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진수
미국 월드미션대학교 예배학과 가진수 교수

신약 성경에는 구약 성경과 달리 음악과 찬양에 대한 자료가 많지 않다. 가장 큰 이유 중 하나는 역사적으로 초대 교회 시기에 로마의 핍박과 박해로 드러내놓고 찬양을 부르고 악기를 연주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예배는 다윗 시대의 성전예배 양식을 많이 따랐으며, 당시 그리스, 로마 시대의 음악과 접촉하면서 여러 교류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의 무질서한 예배를 책망하면서 예배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하고 있다.

“그런즉 형제들아 어찌할까 너희가 모일 때에 각각 찬송시도 있으며 가르치는 말씀도 있으며 계시도 있으며 방언도 있으며 통역함도 있나니 모든 것을 덕을 세우기 위하여 하라”(고전 14:26)

이를 통해 바울은 예배 요소의 다양성과 공동체적인 개념의 중요성에 대해서도 강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초대 교회는 AD 313년, 콘스탄티누스(Aurelius Constantinus, 272-337) 황제가 밀라노칙령으로 기독교를 공인하면서 신앙의 자유를 얻게 되었으며, 비로소 교회가 지상으로 올라올 수 있었다. 이때부터 지역마다 교회가 하나씩 있는 경우가 많았으므로 이를 ‘지역 교회(Local Church)’라 부르게 되었다. 이후 교회는 예전(Liturgy)이 발달함에 따라서 찬양대의 발전에 힘을 쓸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교회는 특권층이 되어갔으며, 성전을 건축하고 예배 형태도 자리 잡으면서 음악적인 수준도 높아져갔다. 이때부터의 예배는 오히려 지도층을 위한 예배가 되었으며, 평신도는 수동적으로 앉아 예배를 드릴 수밖에 없었고 찬송마저도 부르지 못했다.

당시 찬양은 훈련된 찬양대만이 할 수 있었으므로 평신도들은 마치 공연에 온 것과 같은 느낌을 받았다. 게다가 이교도와 이단들의 범람으로 인해 악기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였으며, 찬송은 대부분 특별한 행사에만 부르게 되었다.

중세 시대의 교회 음악은 가톨릭 시대의 음악과 궤를 같이 한다. 교황 레오(Sanctus Leo, 440-461)는 수도원을 세웠으며 성가학교에도 관심을 가졌다. 이후 교황 그레고리 교황(Gregory the Great 540-604)은 교황의 사절로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에 7년간 파견되어 머무르면서, 라틴 예배식 초기 성가인 ‘암브로시우스(Ambrosius, 340-397) 성가’를 연구해 이를 밀라노에서 주로 사용했다. 이후 교황 즉위 후에는 새롭게 보강하여 음악을 만들었는데, 이것이 ‘그레고리 성가(Gregorian Chant)’다. ‘그레고리 성가’는 가톨릭의 전통적인 단선율 성가의 무반주 음악이다.

또한 ‘스콜라 칸토룸(Scholar Cantorum)’이라는 음악 학교를 설립해 예배에서 찬양하는 사람을 교육시키고 배출했는데, 이는 잘 훈련된 사람이 찬양해야 예배가 경건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초기에는 음악이 단순했으므로 남자 성인만으로 구성한 아카펠라였지만, 음악이 단성 음악에서 다성 음악으로 발전하면서 여러 파트가 필요해지게 되었다. 그러나 예배에 여성을 세울 수 없다는 생각으로 여성 대신에 소년들을 찬양대에 기용하게 되었으며, 이런 구성은 16세기까지 이어졌다. 이 시대에 음악이 더욱 발달하면서 변성기 이전의 소년들을 거세시켜 변성하지 못하게 해 소프라노를 담당하게 되었는데, 이를 ‘카스트라토(Castrato)’라고 한다.

그레고리 성가는 7세기 말 영국으로 전해졌으며, 8세기 초에는 독일로 퍼져갔다. 이후 로마제국의 세력이 커지자 그레고리 성가는 모든 유럽에까지 퍼져 교회음악의 모범이 되었다. 8세기부터 10세기에 이르는 중세 초기에는 더욱 발전하면서 다성 음악이 주류가 되었으며, 11세기에서 12세기에 이르러서는 다양한 새로운 시도들도 일어났지만 역시 모두 사제 중심의 찬양과 음악이었다.

15세기부터, 1400년대부터 1600년대 사이에 르네상스 음악이라고 불리는 새로운 합창음악 양식이 소개되었다. 합창음악은 전 유럽에 퍼져나갔으며, 많은 작곡가들이 대부분 가톨릭 교회의 미사를 위해 작곡했다. 르네상스 음악은 음악이론, 작곡, 연주의 수준을 높였으며, 많은 악기들이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1517년, 종교 개혁은 예배와 찬양에 있어서 획기적인 전환기를 맞이하는 사건이다. 기존 가톨릭의 예배, 즉 미사는 앞에서 언급한대로 사제 중심의 미사였으며 찬양 또한 특수한 계층의 노래였다. 마틴 루터의 종교 개혁이 성공하자 곳곳에서 이런 전통적 찬양대를 해산시키게 되었다.

이에 따라 예배 예식에서 찬양대만 노래를 하는 것이 아니라 평신도가 직접 찬송하는 새로운 전통이 생기게 되었다. 그러나 찬양의 질적 저하를 우려한 끝에 다시 오늘날과 같은 찬양대를 조직하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과 같은 혼성 찬양대의 편성은 18세기 이후 독일에서 시작되었는데, 이는 종교 개혁의 영향이다.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6)가 1517년 비텐베르크 성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붙이며 촉발된 종교 개혁 이후 여러 교회와 신앙 운동들이 일어났는데, 그 원인과 결과를 살펴보면 찬양이 어떻게 발전해왔는지 들여다 볼 수 있다.

종교 개혁자들은 시적인 가사에 곡을 붙여 일반 회중들이 쉽게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도록 해 신앙적 깨달음을 갖도록 했다. 특히 루터는 그동안의 형식적 틀에서 벗어나 여러 사람의 저자에 의해 이루어진 종교시 등을 노래하는 형식을 선호했으며, 이를 통해 대중들의 신앙을 고취하려고 했다. 반면 칼빈(John Calvin, 1509-1564)은 시편, 즉 시편의 성구를 가사로 노래하는 정형화된 형식을 취했다.

이 같이 종교 개혁자들의 생각은 서로 다른 부분들이 있었지만, 종교 개혁의 가장 크고 분명한 공헌은 중세 가톨릭 미사에서의 라틴어가 이제 독일어를 비롯한 각 나라의 언어로 번역돼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다.

바로크 시대인 16세기 후반부터 17세기에 이르러서는 기보법의 발전과 악기 발달에 힘입어 기악 음악이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 예배에서뿐만 아니라 행사와 공연을 위해서도 교회 음악이 만들어졌다. 이 시기에 바흐(Johann S. Bach, 1685-1750)와 헨델(George F. Handel, 1685-1759) 등은 성경 말씀을 바탕으로 장엄한 ‘메시아’ 같은 오라토리오를 비롯해 웅장한 칸타타와 다양한 곡들을 작곡했다.

활발한 음악의 발전은 영국 찬송가의 아버지 아이작 와츠(Isaac Watts, 1674-1748)와 요한 웨슬레(John Wesley, 1703-1791) 등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특히 와츠는 750개의 찬송시를 써서 회중들의 경험과 감정의 중요성을 알렸으며, 당시 영국 국교회의 음악을 시편에서 찬송가로 전환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종교개혁이 끝나고 난후, 유럽은 종교개혁을 지지하는 나라들과 반대하는 가톨릭 진영과 나눠지면서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반에 이르는 모든 것이 분리되기 시작한다. 유럽의 기독교인들은 교회의 양분 이후 사회적으로, 경제적으로 혼란한 시기를 맞이했다. 심지어 대부분이 기독교인이었던 유럽 사회에서 교리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 중 어디에 속하는지에 대한 질문들은 사회생활과 실생활에도 영향을 끼쳤다.

경건주의 운동
경건주의 운동

교회 내부에서도 교회의 정통성, 즉 정통주의 신학의 교리적 강조에 중점을 두게 되었고, 교회 설교와 선교도 기독교인의 태도와 실천보다는 정통성을 강화하는 교리의 인정에 중점을 둘 수밖에 없었다. 이에 점차 개신교의 제도 중심화, 교리 중심화가 신앙의 실천, 변화의 경험을 막는 것에 대한 반성이 나타났는데, 이 반성은 독일 루터교회의 내부에서 경건주의(Pietism)로 발생하였으며, 점차 전 유럽 전역과 영국과 미국의 교회들로 퍼져갔다.

경건주의 창시자인 필리프 슈페너(Philipp J. Spener, 1635-1705)와 그의 젊은 동역자인 아우구스트 필리페(August H. Francke, 1663-1727) 등을 중심으로 경건주의 사고, 독서와 실천, 상업 활동, 사회 개화, 종교적 경험, 할레 대학 등의 학교 설립까지 광범위의 영향력을 발휘해 17세기에서 18세기까지 영향을 주었으며, 계몽주의 발전의 기독교적 배경을 마련했다. 이 같은 교리 중심의 교회에 대한 반성에서 시작된 ‘경건주의(Pietism)’는 신학적 개념보다는 기독교인의 생활과 실천을 강조하는 사상이자 종교 운동이었다.

경건주의 지도자들
경건주의 대표적 지도자들 (스펜서, 프랑케, 진젠도르프) ©가진수 교수 제공

16세기말부터 17세기까지 지속된 경건주의 운동은 교회의 죽은 정통과 냉담한 영성에 대한 문제가 제기되어 영적 운동을 염원하는 ‘모라비안 형제회(Moravian Brethren)’ 등에 영향을 주게 되었다. 모라비안들은 1722년 가톨릭의 탄압을 피해 진젠도르프(Nikolaus L. Zinzendorf, 1700-1760) 백작의 영지로 들어가게 되었으며, 그곳에 모라비안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다. 이후 복음주의자들이었던 모라비안 교도들은 유럽 각지로 흩어져 영향을 주었는데, 요한 웨슬리(John Wesley)가 감리교회를 창설하게 되는 원인이 되었다.

헤른 후트
진젠도르프 백작과 헤른 후트의 형제단

1727년경 당시 헤른후트(Herrnhut)는 신앙에 있어 예정설, 거룩함, 세례(침례) 등 여러 다른 견해로 서로 다투며 상처받고 분열된 상태였다. 이곳에서 진젠도르프는 집회를 통해 연합과 사랑과 회개를 촉구했으며, 계속된 기도회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고 새로워지는 성령의 강한 능력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를 통해 공동체마다 회개와 기도운동이 일어났으며, 성령의 기름 부으심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오는 역사가 계속되었다. 성령으로 무장되기 시작한 모라비안들은 모일 때마다 기도와 찬양을 함께 불렀으며, 은혜가 넘쳐 거리에서도 복음을 전하며 찬양을 불렀을 정도였다.

헤른 후트
헤른 후트

종교 개혁 이후 교회가 신앙적 갈등 속에 빠져 있을 때, 18세기에 일어난 경건주의 운동은 수동적인 교리 중심의 신앙을 적극적이면서 마음으로 기도와 찬양을 통해 하나님을 새롭게 경험하고자 한 복음주의적인 성령운동이라 할 수 있다. 이는 18세기 이후 성령 운동을 확장시켜 은사주의에 영향을 주게 되고, 감리교회와 성결교회 그리고 더 나아가 오순절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주게 되었다.

존 웨슬리
존 웨슬리의 거리 설교

또한 종교 개혁과 정통적 교리중심의 교회에 반대하며 예배에 있어서 수동적이 아닌 능동적인 예배와 찬양을 지향했다. 이를 통해 기독교 공동체에 기도운동이 일어나게 되었으며, 회개와 치유와 사랑을 바탕으로 한 복음주의 운동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초대 교회의 말씀과 성찬으로 하나 되었던 기쁨의 예배 공동체는 예배사에서 ‘잃어버린 1000년’이라고 일컫는 AD 500년에서 16세기 종교 개혁의 시대까지 예배의 역동성을 잃어버리고 사제 중심의 수동적 예배를 거치면서 예배의 본질이 사라져버렸다.

할레대학
경건주의의 요람 할레대학

종교 개혁 이후, 종교 개혁자들을 중심으로 초대 교회의 유산을 회복시키면서 다양한 믿음의 성향대로 종파들이 나누어졌으며, 말씀 중심의 교리 중심화는 하나님을 향한 소통과 체험을 중시하는 경건주의 운동이 발생하는 원인이 되었다. 은사주의의 씨앗과 같은 경건주의의 발생은 하나님을 수동적이 아닌 능동적으로 찾고 경험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인식을 갖게 했으며, 예배에서의 찬양의 역할의 중요성을 인식하는 계기가 되었다. 경건주의는 이후 발생하는 여러 복음주의 집회와 기도 운동, 그리고 현대 예배와 찬양의 임재신학 등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주었다.

가진수(월드미션대학교 예배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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