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지는 최더함 박사(Th.D. 바로선개혁교회 담임목사, 개혁신학포럼 책임전문위원)의 논문 ‘구원론’을 연재합니다.

최더함 박사
최더함 박사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 20:28)

“이것은 죄 사함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해 흘리는 바 나의 피 곧 언약의 피니라”(마 26:28)

“나는 선한 목자라 내가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은지 나는 양을 위해 목숨을 버리노라”(요 10:14~1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롬 5:8)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 9:13~14)

1. 그리스도의 속죄

하나님의 구원 계획에서 가장 위대한 것이 무엇입니까? 실로 이 계획은 그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기상천외한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지으신 영적인 존재 중 가장 영리하다고 하는 사탄마저 이 계획을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무슨 계획이었습니까? 즉, 자신이 직접 인간의 모습으로 지상에 내려와 인간이 지은 모든 죄 값을 치루기 위해 몸소 인간으로서 겪어야 하는 모든 고난의 삶을 살고 죽음을 통해 구원의 길을 열도록 한 계획입니다. 바로 이 위대한 죽음의 사역을 감당하신 분이 영원한 하나님의 아들이자 성자 하나님이시자 우리의 구원자시오 주님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위대한 사역을 일러 신학적으로 그리스도의 ‘속죄 사역’이라 부릅니다.

‘속죄’를 나타내는 히브리어 ‘코페르’는 원래 ‘덮는다’라는 뜻을 가진 ‘카파르’에서 유래했습니다. 그러므로 신학적으로 ‘속죄’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로에 힘입어 죄인의 죄가 덮어졌다’는 뜻입니다. 이것을 신약성경에서는 ‘뤼트론’으로 번역했는데 이것은 ‘몸값을 지불하고 노예를 구해 준 행위’를 가리키는 것으로 속죄의 의미를 구약에서보다 더 적극적인 의미를 첨가한 것으로 봅니다. 즉, 죄를 단순히 덮어주는 것으로만 머물지 않고 한발 더 나아가 죄인에게 자유를 선물한 것으로 풀이한 것입니다. 이 자유를 위해 그리스도가 스스로 속전을 위한 제물이 되어 값을 치루었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대속물’ 혹은 ‘속전’이라 말합니다. 마 20:28에서 이렇게 증언합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한 마디로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달려 죽으셨느냐고 물으신다면 곧 대속의 값을 치루려고 죽으셨다는 것이고, 왜 대속의 값을 치루셨냐고 묻는다면 바로 나를 살리려고 그리하셨다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였습니까? 천하에 악인이었고 죄인이었습니다. 그런데 나 같은 죄인을 위해 주님께서 목숨을 내놓으신 것입니다. 내 죄를 대신 지신 것입니다. 세례 요한은 이런 주님을 두고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 양”(요 12:9)이라 말했습니다. 주님의 속죄하심으로 내 죄가 사라졌습니다. 죄가 사라지니 내가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아무런 공로도 없는 나를 구원시킨 것도 감사한 일인데 그런 나를 의롭다고 인정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죄를 지어 감옥에 갇힌 죄수를 무죄방면 해 주신 것도 감사한 데 자유를 얻은 나를 이제 의인이라 부르신다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의심하고 합리적이냐 아니냐를 가지고 따지기를 좋아하는 불신자들 입장에서도 이 조치는 매우 비논리적인 처사입니다. 말이 안 됩니다. 그런데 사도 바울은 이 불합리한 논리를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오늘 소개한 본문 중 로마서 5:8의 말씀을 다시 되새깁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죽으심으로 하나님이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롬 5:8)

이 말씀을 가지고 하나씩 살펴봅니다.

첫째, 우리가 누구였습니까? 죄인이었습니다. 주님이 언제 죽으셨느냐 하면 우리가 죄인이었을 때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도둑이요 강도로 알려진 사람을 위해 대신 죽겠다고 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까? 아마 그런 죽음은 가장 무가치한 일이라고 생각하면서 무시할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은 도둑이나 강도보다 더 흉악한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고 증언합니다.

둘째, 그리고 이 죽음으로 증명한 것이 무엇이냐고 하면 바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향해 정말로 인간을 사랑한다면 죽음으로 보여줄 수 있느냐고 요청했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도 그렇습니다. 장난삼아 사랑하는 사람을 향해 나 대신 죽을 수 있어? 하고 묻습니다. 이렇게 모든 사람은 사랑을 확인하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우린 말로만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직접 이를 실천했습니다. 진짜 목숨을 버리시고 우리에 대한 사랑을 증명해 보이셨습니다.

셋째, 그 결과 우리가 어떻게 되었습니까? 사도 바울은 그 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게 되었다고 증언합니다. 오늘 소개한 히브리서 기자의 증언을 경청합니다. 세상의 그 어떤 피도 인간의 더러워진 양심을 깨끗하게 만들지 못하지만 오직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피를 흘렸기에 우리의 모든 영적인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 속죄의 핵심입니다.

“염소와 황소의 피와 및 암송아지의 재를 부정한 자에게 뿌려 그 육체를 정결하게 하여 거룩하게 하거든 하물며 영원하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흠 없는 자기를 하나님께 드린 그리스도의 피가 어찌 너희 양심을 죽은 행실에서 깨끗하게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섬기게 하지 못하겠느냐”(히 9:13~14)

한편으로 이 피 흘림은 그리스도의 공생애 전체의 수난을 상징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이 수난의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 2:2, 갈 6:14 참조)고 말했습니다. 즉, 십자가가 피 흘림의 상징이요 기독교 신앙의 핵심적 표라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모든 그리스도인은 십자가를 바라보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적 죽음과 수난과 피 흘림을 기억하고 주님의 속죄가 아니었다면, 거룩한 피 흘림이 없었다면 우리의 죄악이 깨끗하게 씻겨지지 못했을 것이라 믿게 된 것입니다.

여기서 경계해야 할 것은 많은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상에서의 고난과 죽음을 기피합니다. 그들은 그러한 내용들을 황당하고 꾸며낸 신화 같은 것이라고 폄하하고 단지 그분의 가르침과 자비로운 행적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의지하고 본보기로 삼기에 가장 훌륭하고 모범된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양반들에게 예수님은 단지 여러 훌륭한 성인 중의 한 사람에 불과합니다. (계속)

최더함 박사(Th.D. 바로선개혁교회 담임목사, 개혁신학포럼 책임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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