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지는 최더함 박사(Th.D. 바로선개혁교회 담임목사, 개혁신학포럼 책임전문위원)의 논문 ‘구원론’을 연재합니다.

2. 죄의 결과

최더함 박사
최더함 박사

첫째, 사망이 왕 노릇 합니다.

불행히도 아담의 타락 이후 인간의 상태는 절망적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성경의 기록을 통해 잘 알 수 있습니다. 성경적 관점에서 우리의 죄는 죽음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마지막 행로는 죽음입니다. 하나님은 아담에게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를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고 경고했습니다(창 2:17). 사람은 허물과 죄로 죽었습니다(엡 2:1). 이것을 바울 사도는 “사망이 왕 노릇 한다”고 표현했습니다.

“그러나 아담으로부터 모세까지 아담의 범죄와 같은 죄를 짓지 아니한 자들까지도 사망이 왕 노릇 하였나니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라”(롬 5:14/ 5:17 참조)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죽음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태어나면서 영은 죽은 상태입니다. 단지 몸이 살았으나 잠시 이 땅에 사는 것입니다. 누구도 죽음을 피할 수 없습니다. 1천 년을 살든, 1백 년을 살든 그 기간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결국 모든 인간은 흙으로 지음을 받은 그대로 흙으로 돌아갑니다. 아무리 과학과 의술들이 발달한다 해도 인간의 죽음을 막아낼 방도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죄를 지은 인간에게 내린 영원한 형벌이기 때문입니다. 사형수로 최종 판결을 받으면 그는 국가원수의 특별한 조치가 없이는 영원히 사형수로 살거나 사형집행을 당해야 합니다. 이 사실 자체만 보면 인간에게 내려진 형벌이 얼마나 무서운 것인지 피부로 느끼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가장 무서운 죽음은 죽은 인간의 영혼이 지옥형벌을 받도록 버려졌다는 것입니다. 몸은 흙으로 돌아가고 영혼은 지옥으로 향하는 것이 인간에게 내려진 가장 참혹하고 끔찍한 형벌입니다. 이 정도면 완전히 희망이 없는 것입니다.

둘째,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당했습니다.

영적인 면에서 아담의 죄의 결과는 즉각적이고 절대적인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과의 교제의 기능을 담당한 영이 죽었습니다. 영이 죽자 하나님과 교통이 끊어졌습니다. 교통이 끊어졌다는 것은 관계가 끊어졌고 하늘로부터 주어지는 모든 공급이 중단되었다는 것입니다. 수도꼭지는 있는데 수도관이 끊어진 것과 같습니다.

아담은 하나님이 동산으로 그를 찾아오셨을 때 하나님을 피함으로 교제의 단절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습니다. 그 결과 아담은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되었습니다. 존 스토트는 모든 죄의 결과 중에서 가장 두려운 것이 “소외”라고 말했습니다. 실상 인간에게 가장 숭고하고 복된 운명은 하나님을 알고 그분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고 교제를 나누는 인생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형성으로 지음을 받았기에 이 모든 교제와 교통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런 교제의 길이 단절된 것입니다.

아이들 세계에서 왕따(sense of alienation) 문제가 심각합니다. 문제는 왕따를 시키는 애들은 재미 삼아 한다지만 왕따를 당하는 아이는 하루종일 소외된 상태에서 공포심을 가지고 산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소외’의 문제는 그 효과에 있어서 매우 치명적입니다. 특히 하나님으로부터의 ‘소외’는 절대적인 효과를 낳았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으로부터 소외를 당했다는 것은 단순히 하나님의 도움 없이는 하나님에게로 돌아갈 길을 찾을 능력이 없는 상태에 빠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을 바울 사도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롬 3:10~12)

몽고메리 보이스 목사는 하나님과 관련해서 이 본문을 바로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역설했습니다. 왜냐하면 여기에 나오는 세 단어, 즉 의, 깨달음, 찾음이라는 단어의 관계성 때문입니다.

① 먼저 “의인은 없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의’는 인간적 관점에서 말하는 ‘의’가 아닙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볼 때 모든 사람은 최고로 악한 정도가 아닙니다. 가장 악한 사람이라 해도 어떤 선한 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도둑들 간에도 의리가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나 도둑들의 의는 하나님이 의롭게 보시는 것으로서의 의로움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점에서 의인은 없습니다. 이것은 타락한 인간에게서 진실 된 도덕성을 발견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② 다음으로 ‘깨닫는 자도 없다’라고 했습니다.

죄는 우리의 지성적 영역에도 심대한 영향을 끼쳤습니다. 인간적인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많은 깨달음을 얻습니다. 위대한 철학자들, 선견자들, 정치가들, 기타 각 분야에서 위대한 업적들을 쌓은 사람들은 깨달음의 능력에 탁월한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이 말도 하나님의 영역에서 보면 전혀 깨달음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땅에 속한 자는 땅의 일만 깨닫습니다. 영적인 일을 깨닫는 것은 하나님의 도움이나 지접적인 개입이 없이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바울은 고린도 전서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 2:14)

③ 영의 죽음과 함께 영향을 받은 세 번째 영역은 우리 의지의 부분입니다. 즉,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우리가 죄로 인해 하나님을 찾으려고도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죄를 지은 아담이 하나님을 피해 나무 아래로 숨었듯이 죄인은 하나님을 찾지 않습니다. 의학용어에 ‘근육무력증’이라는 게 있다 합니다. 몸의 근육이 뇌에서 보내는 신호에 반응하지 못해 시들어 가는 병이라 합니다. 뇌가 아무리 신호를 보내도 근육이 반응을 하지 않아 결국 시들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같이 인간의 영은 하나님을 인식하는 기능인데 영이 죽음으로 죄인은 하나님의 모든 신호에 반응하지 못합니다. 동시에 하나님을 찾고 구하는 모든 기능을 상실하고 만 것입니다.

셋째, 책임의 전가

에덴동산에서 행해졌던 인간의 최초의 범죄에서 발견되는 또 다른 죄의 결과가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죄를 지은 뒤 나타나는 책임의 전가입니다. 이것이 죄인의 특징으로 우리에게 남아 우리를 추악하고 구제 불능의 존재로 만들고 있습니다. 먼저 여자가 열매를 따 먹은 뒤 남자에게 열매를 주었고 남자도 그 열매를 먹었습니다. 하나님이 이 사실을 추궁하자 아담은 즉시 이렇게 변명했습니다.

“아담이 이르되 하나님이 주셔서 너와 함께 있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열매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2)

하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도 지목을 받아 즉시 그 책임을 뱀에게 돌립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이르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창 3:13)

여기서 하와는 아담보다 한술 더 뜨고 있습니다. 아담은 단지 여자가 주므로 먹었다고 했는데 하와는 뱀이 자신을 꼬이므로 먹었다고 진술합니다. 여기서 ‘꾀다’는 히브리어로 ‘나샤’(deceive)인데 ‘속이고 유혹하다’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해 하와는 이 단어를 사용하면서 자신은 먹을 마음이 없었는데 속아서 먹었다고 변명하는 것입니다. 여자의 변명이 남자를 능가하고 있습니다. (중학교 2학년생들이 몰래 학교 건물 뒤에 모여 담배를 피다가 선생님에게 적발이 되었습니다. 왜 피웠느냐고 묻자 모두 원래 담배를 피자고 한 아이를 지목하며 쟤가 주었기에 피웠다고 말했다 합니다.)

이렇게 책임을 타자에게 전가하는 것이 타락한 인간의 전형적인 모습입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자신에게 불리한 상황이 도래하면 자신을 보호하려고 시도합니다. 이것을 심리학에선 ‘보호 본능’이라 하고 또 ‘방어 기재’라 부릅니다(안나 프로이드에 의하면 대략 10가지 방어 기재가 있다 합니다). 그래서 무슨 문제가 발생하면 해결하려 들기보다 “내가 안했다”고 발뺌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이 이야기의 요점은 책임의 전가가 죄 성이 보여주는 전형적인 수법이라는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전인격적인 부패라고 봅니다. 이 부패가 발생하는 이유는 하나님은 가장 좋은 것의 원천인데(약 1:17), 그 좋은 원천에서 격리되고 단절되니 좋은 것들을 공급받지 못하게 되자 나타나는 현상들은 모두 악하고 부패한 것들뿐으로 된 것입니다. 즉 하나님의 관계가 끊어짐으로 하여 모든 인간은 사망의 굴레를 쓰고 거짓말로 평생을 살며 무책임하고 미움과 증오와 시기와 질투와 육체적 정욕을 추구하는 더럽고 추한 존재로 전락하고 만 것입니다. 한 마디로 오늘 설교 제목처럼 “인간은 얼마나 나쁜 상태인가?”를 추적한다면 더 이상 나쁠 상태가 없을 만큼 나쁜 상태가 되었다고 정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

3. 결어

지난 몇 주 동안 우리는 인간의 타락이 실재로 어떤 결과로 나타났는가를 성경을 통해 알아보았습니다. 물론 이 죄의 이야기가 결코 우리를 즐겁게 만들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우리가 죄에 대해 정확하고 바른 지식을 가져야 하는 것은 병을 알지 못하고 치료를 받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죽을 수밖에 없었던 우리에게 살길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이 살길을 계획하시고 열어주신 분이 우리 하나님이시오 그 살길을 실재로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분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성령 하나님이시라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이 완고한 자의 마음을 무너뜨리고 그의 영적인 눈을 뜨게 해서 자신의 현재 상태가 얼마나 나쁜 것인가를 알게 하는 것이 성령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러므로 성령님께 간구하십시오. 성령님이 이 완고하고 무지한 자의 마음의 눈을 뜨게 하시고 마음의 문을 열어 주님을 영접할 수 있도록 역사해 달라고 간절히 구하시길 바랍니다. 그리하여 거듭나는 역사를 체험하시고 새로운 인생을 살아가는 축복을 누리시기를 소망합니다.

최더함 박사(Th.D. 바로선개혁교회 담임목사, 개혁신학포럼 책임전문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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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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