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진수 교수
가진수 교수

어린 시절 집 책꽂이에 있어 우연히 읽었던 책이 안이숙 사모님의 일제시대 신앙의 절개와 모범을 다룬 『죽으면 죽으리라』입니다. 후에 이 책의 제목이 에스더가 왕에게 나아갈 때 죽음을 각오하고 선언한 에스더서의 극적인 내용임을 알고 감동된 적이 있습니다.

옛 스코틀랜드 속담에 “우연이란 하나님이 자신을 밝히지 않기로 하신 작은 기적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우리가 비록 보이지 않고 알지 못하더라도, 하나님은 항상 우리의 삶에서 일하고 계시다는 것을 에스더서는 말해줍니다. 하나님께서는 겉보기에 평범한 일을 사용해서 비범한 일들로 만드실 수 있는 분입니다.

에스더 2장 7절에 나오는 ‘에스더’의 원래 이름은 ‘하닷사(Hadassah)’입니다. ‘하닷사’는 히브리어로 ‘은매화’를 뜻합니다. 에스더가 자신의 히브리 고유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고 ‘별’을 의미하는 페르시아 이름 ‘에스더’로 바꾼 것은 ‘별’이 고대 페르시아에서 우상이었던 점을 고려했을 때, 그녀가 페르시아 문화에 적응하고 동화되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는지 잘 보여줍니다. 이는 에스더가 유대 백성들이 이방 나라에서 어려움을 이기고 승리하는 중요한 역할이었음을 암시합니다. 하나님은 이 모든 것을 주관하시고 우리의 생각과 지혜를 감찰하시는 분이십니다. “여호와의 눈은 어디서든지 악인과 선인을 감찰하시느니라”(잠 15:3)

에스더서의 배경인 바벨론 포로 기간은 역사적으로 유대인에게 커다란 사건이었습니다. 유대 역사는 사라졌고 유대인은 더 이상 국가가 아니었습니다. 성경에는 포로 시기나 포로 후에 대해 역사적으로 크게 다루지 않고 있는데, 일부 그 시대의 정신이 다니엘서와 에스더서를 통해 남아 있을 뿐입니다.

에스더서는 오래전부터 이스라엘의 5대 절기 때마다 모든 회당에서 읽혀진 다섯 두루마리 중의 하나입니다. 매년 반복되는 낭독은 에스더서가 성경에 포함된 원인 중 하나이며, 소설적인 특성과 종교적 색채가 적어서 가장 늦게 성경에 포함되었습니다. 다섯 두루마리의 순서는 솔로몬의 아가, 룻기, 예레미야애가, 전도서, 에스더인데, 에스더서가 다섯 번째에 오는 이유는 다섯 번째 절기인 부림절(에 3:7, 9:26)에 읽혀지기 때문입니다. 부림절은 유대인이 그들의 적들로부터 승리한 일을 기념하는 유대인의 중요한 축제입니다.

한편 에스더서는 예배와는 관련이 적은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등장하거나 언급되지 않은 유일한 성경으로 희생과 제물에 관한 율법의 내용이나 제사장의 내용을 포함하고 있지 않으며, 기도 모습이나 찬미의 노래가 불리지도 않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심판과 언약을 선포하는 선지자들이 등장하지 않으며 주님이 구원하시는 역사가 직접적으로 언급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에스더서 9장의 부림절 축제만 하더라도 유대인의 구원에 대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지 않습니다.

하지만 유대인을 제거하려는 적으로부터 승리를 거두는 숨 가쁜 줄거리는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이야기는 페르시아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이곳은 망명한 이후에 많은 유대인들이 남아있던 곳입니다. 에스더서는 긴장감과 흥미로운 이야기로 왕의 여인들이 생활하는 곳 하렘과 호화로운 연회, 기만적인 신하, 암살 음모, 처형 등을 비롯해 ‘선한 사람들’이 반드시 이긴다는 결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이 그들의 적으로부터 결국 승리를 거둔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우리는 에스더서의 ‘우연들’ 뒤에 있는 하나님의 숨겨진 손길을 쉽게 볼 수 있습니다. 모르드개가 에스더에게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닌지 누가 알겠는가”라고 질문할 때, 우리는 하나님이 에스더뿐만이 아니라 페르시아 제국을 지휘하고 계셨음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예배자들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예배한다는 것은 믿음의 눈을 들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 11:6)

에스더서는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지 않더라도 예배해야한다는 도전을 줍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분명히 알고 있으며, 성령님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듣기도 합니다. 하지만 때로는 그렇지 않을 때가 있으며, 자주 우리 삶에 하나님이 계심을 잊기도 합니다. 특별히 어려운 일을 당하거나 역경이 닥치면 오히려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하나님을 느끼든 그렇지 않든 우리의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일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합니다. 우리는 지금 하나님을 직접적으로 경험할 때뿐 아니라 과거 하나님이 역사 속에서 하신 일들과 나의 삶 속에서 이루신 은혜와 감사로 인해 하나님을 예배합니다. 비록 고통의 장막으로 우리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지 못할 때라도, 우리는 하나님이 예배 받기 합당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예배해야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물이므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그분을 영원히 즐거워하는” 사명을 수행할 때 가장 기쁜 일이기 때문입니다. 에스더서는 눈에 보이진 않지만 믿음의 눈을 들어 우리의 삶에서 운행하시는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느끼라고 예배자들에게 권면합니다.

에스더서는 매력적인 인물들과 긴장감 넘치는 흥미로운 이야기를 크게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습니다. 첫 번째 에스더 1-2장은 사촌 모르드개의 보살핌을 받는 에스더라는 젊은 유대 여인을 소개하는데, 후에 페르시아 왕 아하수에로의 부인이 됩니다. 두 번째 에스더 3-4장은 기회주의자이자 유대인에 반감을 품고 있는 인물 하만에 초점을 맞춥니다. 그는 유대인을 위협하고 그들에 대한 왕실의 보호를 없애려고 합니다. 하만은 모르드개가 자신을 왕궁의 귀족으로 높여주지 않는 것을 보고, 모르드개를 반역자로 고발하며 페르시아 제국에 있는 모든 유대인들을 죽이고자 하는 음모를 꾸밉니다.

세 번째 에스더 5-8장에서 에스더는 왕이 자신의 청원을 호의적으로 들을 수 있게 분위기를 만들고 그녀의 백성들을 위해 움직입니다. 그 와중에 하만은 모르드개를 처형할 준비를 합니다. 긴장감 넘치는 이야기는 마지막 부분인 에스더 9-10장에서 절정에 달하는데, 여기서 에스더가 아하수에로 왕에게 하만의 음모를 폭로합니다. 유대인들이 왕을 배신하지 않았음을 알게 되고, 모르드개가 아닌 하만이 진정한 반역자임이 밝혀집니다. 아이러니하게도 하만은 모르드개를 위해 만든 교수대에 자신이 매달리게 되며 유대인들은 왕의 보호를 받게 됩니다.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자신들에게 적이 있다는 것을 알지 못하지만 성경은 우리에게 적이 있음을 분명히 알려줍니다. 다윗이 시편을 통해 얼마나 자주 적들과 싸우고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호소했는지 잘 압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들은 반대자들에게 늘 어려움을 당합니다. 신약성경 여러 곳에 우리의 진짜 적은 영적인 세력인 사단의 군대임을 알려줍니다. 바울 역시 이를 ‘십자가의 원수’라고 했습니다. “내가 여러 번 너희에게 말하였거니와 이제도 눈물을 흘리며 말하노니 여러 사람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행하느니라”(빌 3:18) 그리고 요한은 그리스도인 공동체의 일부였으나 현재는 대적하고 있는 ‘적그리스도’라고 했습니다. “아이들아 지금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요일 2:18)

그러므로 에스더서의 수많은 계략과 함정을 가진 적들을 물리친 승리는 예배의 승리라 할 수 있습니다. 예배는 어두운 사단의 세력에 대항하여 전쟁을 벌이고 하나님의 승리하심을 선포합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언제나 모든 것을 완벽히 통제하시고 그분의 길에 대항하는 자들의 패배를 선언하신다는 것입니다.

에스더서는 하나님을 단지 우리가 인식하지 못할 뿐, 항상 그분의 선한 뜻을 이루시기 위해 배후에서 일하시며 역사를 통치하고 계시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하나님은 마치 인생이라는 연극에서 주인공인 우리들을 감독하고 연출해내시는 분과 같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존재나 능력을 부정하는 사람들조차 사용하셔서 개인이나 교회 그리고 세상을 향한 그분의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여전히 일하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인정하고 삶에서 일어나는 모든 사건들을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과 자비하심을 찬양해야할 것입니다.

에스더서는 하나님께서 침묵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기적적인 개입을 발견하게 만듭니다. 이는 비록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에서 혹 하나님의 뜻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해서 하나님의 관심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어떠한 상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주권적인 섭리를 믿고 그 분을 의지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우연히 발생되는 사건들 역시 모두 하나님의 손에 달려있음을 알게 됩니다. 그리고 에스더서는 하나님께서 보이지 않는 곳에서 철저히 자기 백성들을 위해 움직이고 계심을 증명해줍니다.

또한 에스더서는 하나님의 백성들을 말살하려는 악의 세력이 존재하고 그 곳에는 언제나 거룩한 영적 전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가르쳐줍니다. 하만이 모르드개를 공개처형하고 더 나아가서 유대인 전체를 말살하려는 이유는 그가 아말렉 족속의 왕인 아각의 후손이기 때문입니다(에 3:1). 아말렉 족속은 출애굽한 이스라엘에 대항한 첫 번째 민족이었습니다(출 17장, 민 24:20). 이후 사울이 첫 번째 왕이 되었을 때 하나님은 아말렉을 치라고 하셨는데, 바로 아말렉의 왕이 아각입니다(삼상 15장). 따라서 유대 기스의 후손인 모르드개가 아말렉 후손인 아각에게 절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 때 하만은 모르드개가 유대인임을 알자 전 유대인의 진멸계획을 세웁니다(에 3:5-6). 아말렉의 자손인 하만은 그 당시에 있어서 하나님의 통치를 반대하는 세상의 전체 세력을 대표합니다. 따라서 에스더서는 하나님의 길을 따르려는 하나님의 백성과 하나님 나라를 대항하는 세력과의 치열한 영적전쟁과 같습니다.
한편 에스더서는 하나님의 섭리와 함께 우리의 결단을 강조합니다. 에스더서가 페르시아에 살고 있는 유대인들의 멸절의 위기로부터 인도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로운 섭리를 강조하고 있지만, 적극적인 지혜와 결단, 간절한 기도의 태도가 필요함을 알려줍니다. 우리는 어떤 역경을 당할 때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하나님께 적극적인 기도가 필요하며 어려움을 이겨내려는 용기와 결심이 필요합니다. 에스더가 아하수에로 왕 앞에 나아가기로 스스로 결정한 것은 하나님의 계획 속에 에스더의 용기 있는 결단에서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하나님이십니다(마 1:23).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일하기를 원하시고 우리의 손과 발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시간에 주권적 섭리로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가시며 그의 백성들을 보호하고 인도하십니다. 이것이 은혜이며, 변하지 않는 본질을 붙잡는 것이 참된 예배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예배자로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언제 어디서나 우리를 통해 예배 받으시기 원하십니다. 우리가 당한 어려움과 역경조차도 ‘하나님의 때(카이로스)’에 따라 선함으로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에스더서는 하나님의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께서 보호하시고 함께하신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닫게 합니다.

점점 우리의 삶이 분주해져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깨닫지 못하고 예배의 삶을 살기 어려워지는 이 때에 에스더서는 하나님을 우리의 삶에서 느끼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사단의 장중에 놓여있는 세속의 물결이 우리를 쓰러뜨리려는 지금 이 시대에 에스더서는 우리에게 명확한 결단과 영적 선언을 촉구합니다.

“죽으면 죽으리이다”(에 4:16)

가진수(월드미션대학교 예배학과 교수)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가진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