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지는 박명수 교수(서울신학대학교 명예교수, 한국교회사)의 논문 ‘조미수호통상조약 140주년의 역사적 배경과 그 의의’를 연재합니다. 2022년은 조미수호통상조약 140주년입니다.

II. 조미수호통상조약과 한국근현대사회의 형성

1. 한반도의 지정학적인 위치와 미국의 의미

박명수 교수
박명수 교수
다음으로 우리가 생각해 보아야 할 과제는 이런 조미수호통상조약이 한반도의 역사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 하는 점이다. 많은 사람들은 개항이후 한반도의 역사를 한민족과 서구열강의 대립으로 이해하고 있다. 하지만 실지로 서구 열강 가운데 한반도에 결정적인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나라는 없다.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등 서구국가가 한반도에 관심을 가진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이 한반도를 놓고 전쟁을 벌일 만큼의 결정적인 이해관계를 가지지 않았다. 그러나 이런 서구국가들 가운데서 가장 한국에 관심을 가진 나라는 미국이었고, 이 미국을 통해서 서구근대문명이 한반도에 유입되었다. 하지만 미국이 한반도에 대해서 보다 구체적인 관심을 가진 것은 훨씬 후의 일이다. 따라서 필자는 개항기와 20세기 전반을 한민족과 서구제국주의의 대립으로 보는 것을 잘못된 것이라고 본다.

오히려 개항이후 한반도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한반도를 장악해서 자국의 이익을 확대하려고 했던 나라들은 한반도 주변에 있는 중국, 일본, 러시아였다. 필자는 개항이후 한반도의 국제정세는 주변의 3개국, 즉 중국, 일본, 러시아와 태평양 너머에 있는 미국에 의해서 규정된다고 본다. 중국은 오래 동안 한반도를 북경을 보호하는 자신의 왼팔이라고 보았고, 일본은 만일 한반도가 중국이나 러시아에게 들어가면 조선은 일본을 겨누는 단도라고 생각했으며, 러시아는 한반도는 자신들이 세계로 나갈 수 있는 통로라고 생각하였다. 이런 점에서 한반도의 가장 큰 과제는 이런 주변의 국가들의 지배야욕을 어떻게 관리해야 하는가 하는 점이었다.

이런 한반도가 이런 나라들에게 종속당하지 않고 살아 남으려면 이들 나라들을 견제할 수 있는 나라와 손을 잡아야 한다. 그래서 조선은 미국에 거중 조정의 역할을 요청했던 것이다. 하지만 개항기와 일제 강점기 미국은 이런 역할을 거부하였다. 미 국무성은 조선에 나가있는 외교관에게 조선문제에 깊게 개입하지 말 것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미국 선교사들과 기독교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개항기와 일제시기 한미관계의 핵심은 미국 정부가 아니라 기독교였다. 그러나 제 2차 세계대전 이후, 그리고 냉전시기를 거치면서 미국은 한반도에 보다 적극적인 관심을 갖게 되었다. 한국은 미국을 중심으로하는 국제질서에 편입되었다. 이렇게 한미관계가 강화되는데 기독교의 역할이 컸다고 생각된다, 이것을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볼 것이다.

2. 조미 통상조약과 개항기및 일제시대

중국은 한편으로는 조선으로 하여금 미국과 수교하도록 중재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조선을 전통적인 속방으로 간주하였다. 그리해서 조약과는 별도로 조선이 중국의 속방이라는 조회를 교환하였다. 그러나 중국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1882년 말,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을 만들었다. 여기에서 장정은 중국의 천자가 지방관에게 내리는 규칙을 말하는 것이며, 장정의 첫 문장은 조선이 중국의 속방임을 밝히는 것이었다. 이것은 중국이 한편으로는 조미조약을 통해서 서양과 관계를 맺게 해주면서 동시에 조선을 중국의 속방으로 공고하게 하려고 한 것이다. 그 뒤 중국은 조선에 묄렌도르프를 외교고문으로 마건충을 내정고문으로 파송하였고, 1885년에 원세계를 주차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일명, 감국대신)으로 세워 외교와 내정을 간섭하였다. 이것은 1894년 청일전쟁으로 중국이 일본에 패배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조선에 온 미국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이런 주변국의 횡포로부터 조선을 보호하는 것이었다. 미국은 조선에 중국이나 일본에 파견하는 외교관과 동급인 전권공사 푸트를 파송하여 이들의 부당한 요구에 맞서게 하였다. 그리고 얼마되지 않아서 견미사절단(보빙사)이 파송되어 미국을 배우고, 그 다음에 선교사들이 내한하여 본격적으로 서양문물이 들어오게 되었다. 1887년 조선은 미국에 박정양을 초대공사로 파견하였다. 이들은 중화질서에서 벗어나 새로운 서구질서를 수용하고자 하였다. 이것은 결국 1897년 독립협회를 만들고, 서구식 민주주의를 도입하는 과정에서 잘 들어나고 있다. 결국 미국을 통해서 중화질서를 극복하고 새로운 문명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노력은 성공하지 못하였다. 조선은 미국이 적극적으로 조선문제에 개입하여 외국의 부당한 간섭에서 해방시켜 주기를 원했지만 미국은 복잡한 국제관계 속에 있는 조선문제에 휩싸이기를 싫어하였다. 이런 상황 가운데서 조선에서 미국을 대변했던 것은 미국외교관이 아니라 선교사였다.

다음으로 중요한 것은 러시아의 침략에 맞서서 조선을 지키는 것이었다. 원래 조선의 국제관계는 러시아의 침략 위협으로 시작되는 것이다. 태평양으로 나오려는 러시아는 서구유럽이 막고 있었고, 여기에 중국, 일본, 조선이 서로 연합했다. 이것이 조선책략에 나오는 것이다. 하지만 중국이 조선을 식민지처럼 대우하자 여기에 분개한 고종은 다른 방책을 찾게 되었다. 여기에는 독일외교고문 묄렌도르프와 미국외교고문 데니의 역할도 컸다. 이들은 조선이 청의 지배를 벗어나기 위해서는 조선이 러시아와 손을 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심지어 조선을 러시아의 속방으로한다는 조러비밀조약에 대한 소문도 있었다. 이런 고종과 러시아의 친밀관계는 민비시해 이후 아관파천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고종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은 커지게 되었고, 결국 조선은 러시아를 본받아 황제가 전권을 갖는 대한제국을 만들었다. 이렇게 해서 중국 다음으로 조선에 영향력을 미친 나라는 바로 러시아였던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 정부는 일면 러시아를 통해서 일본을 견제하려고 하였다. 이런 입장의 전형적인 예가 바로 청일전쟁이후 민비시해 사건 다음의 미국 입장이다. 미국 공사 알렌은 미관파천을 요청하는 고종을 러시아공사관으로 안내했다. 이렇게 해서 러시아와 미국을 공동으로 조선에서 이익을 챙기게 되었다. 이때 미국은 조선으로부터 운산 금광채굴권을 허락받았다. 이런 미국과 라시아의 협조관계 러일전쟁이후 다시 반복되었다. 미국은 일본의 부상은 태평양에서 미국의 위치를 흔들리게 만들것이라고 생각했다. 따라서 미국은 러시아의 입장에서 일본과 러시아가 전쟁을 끝내도록 만들었다. 이것이 포츠머쓰 조약이다. 하지만 선교사들은 달랐다. 이들은 러시아를 근대문명국가로 보지 않았다. 아울러서 러시아가 조선을 지배하면 개신교 보다는 정교회의 영향력이 커질 것을 우려하였다. 그리하여 선교사들은 러시아의 한국지배보다는 일본의 한국지배가 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상황에서 미국은 한반도의 이익에 대해서 고려하지 않았다.

오랫동안 조선을 자신의 지배권 아래 종속시키려는 세력은 일본이었다. 일본은 자신의 안위를 위해서, 혹은 대륙진출을 위해서 조선을 자신의 지배권 아래 두는 것은 필요하다고 보았다. 이런 노력은 오랜 세월 동안 지속되었다. 1884년 갑신정변, 1894년 청일전쟁과 갑오개혁등은 이런 일본의 노력을 잘 보여 주는 것이다. 하지만 갑신정변은 청나라 때문에, 갑오개혁은 고종의 아관파천 때문에 실패하고 말았다. 이런 실패를 딛고, 일본은 1905년 을시조약을 맺고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획득하였고, 1910년 결국 조선을 합병하였다.

미국정부는 서양제국과 함께 이런 일본의 조선지배를 인정하였다. 하지만 선교사들의 의견은 여러 가지고 갈라졌다. 일본지배를 인정하는 선교사, 반대하는 선교사, 그리고 중립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는 선교사등 다양했다. 하지만 한국인들은 다같이 미국을 통해서 일본의 통치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백만구령운동이 그 예이다. 일부 한국인들은 만일 한국에 백만명의 기독교인이 있다면 미국은 한국을 도와줄 것이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런 친미독립운동은 1910년대에 절정을 이루었다. 당시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들은 다 기독교인들이었다. 이동휘, 여운형등도 당시는 기독교인들이었다. 박헌영도 영어를 배워 미국유학을 가려고 했다. 더욱이 대부분의 한국인들은 윌슨의 민족자결주의의 영향을 받아 3.1 운동을 일으켰다. 하지만 잘 아는대로 미국은 한국인들의 호소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한마디로 1882년 조미조약의 거중조정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미국은 당시 한반도에 무관심했고, 한반도를 동북아의 국제질서 가운데서 이해했다. 한반도 문제에 적극적으로 개입하지 않았다. 그러나 선교사들은 달랐다. 중국과 러시아에서 벗어나는 것이 한국을 개화와 기독교로 이끌 수 있다고 보았다. 일본에 대해서는 긍정과 부정이 엇갈렸다. 하지만 일반 대중의 정서는 미국을 호의적으로 생각했고, 이것은 3.1 운동 당시 한국인들이 미국 윌슨의 민족자결주의를 열열히 지지하며, 미국에 의지해서 독립을 하려고 했다는 점에서 잘 드러난다. 그래서 일제 강점 기간 중, 친한 선교사들과 한국인들은 미국정부에 대해서 조미조약 제 1조의 거중조정 항목을 내세워서 미국이 부당한 일본의 침략에서 조선을 독립시켜 줄 것을 요청하였다. 하지만 미국은 한국인들의 요청을 거부하였다. 그래서 유행한 말이 “미국을 믿지 말라”는 것이었다. (계속)

박명수(서울신학대학교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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