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출판 대추나무

지금 대한민국은 체제전쟁 중이다. 자유민주주의체제가 유지되느냐 아니면 사회주의체제로 바뀌느냐? 이 체제줄다리기에서 지면 1948년 수립된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은 생명이 끝나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 눈앞에 나타날 체제는 아마도 북한식 사회주의체제가 될 공산이 크다. 왜냐하면 문재인 정권 주도세력이 김일성주의의 주사파와 같은 노선을 걷고 있는 것으로 보이고, 대한민국의 적화를 노리는 북한과 연방제 통일을 지향하는 것 같아 보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1990년 전후 소련 등 동구공산권이 무너진 후 공산주의 사상이 사라진 것으로 오해했다. 그래서 공산주의를 비판하거나 반공을 이야기하면 마치 철 지난 이데올로기를 거론하는 색깔론자, 메카시스트, 극우 등으로 매도했다.

6·25전쟁에서 공산주의를 체험한 분들은 80대들이다. 특히 젊은 세대들은 공산주의를 모른다. 공산주의의 위험성을 가르치지 않은 지가 이미 30년이 넘었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사상의 독성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사상가들도 거의 없다.
많은 어른들이 묻는다. "젊은 자녀, 손자·손녀들, 후배들에게 공산주의가 얼마나 위험한지 깨닫게 할 좋은 방법이 없어요?" 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이 책을 만들었다.

만약 국민들의 다수가 이 책을 읽고 깨닫는다면 단기간에 체제위기를 벗어날 수도 있다. 공산주의의 독성과 잔혹성을 알고 나면, 공산주의, 사회주의팀에서 줄을 당기는 사람들이 사라질 테니까.

5. 북한군 후퇴 후 남한 좌익세력의 악행

6·25전쟁에서 가장 참혹한 민간인 집단학살극은 전세가 역전된 인천상륙작전 이후 일어났다. 인천상륙작전(1950.9.15.) 전까지는 '반동분자'라는 이유로 선별적인 민간인 학살이 일어났으나, 인천상륙작전 이후 집단학살극이 일어났다. 특히 9월 28일 서울 수복 이후 집중적으로 일어났다.

맥아더 장군이 지휘하는 인천상륙작전이 9월 15일 개시됐다. 인천상륙작전 후 13일 만에 서울을 되찾았는데, 서울 광화문 중앙청 국기게양대에 인공기가 내려지고 태극기가 올라갔다. 이를 서울수복이라고 한다. 인천에서부터 출발한 유엔군과 국군은 서울을 차지했던 북한군과 전투하여 13일 만에 서울을 되찾았다. 북한군은 인천상륙작전 이후 전투력을 상실하고 낙동강 전선이나 남한 전 지역에서 철수를 개시, 북으로 후퇴했다.

북한군은 후퇴하기 전 전국 각지에 설치했던 내무서(우리의 경찰서) 별로 체포해두었던 우익인사들을 집단 처형했다. 대전형무소에서 6000여 명, 전주형무소에서 1000여 명 등 전국각지 내무서 및 형무소에서 민간인 학살극이 일어났다. 대전교도소의 경우, 북한군은 체포된 사람들로 하여금 자기가 죽을 긴 구덩이를 파게 한 후 총이나 죽창 등으로 죽인 후 묻었다. 이들을 살려두면 반공활동을 할 것이 명확했기 때문이었다.

우익민간인들의 죽음은 누구의 책임인가? 전국 각지 마을에서 이들을 반동분자 등으로 지목, 체포했던 남한 좌익 즉 북한군 부역자들이 책임을 면할 수 있는가?

특히, 서울을 수복한 9월 28일부터 10월 중순까지 교도소가 아닌 마을 곳곳에서 집중적으로 민간인 학살극이 일어났다. 이때의 민간인 학살은 매우 잔인했고, 학살의 주체도 주로 동네 좌익분자들과 북한군 패잔병으로 구성된 빨치산들에 의해 일어났다.

인천상륙작전 성공 후 유엔군과 국군이 인천에서 서울로 진격하는 동안 눈치 빠른 남한 좌익들은 후퇴하는 북한군을 따라 월북했다. 북한군 점령 3개월 동안 동네에서 행한 악행이 있기 때문에 도피한 것이다. 대략 10만명 정도 된다고 한다.

그런데 문제는 서울수복 이후 퇴로가 차단당해 북한으로 돌아가지 못한 북한패잔병들과 남한 각지에서 북한군을 도왔으나 피하지 못한 남한 좌익분자들이었다. 9.28 서울이 수복되자, 전국 각지에서는 '국군 및 유엔군환영대회' 등 공산치하에서 벗어났다는 축하행사들이 벌어졌고, 남한 좌익분자들은 혼돈상태에 빠졌다. 이들은 북한군 점령기간 많은 악행을 저질렀기 때문에 군과 경찰이 오면 보복당할 것을 우려했다. 이들은 보복을 막기 위한 증거인멸을 해야 한다며, 개울가, 우물가, 방공호, 구덩이 등 사람을 처형하기 좋은 곳곳에서 집단학살을 자행했다. 이들의 학살방법도 매우 잔인했다. 따발총으로 처형하거나 총알이 아깝다며 몽둥이, 죽창으로 죽이기도 했고, 칼이나 낫으로 난자하여 죽이기도 했다. 우물에 단무지 담그듯이 차곡차곡 처넣어 죽이기도 했다. 바닷가에 수장 시켜 죽이기도 하고 건물 안에 가둔 후 불을 질러 태워죽이기도 했다. 당시 악행에 참여했던 빨치산소년단 출신 김서용 씨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증언했다.

"보복을 막으려면 씨를 말려야 한다면서 일가친척들까지 모조리 잡아 죽였어요. ... 갓난애들은 자루에 담아서 그냥 던져버렸고요. 처형 명령이 내려진 사람들을 처형하기 위해 개울가로 데려가다 보면 이미 80%쯤은 죽은 사람이 되어 있었던 걸로 기억이 나요. 공포에 정신이 혼미해진 거죠"

북한군 철수 직후 경남 진주 민간인 학살 현장(1950.10.2.)
북한군 철수 직후 경남 진주 민간인 학살 현장(1950.10.2.)
좌익분자에 의해 집단학살 피해는 호남에서 가장 심했고, 그중에서도 영광군이 가장 극심했다. 일례로 영광군 백수면에 살았던 장맹룡씨는 6촌 이내 친척 300여 명이 거의 같은 시기에 떼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이 대목에서 우리에게 궁금증이 생긴다. 북한군 점령기간 동안 학살당한 민간인 피해 규모는 얼마나 될까? 1952년 10월에 발간된 '대한민국 통계연감(1952)'에 따르면, 12만2799명, 1977년 국방부가 간행한 '한국전쟁사에 따르면 12만8936명(남 9만7680명, 여 3만1256명)이 학살당했다는 통계만 있을 뿐 구체적인 자료가 없었다. 그래서 전남 영광군 등 피해가 심했던 지역에서 피해를 당했던 증언자들로부터 입에서 입으로 전해오기는 했으나 구체적인 실태가 드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남한 좌익분자들은 경찰 등으로부터 피해를 입은 존재로 부각되어 왔다. 그러나 2002년 50년간 베일에 가리어져 왔던 역사적 진실이 백일하에 드러났다.

2002년 4월, 조선일보사가 국립중앙박물관에서 1952년 3월 공보처 통계국이 발간한 '6·25사변 피살자 명부'(국립중앙도서관, 국립기록보존소)를 발견한 것이다. 이 자료에는 피살자의 이름과 성별, 나이, 직업, 피해 연월일, 피해 장소, 본적, 주소 등이 자세히 나타나 있다. 이 자료에 등재된 피살자 규모는 전체 5만9994명이었다. 이중 전남이 4만3511명(72.6%), 전북 5603명(고창 2364명) 등 전라도만 4만9114명이 피살되었는데, 호남이 전체 피살자의 83%에 이르렀다.

이 자료에 포함된 피살자 규모는 전쟁 중 두서없이 신청자 중심으로 등재한 것이어서 전체 규모를 산정한 것이 아니다. 전남 피살자 4만3400명 중 영광군이 2만1225명을 차지하여 가장 큰 피해를 당했는데, 이 중 12%인 2500여 명이 10세 이하 어린이였다. 이는 가족 집단학살의 생생한 증거다.

영광군 중에서도 염산면이 가장 큰 피해를 당했다. 염산면은 남로당 총책 김삼룡의 고향으로 그의 추종자들 모여들어, 사상 갈등이 심각했던 지역이다. 영광군 특히 염산면은 6·25전쟁당시 다른 지역보다 늦게 수복되어 북한군 패잔병과 남한 좌익들이 몰려든 곳이었다. 따라서 지역민들이 빨치산들의 위협에 노출된 지역이었다. 염산면 사람들의 절반이 죽었을 것이라는 증언도 있다.

영광군 염산면 염산교회 교인 77명은 좌익분자들에게 의해 바다에 수장되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학살당했다. 염산교회 이방호 목사는 세계정세에 밝고 공산주의에 속지 말 것을 교인들에게 가르쳐, 교인들의 반공의식이 강했다. 이방호 목사는 교인 집에 숨어 있다가 좌익분자들에 결국 적발되어 부인, 아들, 손자, 손녀가 보는 앞에서 몽둥이로 맞아 죽고 나머지 가족들도 그 자리에서 학살당했다. 염산교회 옆 마을에 있던 야월교회에서도 집단학살이 일어났는데, 그 교회 청년들이 국군 및 유엔군 환영대회에 갔다는 이유로 동네 좌익들이 교인 65명을 교회 안에 가두어두고 석유를 뿌려 불태워 죽였다.

6·25전쟁 당시 가장 큰 피해를 당한 것은 기독교인들이었다. 북한군은 남침 초기에는 신앙 자유를 주겠다고 포장, 자수를 선동했다. 그러나 8월 중순부터 본격적인 박해를 시작했는데, 교역자를 체포하여 종교활동이 중단됐다. 북한군은 미군이 교회에는 폭격하지 않는다는 것을 역이용하여 북한군 시설로 활용했다. 9월에는 유능한 신학자 남궁혁, 송창근, 김영주 목사 등 100여 명을 납북, 대부분 학살했다. 북한군 점령 3개월 동안 목회자 540여 명 학살, 7500여 명의 교인이 납북 또는 학살됐다.

그렇다면, 북한군 점령기간인 3개월 동안 북한군과 남한 좌익분자들 즉 공산세력에 의해 학살된 민간인들의 규모는 얼마나 될까?

1952년 10월 발간 '대한민국통계연감'에 따르면 12만8936명이다. 그런데, 정일권장군의 수기인 '6·25비록'에 따르면 3개월 동안 16만5000여 명이 학살됐고, 이중 서울에만 9500여 명이 학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납북자도 12만2000여 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렇듯, 6·25전쟁 중 남한 각지에서 일어난 민간인 학살은 그 규모가 엄청났고, 북한군뿐 아니라 남한 좌익분자에 의해 많이 일어났다는 점을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남한 좌익분자들의 악행은 북한군이 후퇴한 후 남한 각지 산악을 근거로 한 빨치산 활동을 통해서도 이어졌다. 인천상륙작전과 9.28 서울수복 이후 북한군 패잔병과 남한 좌익분자들이 합세하여 지리산, 백운산, 회문산 등 남한 각지 산악을 근거로 빨치산 활동을 전개했다. 당시 남한 각지에서 빨치산들의 규모는 5~6만 명에 이르렀다. 빨치산들은 '보급투쟁'이라는 이름으로 주변 주민들을 협박하여 음식과 의복을 빼앗았고, 자신들에게 비협조하거나 경찰에 신고할 경우, 보복 학살하는 악행을 저질렀다. 정부는 전쟁이 소강상태에 이른 1951년 12월 백선엽 장군을 중심으로 백야전전투사령부를 구성, 100일간의 빨치산 토벌작전을 전개하여 어느 정도 진압했다. 이때까지 좌익 빨치산들에 의해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이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할 정도로 나라가 혼란했고, 국민들의 고통도 심했다.

※ 본 내용은 <사단법인 성민원>이 구국제자훈련원에서 출간한 <애국 시민 필독 교재 6: 공산주의, 왜 위험한가?>에서 일부를 발췌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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