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영혼의 목자를 따르는 끄트머리 종과 십자가의 종

소기천 교수
소기천 교수
베드로전서 2장 25절은 참 목자 되신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 말해주고 있다. 베드로는 성도와 예수의 관계를 양과 목자의 관계로 표현한다. 이것은 당시 참 목자가 누구인지 확신하지 못하고 마음을 잡지 못하는 성도들에게 예수 그리스도께서 참 길이신 것을 제시하기 위함이다. 베드로는 구약에서 이사야와 에스겔 선지자가 성도를 양으로 비유한 것을 착안하여 이렇게 기록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베드로전서 5장의 장로들을 하나님의 양무리를 치는 포이메노스(poime,noj)인 목자와 에피스코포스(evpi,skopoj)인 감독으로 연결하려는 의도라고 생각된다. 베드로전서 2장에서 베드로는 목자나 감독이란 용어를 거의 구분하지 않고 사용한다. 그런데 베드로는 자신을 ‘영혼의 목자와 감독’이신 예수와 긴밀하게 연결을 짓고 싶어 한다. 곧 베드로는 예수를 ‘목자장’(벧전 5:4)으로 부르면서 자연스럽게 자신이 목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중시한다. 엄밀히 말하면 목사는 목자가 아니며, 예수만이 목자이시다. 그러나 예수를 목자장이라 칭하면서 목사가 참 목자가 되기를 소원하다보니 목자라 칭하는 일이 일반화된 것이다. 베드로는 이 같은 사실을 잘 터득하고 있기에 예수를 목자장으로 모시면서 영혼의 목자와 감독이시라고 부르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은 예수를 목자장으로 부르면서 그분을 따르는 자신을 오늘날의 장로와는 다른 의미로 당시 교회의 대표자로서 영적 지도자인 프로스뷔테로스(presbu,teroj), 곧 장로인 베드로 자신의 영적 지도력을 목자장이신 예수 아래에 놓음으로써 자신에게 목자와 감독의 지위를 주어 그 위상을 강화하려는 의도처럼 보인다. 목사직의 기원에 대해 현재 교회에서는 교회를 성전으로 목사를 제사장 혹은 레위인으로 교인과 구별된 존재로 많은 교인들이 교인과는 구별된 기름부음을 받은 하나님의 종이란 인식이 있다. 이는 교인스스로 인식한 것이 아니고 교육의 결과이다. 베드로는 이와는 다르게 목사직의 기원을 모든 양들의 목자장이신 예수께로 둔다. 피조된 사람이 목사로서 하나님이신 예수의 역할을 모델로 하면 교인과는 구별되지만, 하나님과 일반신자도 사이에서 말씀 운반의 사역을 감당하는 존재로서 양된 신자들을 돌보는 제사장보다 더 귀한 직분을 받은 구별된 존재로 여겨질 수 있다. 이로써 장로는 지헤로운 그리고 존경받는 어른으로, 목사는 말씀을 가르치는 교인을 돌보는 역할을 맡은 자인 사역자와 종으로 섬기는 자의 위치를 잘 감당할 때 이것이 오늘의 교회공동체가 지향해야할 성경적인 교회의 모습이다.

더구나 베드로전서 5장은 ‘그리스도의 양 무리’가 아니라 ‘하나님의 양 무리’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는 목자장이신 그리스도의 역할과 더불어, 교회와 성도의 모든 삶과 예배의 중심에는 하나님을 향한 분명한 정체성이 있어야 한다는 교회론이 함축되어 있다. 이 양 무리는 비록 하나님의 양 무리이지만, 그들을 치는 목자가 필요하다는 관점이다. 하나님의 양을 치는 목자들의 대장인 목자장은 당연히 그리스도이시며, 그리스도를 따라, 그와 함께 하나님의 양 무리를 치는 목자들이 교회에 있어야 한다.

이상과 같이 교회에는 양 무리를 이끌어나갈 목자가 반드시 필요하며, 그들은 하나님의 뜻을 따라 자원함으로 더러운 이득이 아니라, 기꺼이 맡은 목자로서의 사역을 감당해야 한다는 사실이 우리가 베드로전서에서 발견할 수 있는 교회론이다. 그럼 목자장이 그리스도라면 ‘함께 장로된 자’인 베드로는 자연스럽게 목자장이신 그리스도의 감독 하에 있는 목자가 된다. 이로써 베드로는 베드로전서 2장부터 줄기차게 주장해온 영적 지도자의 직책을 마무리 지으면서 자신을 목자장이신 그리스도의 감독 하에 놓여있는 목자로 그 위상을 견고하게 만들어 놓는다. 이런 베드로의 확신은 자신이 목자로서 그 직책을 감당한다는 사실을 “목자장이 나타나실 때에 시들지 아니하는 영광의 관을 얻으리라”(벧전 5:4)와 “때가 되면 너희를 높이리라”(벧전 5:6)라는 표현을 통해서도 드러낸다.

세상에 예수 그리스도와 같은 참 목자가 어디 있을까?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어떤 목사를 위임목사로 부르신다. 그가 참 목자요 목자장이신 예수를 진정으로 사랑하고 따르는 제자가 된다면, 하나님께서 베드로에게 주신 영혼의 목자와 감독이신 예수로부터 오는 영적 위상을 얻게 될 것이다. 그러나 영혼의 목자와 감독이신 그리스도와 비교해 볼 때, 베드로전서 2장 18절의 종들은 비록 한 가정에서 가족처럼 지내지만 분명히 그 신분에 있어서 엄격한 차이가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종은 여전히 종일뿐이다. 이 점에서 모든 목사는 목자장이신 예수께서 지교회의 위임목사로 세우신다고 해도 여전히 종일뿐이라는 사실을 명시해야 한다.

고린도전서 4장 1절에서 말하는 그리스도의 종인 휘페레타스(u`phre,taj)의 원형인 휘페레테스(u`phre,thj)는 전치사 ‘아래’라는 뜻의 휘포(u`po,)와 명사 ‘노를 젓는 이’라는 뜻의 에레테스(evre,thj)의 합성어로 배 밑바닥에서 노를 젓는 종처럼 아무런 권한이나 사회적 지위 없이 그저 낮은 자세로 섬기는 종들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그러나 끄트머리 종이라고 해서 불교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천상천하 유아독존과 같은 존재가 아니다. 처음부처 끝까지 종을 주관하시는 분은 그를 부르시고 사명을 맡기신 하나님이시다. 그러므로 충성해야 한다. 흔히 한국교회에서는 기도를 드릴 때 꼬리가 되지 말고 머리가 되게 해달라는 기도를 자주 드리지만, 엄밀히 말해서 주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종은 머리가 아니라 꼬리가 되게 해달라는 겸손한 기도를 드려야 한다.

교회를 건축하고 매일같이 무릎을 꿇고 세운 새벽기도의 제단과 지역사회를 섬기는 가장 낮은 모습으로 지난 수년을 시무해온 원로목사의 희생과 헌신에 비교하면, 후임목사는 거저 지교회의 위임목사가 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므로 후임목사는 자신이 위임목사의 자격이 있다고 절대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철저하게 나는 아무 자격도 없이 그 크신 은혜로 후임목사직에 부름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끼와 같이 배 밑바닥에서 죽을 때까지 노를 젓는 종의 심정으로 끄트머리 종의 자세를 가지고 맡겨진 사명을 감당해야 한다.

한국교회에 큰 유산을 남기면서 놀라운 희생의 길을 걸어간 서서평은 ‘목회가 섬김’이라는 사실을 몸소 실천한 순교자이다. 목사직은 사도, 선지자, 복음 전하는 자, 교사 등과 함께 “성도를 온전케 하며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함”(엡 4:11)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세우신 직분이다. 이런 태도는 그 누구보다도 지교회의 후임자로 청빙을 받은 위임목사가 명심해야 할 일이다.

사실 자격으로 말하면 그 누구라도 쉽사리 전임목사를 뒤이을 적합한 인물이라고 나설 수 없다. 과연 아들에게 돌고 돌아서 후임목사로 청빙이 된 상황에서 큰 혼란 없이 계속목회를 이어갈 수 있을지 걱정하고 기도하면서 책임을 감당할 자세로 자기에게 후임자리만 계승된 것이 아니라 그와 더불어 엄청난 상속처럼 계승된 사유재산과 종교권력과도 맞설 수 있을까? 한 교회를 수십 년 섬긴 담임목사를 원로목사로 추대한 이후에 청빙위원회가 여러 가능성을 놓고 후임자를 물색한 것이 사실이지만, 결론은 많은 사람들의 예상대로 아들로 후임청빙이 이뤄진 경우가 많다. 우선 부친과의 천륜은 끊을 수 없는 일이지만, 현직 위임목사로서 아버지가 남긴 구습을 철저히 타파하고 비느하스처럼 잘못과 죄를 철저히 바로잡는 새로운 교회개혁을 이루려는데 온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명성교회가 아들로 담임목사직이 계승된 경우에도 뒤따르는 문제는 만만치 않다. 이미 은퇴한 원로목사는 비록 당장은 섭섭하게 들릴지도 모르지만 더 이상 지교회와 비록 아들인 후임목사에게도 어떠한 간섭도 하지 말고, 목회일선에서 완전하게 물러나서 원로목사로서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그동안 이런 저런 불미스런 일로 제기된 교회의 공적 재산문제부터 투명하게 처리하고, 영락교회가 8.15해방과 한국전쟁 전후에 고단하고 힘든 한국사회의 구석구석을 예수의 사랑으로 섬기기 위해 20여 개에 달하는 재단을 처음부터 독립적인 법인체로 투명하게 운영해 온 것을 본 받아서 지교회의 재산을 공정하게 관리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들어주어야 한다.

개혁교회는 당시 거대한 권력이던 로마 천주교의 부패한 교황청과 성당에 맞선 저항정신을 통해 오직 성경을 기치로 지난 500년 동안 ‘항상 개혁되어야 하는 교회’를 세워왔다. 개혁교회는 절체절명의 위기감을 가지고 교회 안팎에서 불어 닥치는 폭풍한설을 헤쳐 나가기 위해서는 다시 본질인 오직 성경과 오직 예수에게로 돌아가서 그 누구(원로목사)도 또한 그 어떤 것(지교회의 재산)도 의지하지 말고, 예수께서 선포하신 복음의 핵심인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 전파하기 위해서 기득권을 포기하고 동시에 십자가를 지신 주님처럼 모든 것을 버려야 한다.

‘cruciform’이라는 영어 단어는 문자적으로 ‘십자가를 지는’을 의미하는 형용사이고, ‘cruciformity’라는 단어는 문자적으로 ‘십자가를 지는 삶’을 의미하는 명사이다. 이 단어 그대로 전임자이든 후임자이든 목회를 계승한 위임목사는 공통적인 특징하나가 있다. 그것은 그에게 영적인 직무를 맡기신 예수 그리스도를 본받아 십자가를 지는 삶을 계승해야지 조금이라도 특권이나 권한을 계승하려고 해서는 안 된다. 오직 십자가를 지는 삶만이 위임목사에게 필요한 모습이다.

본 교단은 제102회 총회를 앞두고 헌법위원회가 헌법 제28조 6항의 소위 세습방지법이 기본권을 침해한다는 유권해석을 내렸다. 이 유권해석은 논란이 되고 있는 세습방지법이 위법이라는 결론을 내린 것으로 총회석상에서 보고될 때는 긴급동의안과 마찬가지이다. 이미 그 안건은 보고된 상황이므로 세습방지법은 무용지물이 된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회의를 진행하는 의장인 총회장은 이 같은 사안의 중대함을 인지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쳐버렸다. 그 후에 소위 세반연이 주도하는 시위와 각종 기도회에 장신대까지도 휘말려서 성만찬도 거행하고 목요기도회도 정례화 하면서 신학포럼까지 열고 있는 현실이다.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해석하여야 할까?

오늘날 신학교와 교수들의 문제점은 성경의 본질을 붙잡기 보다는 현대신학을 너무 의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장신대에서 조차도 성경과목이 점차 뒷전으로 밀려나고 있는 현실이다.

1910년 교과과정을 분석해보면 당시 교과과정이 지니고 있는 특성을 알 수 있다. 1학년 1학기부터 한 학기당 18시간으로 고정되어있고, 5학년 2학기에만 14시간으로 총 176주 공부하는 과정으로 되어 있다. 신학교 과목을 성경 신학, 이론신학, 실천신학, 교양과목 4개로 나누어서 시간별로 퍼센트(%)로 구분해보면 다음과 같다. 성서신학은 75주(42.6%), 이론신학 70주(39.7%), 실천신학(16.4%), 교양과목(0.01%)이다.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당시 신학교는 성서신학과 이론신학의 비율이 전체의 약 82%가 될 정도로 비중의 차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5학년 과정에서 레위기와 히브리서를 비교 연구하는 신약석의 과목은 당시에도 아주 창의적인 과목이었는데, 오늘날에도 시도되기가 쉽지 않은 과목이라는 점에서 아주 흥미롭다. 1923년은 교과과정을 분석해보면 성경 신학 602시간(39%), 이론신학 504시간(32.&%), 실천신학 336시간(21.8%), 교양과목(0.66%)으로 구성되어 있다. 1910년과 같이 성경 신학의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국인 최초의 신학박사인 남궁혁 박사 재직 시절인 1928년의 신학교 신약학 교과과정은 2181시간 중에 헬라어, 히브리어, 영어의 비중은 전체 29.9%를 차지한다. 이는 신학교의 수준이 낮았다는 통설을 반증하는 부분이다. 전공별 시간을 비율로 분석해보면 성경 신학이 748시간(30.1%), 이론신학 551시간(22.2%), 실천신학 429시간(17.2%), 언어 746시간(29.9%)을 차지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당시에 헬라어나 히브리어를 공부하고자 하는 자들은 메이첸의 초보자들을 위한 신약 헬라어나 데이비슨의 히브리어 문법 같은 영어로 된 교과서를 사용할 수 있을 정도의 영어 실력을 갖추고 있어야 했다. 이런 과정들은 학생들로 하여금 신약이나 구약을 원어로 읽는 것을 가능하도록 하게 함을 목적으로 삼았다.

1974년에 교수회의는 성서신학의 교수 비율을 34%로 정하고 필수과목을 수를 감축하고 감축된 과목을 선택과목으로 우선적으로 하기로 결의를 하였다. 그러나 성서학과목에 대한 교수 비율 34%는 한 번도 지켜지지 않았다. 1901년 평양신학교가 개교된 후인 1903년에는 22.2%, 1904-1915년에는 51%, 1916-1919년에는 45.5%, 1920-1924년에는 42%, 1931년에는 55%, 1952년에는 51%, 1961년에는 44.%, 1966년에는 45%, 1972년에는 25%, 1979년에는 38.4%, 1986년에는 38%, 2009-2010년에는 30%이었다. 이러한 수치는 한 번도 체계적인 성서학 과목에 대한 연구 없이 그때그때마다 상황에 따라 성서학 신학수업이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성서신학의 교과목을 강화하여 오늘 너무나도 많은 성경적 지식을 가지고 있지만, 여전히 말씀을 떠난 삶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이 많아지고 있는 현실에서 참된 예수의 제자를 양성하기 위해서 이전보다 더 실질적인 성서신학 교육이 이루어져야 한다. 너무나도 현실의 삶과 동떨어진 신학교육은 이 사회가 교회를 외면하게 하는 필수요인이라 여겨지기 때문이다. 성경이 가르치는 말씀 하나라도 붙잡고 삶 속에 진실하게 실천하는 진정한 그리스도인을 단 한사람이라도 길러 내기 위해 성서신학 과목에 대한 교수가 실천적인 내용으로 탈바꿈되어야 할 것이다.

이렇게 장신대 스스로가 성서신학에 대한 관심의 부재를 안고 있기에 오늘날 소위 세습방지법이 도마 위에 오를 때 아무도 성경의 가르침보다는 현대 사조와 사회적 현상에만 관심을 기울이면서 문제를 해결하기보다는 오히려 불에 기름을 붙는 격으로 신학교 교수들까지 자중자애하지를 못하고 이러 저리 나서서 문제를 더욱 키운 것은 뼈아픈 잘못이다. (계속)

소기천(장로회신학대학교 신약성경신학 교수, 예수말씀연구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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