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지는 박명수 교수(서울신학대학교 명예교수, 한국교회사)의 논문 ‘조미수호통상조약 140주년의 역사적 배경과 그 의의’를 연재합니다. 2022년은 조미수호통상조약 140주년입니다.

3. 해방 이후 대한민국의 형성과정과 한미관계

박명수 교수
박명수 교수

미국이 한반도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생각한 것은 제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면서 부터였다. 특별히 종전이 다가오면서 미국은 한반도문제를 구체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하였고, 본격적으로 한국문제에 개입하기 시작하였다. 그 첫 번째가 바로 1943년 카이로 선언이다. “적절한 과정을 거쳐서 한국은 자유롭고, 독립된 나라가 될 것이다”는 선언은 이제 미국이 본격적으로 한반도 문제에 개입하려고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1882년 조미조약 제 1조는 비로소 작동이 된다고 말 할 수 있다.

미국이 한반도를 위해서 제일 먼저 행한 가장 중요한 일은 우리나라를 식민지로 갖고 있는 일본을 정복하는 일이다. 과거 한국인들은 오래 동안 미국에게 일본은 언젠가는 미국을 공격할 것이며, 따라서 미국은 한국과 손을 잡고, 기독교와 민주주의 국가를 건설하여 아시아의 평화를 이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이런 한국인들의 주장은 미국인들에게 수용되지 않았다. 하지만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미국은 일본의 실체를 알게 되었고, 한국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미국이 일본을 패배시킴으로서 오늘의 대한민국을 만들 수 있는 기로를 마련하였다.

미국과 일본이 전쟁하는 과정 가운데 기독교는 친미세력으로 낙인이 찍혔고, 탄압의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일본이 패망하고 미군이 조선에 진주하게 되었을 때, 미군과 한국을 연결하는 고리가 바로 미국에서 유학한 기독교지식인들 이었다. 이들은 영어와 자신들이 배우 서구문명을 갖고 미국과 함께 대한민국을 만드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이것은 미군정과 초대 내각에 기독교인들이 얼마나 많이 참여했는지를 살펴 보면 잘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오늘의 대한민국으 만들기 위해서는 소련의 공산주의를 극복하는 것이다. 소련은 태평양전쟁에 참여하면서 오래 전에 러시아가 갖고 있던 정책을 재개하였다. 그것은 한반도를 친소공산주의 국가로 만드는 것이다. 미국은 종전 직후에는 소련과 함께 한반도를 관리하고자 했지만 동유럽이 공산화하는 것을 보면서 봉쇄정책을 채택하였다. 트루만의 봉쇄정책은 바로 북한 공산주의의 공격을 막을 수 있는 방어정책이 되었고, 이것은 한미상호방위조약으로 나타나고 있다.

미국의 이런 봉쇄정책에 가장 강력하게 호응한 것이 바로 한국의 기독교인들이다. 특별히 한국 기독교는 북한지역에서 강세였는데, 이들은 월남하여 미국을 지지하는 강력한 반공세력이 되었다. 사실 여러 나라들이 미국의 도움에도 불구하고 공산화가 되었는데, 한반도에서 미국의 반공정책이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기독교의 역할 때문이라고 본다. 북한에서 공산주의에 의해서 핍밥을 받은 기독교인들은 자연히 미국을 중심으로하는 민주주의를 지지할 수 밖에 없었다.

1950년에 일어난 6.25 전쟁은 과거 조선의 종주국이었던 중공과의 전쟁이었다.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전선이 압록강까지 전진하자 모택동은 의용군이라는 이름으로 한국전에 참여하여 한국전쟁을 확산시킨다. 이렇게 해서 대한민국은 중공과 분명한 적대관계로 존재하게 되었고, 중공은 소련과 밀착되어 반미전선을 형성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중국으로는 엄청난 실패를 예감하는 것이었다. 중국은 미국과의 관계를 단절하였기 때문에 국제적으로 고립되고, 경제적으로 발전할 수 없었다. 반면에 남한은 휴전선으로 말미암아 소련과 중공의 간섭에서 벗어나서 자유세계와 밀착하게 되었고, 이들의 도움으로 경제발전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전쟁이 끝나면서 소위 정전협정이 맺어졌고, 그 주요 대상은 미국과 중공이었다. 미국과 중공의 전쟁은 전쟁터에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다. 6.25전쟁은 수많은 전쟁포로들이 있었고, 그들 중 많은 사람은 중공군포로였다. 휴전이 가까워오자 포로송환문제가 등장하게 되었고, 그 포로들 가운데 공산세계로 가지 않고 자유세계로 오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많이 생겨나게 되었다. 이것은 체재의 우월성을 선전하는 공산주의자들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미국과 이승만대통령은 자유를 추구하는 자들을 강제로 공산세계로 보낼 수 없다고 주장하였고, 이승만은 전격적으로 이들을 석방하였다. 이렇게 이들이 자유세계로 오게된 배경에는 기독교인들을 중심으로하는 복음전도가 있었다. 이것을 통하여 자유대한민국은 전 세계에 자유의 심볼이 될 수 있었다.

이렇게 볼 때 해방 후 미국은 한반도를 일본의 지배에서 해방시켜 주었고, 소련과 중국의 공산주의에서도 지켜 주었다. 그리고 한반도를 미국을 중심으로하는 자유세계와 연결하여 주었다. 사실 해방 이후 한국사회가 이렇게 급속도로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과거 경험해 보지 못했던 안정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패전하였고, 소련과 중공은 미국이 방어해 주었기 때문에 이런 시기에 경제적인 성장, 종교적인 부흥, 민주주의의 향상이 이루어 질 수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한국 전쟁이후 이 시가가 한반도가 주변의 강대국으로부터 안전을 확보할 수 있었던 귀한 기간이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이런 안전은 미국이 한국과 맺은 한미동맹으로 주변의 강대국으로부터 공격받지 않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측면에서 본다면 1882년 맨은 조미조약의 거중 조정은 아이러니 하게도 한미방위조약으로 인해서 지켜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계속)

박명수(서울신학대학교 명예교수)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트위터 공유하기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

<외부 필진의 글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기사제보 및 보도자료 press@cdaily.co.kr

- Copyright ⓒ기독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박명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