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상해임시정부 대통령

송병기 박사
송병기 박사

1919년 멀리 미국에 있는 이승만박사를 3.1운동직후 블라디보스톡과 상하이에서 독립 운동가들이 그를 임시정부 대통령 으로 추대했다는 소식을 듣고 상해로 가려하나 돈이 없고 일본이 30만 달러의 형상금을 걸어 쉽게 갈수가 없었다. 그때 Funeral Home 사업을 하는 하와이의 유지이자 친구인 윌리암 보스윅(William Boswick) 장례사의 도움으로 시체를 상해로 운구하는 배에 관 속으로 들어가 상해로 간다. 이승만 대통령이 하와이에서 서거했을 때 50년 친구인 보스윅은 이승만의 시신을 운구하는 조사에서 울면서 말한다. “ 내가 알아요. 내가 알아요, 당신을 내가 알아요. 그때도 나라를 위해 산 사람이 시체가 되더니 지금도 나라를 위해 이제는 정말로 가시는 구려. 당신이 애국심 때문에 일생 동안 얼마나 많은 수고를 하셨소 자나깨나 나라생각 자나깨나 민족생각 친구여 이제 잘가시오”라고 말을 남겨 많은 사람들을 울게 했다.

그는 임시정부에서 일을 하며 독립을 위해서는 외교적 노력을 해서 전 세계의 지지를 받는 나라가 될때에 승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당시 일본은 600만의 훈련된 군인이 있었는데 우리 독립군은 3500명 정도니 일본과 전투에서 이길 수 없었다. 또한 일본은 피해를 당하면 100배로 앙갚음을 하니 피해는 우리 밖에 없다며 독립 투쟁보다 외교에 힘을 다하자고 하여, 박용만 같은 독립운동가에게 투쟁을 싫어하여 피하려 한다는 이유로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는다. 다시 미국으로 와서 계속하여 독립자금을 보내며 외교로 독립을 주장해 나간다.

4. 프란체스카 여사와의 만남

1933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리는 국제 회의에 참석하여 대한제국은 독립국임을 웅변하려 했으나 일본의 방해로 참석하지 못하고 신문과 인터뷰에서 대한제국은 자주 독립국인데 일본이 침략으로 합병된 것을 설토했다. 1933년 2월 제네바에서 프란체스카(1900년 6월15일 생)를 만난다. 호텔 식당에 사람들이 많아 먼저 앉아있는 이승만에게 종업원이 두 여인이 있는데 같이 앉아도 되냐고 묻자 허락한다. 영어를 능통하게 했던 그는 프렌체스카를 압도한다. 다음 날 그녀는 리승만이 대한제국의 임시 대통령임을 알게 되었고 신문에 난 기사를 스크랩하여 리승만에게 전달한다. 예의가 바른 그는 그녀에게 깍듯이 예의를 표하며 가까워진다. 그녀는 오스트리아 비엔나에서 철물 무역과 소다수 공장을 경영하는 중소기업가의 세째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영어와 불어가 능통하여 영어 통역관 국제 자격증과 속기사 자격증을 가지고 있었다. 제네바에서 헤어진후 서로 서신을 주고 받는다.

1933년 7월에 소련 모스코바에서 국제회의가 있어 갔는데 일본의 방해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돌아와야만 했다. 하는 수 없이 돌아오는 도중에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왔을 때 화니(프렌체스카의 애칭)를 다시 만난다. 그 둘은 빈의 헤르메스 별장에서 만났다. 이승만 박사는 프란체스카에게 프로포즈를 한다. 어머님께서 유산으로 남겨주신 버릿 빗을 화니에게 선물로 주고 청혼을 할때 화니(프렌체스카)는 승락한다. 결혼을 약속하지만 이승만은 무국적 망명객으로 미국에 그녀를 불러들일 힘이 없었다.

죠지 워싱톤 대학과 프린스턴 대학교의 동창으로 가깝게 지내던 친구인 킴버랜드 대령이 경영하던 몽클레어 호텔에서 저렴한 가격으로 거주하던 이승만 박사에겐 경제적 여유가 없었다. 1년 뒤에 프렌체스카는 미국시민권을 받아 미국으로 오고 1934년 10월8일 4시30분 미국인 홈스 목사와 윤병구 목사가 공동으로 결혼식을 주관한다. 그가 살던 뉴욕의 렉싱턴 에베뉴에 있는 몽클레어 호텔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결혼 후 그들은 한인들이 많이 사는 하와이로 간다. 1935년 1월25일 호놀롤루 항구에 도착하여 하와이에서 신혼의 살림이 시작된다.

당시 1903년에 102명이 첫 사탕수수 밭의 일군으로 이민와서 살기 시작한 사람들이 당시 하와이에는 7천 여명의 교포들이 살고 있었다. 그때 많은 교민들이 나와 환영을 한다. 그녀는 오스트리아에서 태어난 한국인이라고 했다. 결혼때 그의 나이 59세, 그녀는 34세였다. 화니(프랜체스카)는 조선의 양반에 대해서 물었을때 이승만 박사는 왕손으로 조선을 세운 태조의 첫 아들 양녕대군의 16대 손임을 알려준다. 이곳에서 이승만은 “태평양 잡지”라는 한글 잡지를 만든다.

5. 공산주의에 대한 명확한 통찰

이승만 박사의 예언적 혜안은 1917년 공산혁명이 일어나자 1923년 “공산당의 당부당”이라는 논문에서 “공산주의 이론의 핵심은 모든 소득과 자산의 평등 분배다. 평등분배는 생산성 경쟁과 창의를 저해하고 결국은 문명 발전을 파괴하며 인간의 영혼과 생명이 없는 독재자의 소지품으로 변한다.” 공산주의가 잘못된 것은 하나님이 부여한 인간의 자유를 일당 독재가 몰수하고 일당 독재는 일인 수령숭배로 유지되는 것이 공산주의의 본질이라고 역설하고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이기에 반드시 망하게 될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공산주의는 콜레라와 같아서 인간이 콜레라와 같이 살 수 없는 것처럼 공산주의와는 함께 살 수 없다고 했다. 미국은 1947년 3월12일에 트루먼 독트린을 선포하고 이승만 박사가 23년전에 선포한 공산주의의 잘못을 이해하고 소련과 수교를 끊었다.

이승만 박사의 정치철학 기조는 자유민주주의의 나라 미국과 긴밀하게 지내는 외교였고 반공 투쟁이었다. 1917년 볼세비키 혁명으로 공산주의 소비에트 연방이 결성되었을 때 미국을 위시한 세계 어느나라도 공산주의의 모순과 실체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하고 있을 때, 이승만은 처음부터 공산주의와는 절대 타협할 수 없다고 확실한 입장을 고수하였다. 공산주의는 인간의 존엄성을 인정하지 않는다. 소련은 패권을 유지하기 위하여 핵무기를 개발하면서 2000만명이 아사하고 ,중국에서는 3800만명이 , 북한에서는 300만명이상이 굶어죽었다.

송병기 박사(전 뉴욕장로회신학대 학장)

*본 칼럼은 송병기 박사가 지난 8월 18일 열린 한국교회정론 제6차 포럼에서 '세기의 대통령 한국의 이승만 그리고 그의 신앙'이라는 주제로 강연한 발제문입니다. 본지는 송 박사의 허락을 받고 해당 발제문을 여러 차례 칼럼으로 연재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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