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참감람나무이신 예수님을 닮아 가며 하나님의 참교회로서 복음을 증거하는 자들입니다. '나는 아무것도 할 수 없습니다. 나는 주님의 통로일 뿐입니다!' 하며 겸손히 복음을 전하는 것이 두 증인의 태도입니다. 이런 자에게 주님이 기적의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나 한 사람이 중심 잡고 있어서 언제고 무너질 듯 위태한 내 집안이 망하지 않는 것입니다. 나 한 사람이 중심 잡으면 가정도, 나라도 망하지 않습니다. 어떤 구경꾼들은 우리의 믿음을 조롱하고 비웃습니다. 그러나 남이 나를 조롱하는 것은 작은 일입니다. 더 무서운 것은 내 속의 구경꾼입니다. 부활이 다른 게 아닙니다. 기록된 말씀을 통해 내 죄를 깨닫고 회개의 눈물을 흘리는 것도 죽어 있던 내 영성이 다시 살아나는 부활의 사건입니다.
김양재 - 우리는 다 이겼습니다
이 책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하여금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와 그리스도의 섬김의 현존을 가지게 할 목적을 가지고 썼다. 그런 연유로 글을 쓰는 초기부터 성도들과 설교로써 지속적으로 나누어 왔다. 반응이 놀라웠는데 어떤 분은 "우리만 듣기에 아깝다"라는 반응이었고 몇 차례 같은 놀라움을 표하였다. 어려운 신학 주제들을 설교로 옮긴다는 것은 서로에게 부담이 될 수 있었지만 이같은 반응은 무엇 때문일까? 그동안 신학적 지식과 사유는 일명 성직자들만의 전유물이었다. 평소 필자도 신학은 온 백성의 자산이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인식해왔음에도 말씀의 강단에서 신학은 괴리감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성도들이 어려워할 수도 있고, 더 큰 이유는 목회자로서 가지는 신학적 역량 때문이다. 지속적인 신학 훈련이 따라야 하나 목회 현실은 종종 이런 요구를 외면한다.
명재영 - 평신도 중심 교회
두려움은 소망이 없을 때 일어납니다. 걱정이나 염려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감정입니다. 의지할 대상이 아무것도 없을 때 두려움이 찾아옵니다. 두려우면 나 자신에게서 일말의 가능성도 보이지 않습니다. 미래를 헤쳐 나갈 아무 방법도 없어 온몸에서 힘이 빠집니다. 과거에 더 열악한 상황에서 발휘했던 용기조차도 모조리 얼어붙고 맙니다. 바울도 우리와 똑같은 연약한 사람이었습니다. 환경과 자신의 연약함 앞에 두려워했습니다. 그런 바울이 두려움을 이겨 낼 수 있었던 이유는 그가 주님의 말씀을 매 순간 듣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죽음에서 부활하시고 사망 권세를 이기신 주님이 나와 함께하신다는 약속의 말씀을 붙들 때 두려움이 사라졌습니다. "이는 내가 약한 그때에 강함이라"(고후 12:10)라는 바울의 고백을 우리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김형준 - 단단해지는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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