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지는 최더함 박사(Th.D. 바로선개혁교회 담임목사, 개혁신학포럼 책임전문위원)의 논문 ‘구원론’을 연재합니다.

2. 두 개의 은혜

최더함 박사
최더함 박사

신학적으로 이 구원의 은혜는 크게 둘로 나누어집니다. 하나는 일반은혜이고 다른 하나는 특별은혜입니다.

무엇이 ‘일반은혜’입니까? 하나님은 그 선하심과 자비하심으로 자연의 변화를 유지하십니다. 해가 뜨고 달이 뜨고 하는 것이 모두 하나님의 섭리에서 움직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자연을 통해 우리에게 다양한 먹거리를 제공하십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이성의 능력을 이용하시어 과학 문명을 창달케 하시어 우리가 문명의 생활을 하도록 도우십니다. 인간이 아름다운 노래를 즐겨하고 시를 짓고 예술 활동을 하는 것 모두가 하나님이 우리에게 베푸시는 일반은혜의 결과입니다. 이 일반은혜가 없다면 이 지구상에 생명체는 존재하지 않을 것입니다.

한편으로 하나님은 노예가 된 인간이 자신의 능력으로 하나님께로 돌아가지 못한다는 것을 아시고 죄인에 대해 특별한 은혜를 베푸시어 죄인으로 하여금 스스로 순종하고 회심하여 하나님에게로 나아오도록 돕습니다. 이것을 ‘특별은혜’라 부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운명적으로 주어진 원죄가 우리를 무력하게 만들었음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거듭나지 않은 인간 본성은 물려받은 원죄로 인해 부패되고 타락하여 하나님이 은혜로 능력을 주지 않으시면 그리스도께로 올 능력이 없습니다. 이에 대해 어거스틴은 “인간의 의지는 자유를 통해 은혜를 얻을 수 없고, 다만 은혜를 통해서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Admonition and Grace/ 훈계와 은혜). 그는 이 은혜가 ‘특별은혜’로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령께서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며, 새로운 능력이라고 했습니다. 무엇보다 특별은혜는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을 믿도록 역사합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롬 10:12)고 하였듯이 하나님의 말씀이 귀에 들리도록 성령께서 역사하시는데 이것이 신자에게 구원을 적용하시는 특별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정리하면 은혜가 무엇입니까?

은혜는 죽은 자를 살리는 일입니다. 병든 자를 치유하는 일입니다. 슬픔과 절망에 빠진 자에게 기쁨을 주고 소망을 심어 주어 다시 살겠다는 의지를 북돋우는 일입니다. 무엇보다 은혜는 사망의 감옥에서 죄인을 자유롭게 하여 그리스도를 믿게 하고 성령의 세례를 통해 거듭나게 하여 하나님에게로 나아오게 하는 특별한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이 은혜를 받은 자보다 더 큰 선물을 받은 사람은 없습니다.

한편으로 이 은혜의 감격은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에게 허공에 떠도는 빈말일 뿐일 것입니다. 마치 어린아이에게 진리의 깨달음을 아무리 강조하고 설명해도 아이는 눈만 껌벅거린 채 무슨 영문인지 모를 것입니다. ‘소귀에 경 읽기(우이독경)’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 먼저 간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가 정말로 은혜이고 선물인지 믿어지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3. 은혜의 몇 가지 특징들

위의 내용을 바탕으로 살펴보면 은혜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은혜는 값없이 주어집니다.
세미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은 하나님의 은혜는 죄인이 행한 덕있는 행동에 대한 보답으로 주어진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는 인간의 공로에 따라 임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다면 은혜는 더 이상 은혜가 아닙니다. 은혜는 값없이 주어지기 때문에 은혜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엡 2:8)

둘째, 은혜는 효력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주시기로 특정한 사람들을 창세 전에 택하여 두셨습니다. 특정한 사람에게 은총을 주시기로 작정하신 하나님의 뜻은 결코 중단되지 않습니다. 인간의 모든 의지는 하나님의 뜻하시는 바대로 기울고 움직이게 하십니다. 이 은혜의 가르침을 받은 사람은 실제로 그리스도에게로 나아옵니다. 노아 시대에 모든 사람이 패역하고 방탕한 삶을 살아갈 때 오직 의인 노아만 택함을 입어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구원을 얻었습니다. 하나님은 노아를 창세전에 택하시어 그를 통해 인류를 새롭게 하시려고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오늘 본문 창세기 본문이 이를 증명합니다. 다시 읽어봅니다.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가득함과 그의 마음으로 생각하는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 땅 위에 사람 지으셨음을 한탄하사 마음에 근심하시고, 이르시되 내가 창조한 사람을 내가 지면에서 쓸어버리되 사람으로부터 가축과 기는 것과 공중의 새까지 그리하리니 이는 내가 그것들을 지었음을 한탄함이니라 하시니라. 그러나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더라”(창 6:5~8)

셋째, 하나님의 은혜는 매우 은밀하게 임합니다.
하나님의 역사하심은 인간의 능력으로 가늠하지 못합니다. 시련을 거친 욥에게 나타난 하나님은 인간의 생각과 행함이 하나님에 비해 얼마나 턱없이 부족하고 모자라고 무능력한 것임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무지한 말로 생각을 어둡게 하는 자가 누구냐. 너는 대장부처럼 허리를 묶고 내가 네게 묻는 것을 대답할지니라. 내가 땅의 기초를 놓을 때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깨달아 알았거든 말할지니라. 누가 그것의 도량법을 정하였는지 누가 그 줄을 그것의 위에 띄었는지 네가 아느냐, 그것의 주추는 무엇 위에 세웠으며 그 모퉁이 돌을 누가 놓았느냐”(욥 38:2~6)

그런데 이 엄청난 역사하심이 인간에게는 비밀하게 임하고 알려지지 않도록 하셨다는 것입니다. 인간이라면 자신이 한 일을 알아주지 않는다고 토라지고, 자신의 한 일을 부풀려서 어떻게 하든지 ‘이것은 내가 한 일이다’고 소리치며 자랑하는 것이 속성인데 하나님은 이 모든 우주 역사를 창조하시고도 전혀 내색을 하시지 않으신다는 말입니다. 우리의 자랑이 얼마나 헛되고 헛된 것인지 깨달아야 합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진술했습니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풍성함이여, 그의 판단은 헤아리지 못할 것이며 그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았느냐 누가 그의 모사가 되었느냐. 누가 주께 먼저 드려서 갚으심을 받겠느냐”(롬 11:33~35)

이러한 은혜의 역사하심에 대해 어거스틴은 ‘인도하는(preventing) 은혜’와 ‘따르는(subsequent) 은혜’, ‘시작하는(operating) 은혜’, ‘협력하는(cooperating) 은혜’로 나누어 생각했습니다.

1) 인도한다는 것은 하나님이 죄인의 심령을 성령으로 변화시키심으로 죄인의 필요를 자비롭게 미리 만족시켜 주시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죄인을 영적으로 치유하고 새 생명을 주시는 은혜입니다.

“나의 하나님이 그의 인자하심으로 나를 영접하시며 하나님이 나의 원수가 보응 받는 것을 내가 보게 하시리이다”(시59:10)

2) 따르는 은혜란, 그리스도인이 의롭게 사는 것을 가능케 하는 은혜입니다. 그것은 죄의 오염에서 자유롭게 해 주고 그리스도인의 성장을 촉진하는 은혜입니다.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시23:6)

3) 시작하는 은혜는 하나님이 거듭나지 않은 자의 영혼에 그들의 협조 없이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으시는 것을 말합니다.

“너희 안에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 1:6)

4) 협력하는 은혜란 성령께서 거듭난 자가 그리스도인의 삶의 규율에 따라 뜻하고 행동하도록 도우시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나 있을 때뿐 아니라 더욱 지금 나 없을 때에도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빌 2:12~13)

4. 결어

종교개혁가인 마르틴 루터는 인간 본성의 능력에 대한 유명론과 세미 펠라기우스주의의 낙관론에 날카롭게 반대했습니다. 그는 불신자가 자유롭게 자기 의지를 발휘해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율법을 지키며 그로서 구원의 은혜를 받을 자격을 가질 수 있다는 견해를 배격했습니다. 그는 “타락한 인간은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거부감과 하나님에 대한 적대감 이외 가진 것이 없다”고 갈파했습니다.

불신자의 의지는 오직 죄를 짓는 것 이외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가 이 땅에서 아무리 열심히 살고, 노력하고 자신이 세운 목표를 성취하고 이룬다 해도 하나님 나라에서 그가 한 일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래서 전도서 기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전도자가 이르되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에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가 사람에게 무엇이 유익한가”(전 1:2~3)

“마음을 다하며 지혜를 써서 하늘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연구하며 살핀즉 이는 괴로운 것이니 하나님이 인생들에게 주사 수고하게 하신 것이라, 내가 해 아래에서 행하는 모든 일을 보았노라 보라 모두 다 헛되어 바람을 잡으려는 것이로다”(1:13~!4)

우리 인생에서 유일하게 유의미하고 영원한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뿐입니다. 이 은혜가 아니면 우리 인생은 아무것도 아닙니다. 이 은혜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선물이기에 인간의 선의나 공로 따위가 개입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은혜 베풀 자에게 은혜를 베푸시고 징계를 행할 자에게 징계를 내리십니다. 하나님은 야곱은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하시는 분이십니다. 오직 하나님에게만 그럴 자격이 있는 것입니다.

이 신비하고 놀랍고 비밀한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 우리가 숨 쉬고 살고 기동하고 생동하며 희로애락을 가지며 존재하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은혜는 정말로 부질없는 이 인생, 나무토막 같은 이 보잘것없고 무의미한 인 인생을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과 구속하심과 죄 사함과 새 생명을 주심과 영생 복락의 축복하심의 은혜입니다. 저주받은 인생을 축복으로 바꾸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할 뿐입니다. 이 감사의 마음을 가지고 사도 바울의 고백을 기억하면서 평생토록 가슴에 담아두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된 것이니 내게 주신 그의 은혜가 헛되지 아니하여 내가 모든 사도보다 더 많이 수고하였으나 내가 한 것이 아니요 나와 함께 하신 하나님의 은혜로라”(고전 15:10)

최더함 박사(Th.D. 바로선개혁교회 담임목사, 개혁신학포럼 책임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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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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