이다. 바로 이 완악한 마음 때문에 사람의 인생이 지옥같은 인생이 되는 것이고, 결국 죽어서는 영원한 지옥 불로 떨어지게 되는 것이다. “생수의 근원”보다 자기의 길과 자신의 생각을 더 높이 여기는 “터진 웅덩이”에게 주어질 수 있는 운명은 지옥 밖에는 없는 것이다.

“나아만이 노하여 물러가며 이르되 내 생각에는 그가 내게로 나와 서서 그의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고 그의 손을 그 부위 위에 흔들어 나병을 고칠까 하였도다. 다메섹 강 아바나와 바르발은 이스라엘 모든 강물보다 낫지 아니하냐. 내가 거기서 몸을 씻으면 깨끗하게 되지 아니하랴 하고 몸을 돌려 분노하여 떠나니” (왕하5:11-12)

“나아만이 이에 내려가서 하나님의 사람의 말대로 요단 강에 일곱 번 몸을 잠그니 그의 살이 어린아이의 살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왕하5:14)

(3) 그러므로 “나의 생각”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여야 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님의 생각보다 나의 생각이 더 높고 더 좋게 느껴진다면 하나님은 창조주요, 나는 피조물이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은 “생수의 근원”이시요 나는 “터진 웅덩이”라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한다. 그래야 우리의 완악한 마음이 착하고 좋은 마음 밭으로 고침을 받을 수 있다. 이것이 모든 생명의 원천이 되는 우리의 마음을 착하고 좋은 마음으로 지킬 수 있는 방법이다.

그런데 여기서 제가 한 가지 정말 궁금하고 이해가 되지 않는 점이 하나 있다. 우리는 도대체 왜 이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 것일까? 피조물인 나의 뜻을 내려 놓고 창조주인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것이 그렇게 어려울 일인가? 터진 웅덩이가 생수의 근원에게로 돌아가는 것이 그토록 어려울 일인가? 사람이 더 좋은 길, 더 높은 길을 사모하고 갈망하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 그렇다면, 피조물이 창조주의 생각을 사모하고 갈망하는 것이 그토록 어려울 일인가? 그런데 우리는 왜 그것이 그렇게 안 되고, 그렇게 어려운 것일까? 그래서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이 땅에서 지옥같은 삶을 살다가 결국에는 영원한 지옥불로 들어가게 되는 것일까?

그 이유는 하나다.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만일 우리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끊임없이 하나님의 생각과 하나님의 길에 대해 의심의 눈초리를 보낼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우리의 길보다 하나님의 길을 더 갈망하려면,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깊이 알아야만 한다. 나의 뜻보다 하나님의 뜻을 더 갈망하는 삶은 우리의 “의지”로 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오직 “사랑”으로만 될 수 있는 일이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신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의지도 제대로 발동할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 (빌 3:7-9)

이것이 우리의 의지로 될 일인가? 이것은 우리의 의지로 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오직 사랑으로만 될 수 있는 일이다. 나를 향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았기 때문에 그동안 자신에게 유익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들이 오히려 자신을 해롭게 하는 배설물처럼 여길 수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은 의지의 힘이 아니다. 사랑의 힘이다.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딜 수 있는 힘은 오직 하나 “사랑”으로부터 말미암는 것이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 이것이 나로 하여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갈대아 우르를 떠날 수 있게 만드는 힘이요,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확신, 이것이 바로 “나의 뜻대로 하지 마시옵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옵소서” 기도하며 십자가를 지고 골고다 언덕으로 올라갈 수 있게 만드는 힘인 것이다. (계속)

이태희 목사(그안에진리교회 담임, 윌버포스 크리스천 스쿨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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