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민호 목사
김민호 목사(회복의교회 담임)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요 8:32)

이 위대한 성경 구절은 미국 CIA(미국 중앙정보국) 본부 현관 입구에도 새겨져 있을 정도로 유명하다. 그러나 이 구절은 유명세에도 불구하고 CIA뿐 아니라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도 별 영향을 주지 못한다. 교회에서조차 이 구절은 피상적으로 취급될 뿐이다.

이 구절을 접할 때, 우리는 “도대체 진리가 어떻게 우리를 자유롭게 한다는 거야?”라는 질문을 얼마나 던져 보았는가? 성경 구절 자체에 어떤 신비적인 마력이 있어서 성경을 암송하면 자유케 된다는 것인가? 아니면 진리가 정확하게 선포되는 설교를 들으면 자유롭게 된다는 것인가? 물론 예수님의 공생애 사역을 보면 진리를 증거하시는 곳마다 자유케 되는 일이 뒤따랐다. 질병과 악한 영들과 죄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 그러나 정작 오늘날 우리가 사는 시대에 복음이 선포되는 곳에서 이런 현상은 매우 생소하다. 강단에서 끊임없이 진리가 선포되지만 이런 현상은 거의 보기 어렵다. 아무리 성경을 읽어도 달라지지 않는다. 문제가 어디에 있는 것인가? 사람들이 흔히 말하는 소위 영빨 문제인가?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우리는 먼저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고 한 말씀의 진정한 의미부터 이해해야 한다. 이 말씀은 진리를 통해 율법과 죄로부터 해방을 선언하신 것이다.

그러면 진리를 알지 못하는 사람들은 어떻게 율법과 죄의 노예로 살고 있다는 것인가?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도 이 말씀을 납득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들은 예수님의 이 선언을 듣고 자신들이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요 8:333)고 반문했다. 이 질문에 예수님은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34절)고 설명하셨다.

예수님의 이 말씀을 염두에 두면서 우리는 한 가지 놀라운 논리를 발견하게 된다. 진리는 사람들로 하여금 자유를 주고, 거짓은 반대로 노예의 삶을 준다는 것이다. 아담과 하와가 진리의 말씀을 따랐다면 자유인의 삶을 살았을 것이다. 그러나 사탄의 거짓에 귀를 기울임으로 죄의 노예가 되고 말았다. 여기서 우리가 자유인의 삶과 노예의 삶을 결정짓는 핵심이 “오직 믿음”(sola fide)에 있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거짓을 믿으면 노예의 삶을 살게 되고, 진리를 믿으면 자유인의 삶을 살게 된다. 어느 쪽을 믿느냐가 이 둘을 결정짓는다.

이를 이해하기 쉽게 다른 말로 표현해 보자. 사탄은 미신으로 사람들을 미혹하여 미신의 노예가 되게 한다. 학생들은 시험 당일에 머리를 감으면 배운 것이 잊게 된다거나, 미역국을 먹으면 미끄러진다고 믿는다. 교인들도 새해 첫날 뽑은 성경 구절로 자신의 1년의 삶이 결정된다고 믿는다. 혹은 무당이나 점쟁이의 불길한 말을 믿으면 그 말의 지배를 받는다. 사탄은 이런 거짓으로 사람들을 노예로 만든다. 이런 거짓을 믿으면 노예가 되지만, 성경의 가르침을 믿고 이런 미신을 무시하면 자유롭게 된다.

미신만 문제가 아니다. 사탄은 매스컴이나 인터넷을 사용하여 돈, 명예, 성공, 쾌락이 우리의 행복과 안전과 평안을 보장해 준다고 믿도록 한다. 영화나, 인스타그램, 혹은 패이스북은 이런 일을 더욱 가속화 했다. 이것을 믿는 사람들은 돈과 명예와 성공과 쾌락의 노예로 살게 된다. 우리 주변에는 이런 것들이 주는 거짓에 속아 노예로 사는 사람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오늘날 기독교 문화권을 위협하는 네오 막시즘은 공교육과 매스컴과 SNS를 장악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쾌락의 무제한적 충족이 행복을 보장한다고 믿도록 세뇌하고 있다. 빌헬름 라이히나 마르쿠제는 프로이트의 성적인 욕구 이론을 발전시켜 성적 욕구의 자유로운 분출이 사람들에게 진정한 행복을 보장한다고 가르친다. 특히 마르쿠제의 “에로스 사회 건설” 이론은 어린 아이들의 성 경험 장려, 포르노와 마약의 합법화, 근친상간, 수간, 시간의 대중화를 주장한다. 이런 주장을 ‘믿으면’ 쾌락의 노예가 된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을 ‘믿으면’ 자유롭게 된다.

그런데 자연인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이런 것들의 거짓됨을 눈뜨고 거부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렇다고 달라지는 것은 없다. 왜냐하면 이런 거짓을 믿지 않지만, 또 다른 거짓에 대한 믿음으로 향하기 때문이다. 세상 철학이나, 종교적 수행, 금욕적 삶이 자신들에게 자유를 줄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믿음은 그들을 또 다른 극단적 노예의 길을 걷게 한다. 그들은 단지 극단에서 또 다른 극단이라는 거짓을 믿고, 다른 방식의 노예가 될 뿐이다. 이 또한 거짓에 속지 않은 사람들을 속이기 위한 사탄의 또 다른 거짓에 불과하다.

그러므로 자유로운 삶을 살기 위해 반드시 충족되어야 할 필요충분조건은 진리와 믿음이다. 진리를 알지만 믿지 않거나, 믿음은 있지만, 진리가 아니면 뫼비우스의 띠처럼 아무리 노력을 해도 노예의 삶을 벗어날 수 없다. 그러므로 주님은 자유를 원하는 사람들에게 진리이신 자신에게 오라고 초청하신다. 성경은 오로지 그리스도 안에만 참된 행복과 안전과 평안이 있다고 가르친다.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 들어올 때, 비로소 자유롭게 된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만이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 안에만 자유함이 있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자유가 없다. 오로지 노예의 길뿐이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왜냐하면 사람은 본성적으로 진리를 믿기를 원치 않기 때문이다. 진리를 머리로 알 수는 있다. 그러나 믿는 것까지 가려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진리를 믿으려면 이제까지 자신이 믿던 재물과 성공과 명예와 권력과 쾌락 같은 것들에 대한 불신을 선언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달콤한 것을 향해 불신을 선언하기란 낙타가 바늘귀를 들어가는 것만큼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거짓을 불신하고 진리만을 믿기 위해서는 오직 성령의 은혜가 있어야 한다. 바울의 가르침처럼 주의 영이 계신 곳에만 자유가 있다(고후 3:17). 성령이 아니고서는 자유케 하시는 예수를 주인으로 시인할 수 없다(고전 12:3). 따라서 성령을 자유케 하는 영이라 한다. 누가복음 4:18은 성령이 그리스도에게 임한 이유를 희년(은혜의 해)와 관련하여 설명한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눅 4:18)

그뿐만 아니다. 성령님은 신자를 진리 가운데로 지속적으로 인도하기 위해 오셨다.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는 방식도 “오직 믿음”이다. 성령님은 신자들이 처음 믿을 때만 거짓을 불신하고 진리를 믿도록 하는 것이 아니다. 계속해서 거짓을 불신하고, 진리를 믿는 믿음으로 인도하기 위해 오셨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를 지속적으로 노예의 길에 빠지지 않도록 인도하신다. 그러므로 진리 안에서 자유롭게 된 사람들은 더 이상 돈과 성공과 명예와 권력과 쾌락이 우리에게 행복을 준다는 것을 믿지 않는다. 세상이 끊임없이 이런 것들을 믿도록 미혹하지만, 이 거짓과 싸운다. 그러나 진리 안에서 자유를 맛보지 않은 사람들은 결국 미혹 앞에서 무너지고 만다.

“악한 자의 나타남은 사탄의 활동을 따라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멸망하는 자들에게 있으리니 이는 그들이 진리의 사랑을 받지 아니하여 구원함을 받지 못함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미혹의 역사를 그들에게 보내사 거짓 것을 믿게 하심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모든 자들로 하여금 심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살후 2:9-12)

진리의 성령을 받은 사람은 거짓을 믿지 않는다. 사탄은 끊임없이 모든 능력과 표적과 거짓 기적과 불의의 모든 속임으로 ‘거짓을 믿도록’ 유혹하지만, 진리의 성령은 성도들로 하여금 거짓을 믿지 않도록 하신다. 이렇게 하여 죄와 사탄에게 노예로 살지 않도록 하신다.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없는 사람들은 거짓 것을 믿게 된다. 왜냐하면 그들은 “진리를 믿지 않고 불의를 좋아하는” 본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 본성 때문에 그들은 스스로 심판을 자처하게 된다. 우리는 매 순간 자신이 거짓 것을 믿어 노예의 삶을 선택하고 있는지, 아니면 고난을 당하더라도 진리를 믿으며 자유인으로 살아가는지 자문해 보아야 한다. 이 두 개의 길은 “오직 믿음”(sola fide)으로 판가름 난다.

주님은 갈릴리 바다의 풍랑으로 두려워 떠는 제자들에게 어떤 질문을 하셨는지 떠올려 보자.

“너희 믿음이 어디 있느냐”(눅 8:25)

지금도 주님은 우리에게 날마다 동일한 질문을 던지고 계신다.

김민호 목사(회복의교회 담임, 카도쉬아카데미 자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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