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중세 신비주의와의 연관성

이경섭 목사
이경섭 목사

‘영성’(spiritualitas)이라는 용어의 기원은 역사적으로 중세까지 거슬러 올라가며, 이런 중세와의 연관성이 이 용어에 대한 거부감의 한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칼빈을 위시해 종교개혁자들이 의도적으로 ‘영성’이라는 말을 피하고 ‘경건(piety, 敬虔)’ ‘헌신(devotion, 獻身)’이라는 말로 대신한 것도 다 이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그러나 실제로 교회사에서 이 용어를 최초로 쓴 사람은 5세기초의 ‘위-제롬(Pseudo-Jerome)’으로, 바울적 용어인 ‘성령을 쫓아 살라’는 권면의 내용 중에 포함되어 사용됐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본격적인 중세 신비주의적인 용어로 쓰게 된 것은 9세기 들어 ‘칸디두스(Candidus)’라는 수도사가 이원론적인 개념에서 육체나 물질과 대립되는 의미로 사용하고서부터라고 합니다(정용석, 기독교 영성과 영성학). 따라서 ‘영성’이라는 용어가 중세적인 용어이기는 하지만, 반드시 이원론적인 기원을 가진 것은 아닌 듯합니다.

그리고 17세기부터 20세기에 걸쳐 존 오웬(John Owen, 1616- 1683), 스펄젼(C. H. Spurgeon, 1834- 1892), 월필드(B. B. Warfield, 1851-1921)의 저작들 속에서 이 용어의 사용이 확인되고 있음을 볼 때, 영미(英美)의 청교도들과 개혁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이 용어는 크게 거부감이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B. B. Warfield, Biblical And Theological Studies).

개혁교회의 본산인 화란 교회 역시 ‘영성’이라는 단어가 대단히 문제가 많은 용어이긴 하지만, 현재 개신교 안에서 워낙 광범위하게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에 이 용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물론 일부 화란신학자 중에는 ‘영성’이란 용어가 모호하고 로마 가톨릭적 배경을 가진 타당치 않은 용어라는 이유로, ‘영성’ 이란 단어 대신에 ‘개혁주의 구원 체험(gereformeerde bevinding)’이란 단어를 사용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흐라플란트(C. Graafland) 같은 신학자는 이 단어가 ‘영성’ 보다는 훨씬 분명한 개념이기는 하지만 ‘영성’의 포괄적 의미에는 미치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개념의 모호함에도 불구하고 ‘영성’이라는 단어를 계속 사용하고 있습니다(참조, 변종길, 화란 개혁 교회의 영성과 경건, Gisbertus Voetius를 중심으로).

2. 종교다원주의와의 연관성

‘영성’이라는 용어에 대한 부정적인 이미지 가운데 하나는 종교다원주의와의 관련성일 것입니다. 20세기 말에 이르러 이데올로기의 붕괴, 세계화 사조와 함께 다문화, 다종교의 공존 양식은 이미 교조주의나 민족주의 같은 모난 사상 체계들을 밀어내었고, 기독교 내에서도 기존의 패러다임에 어떤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들이 생겨났습니다.

특히 기존의 교조적이고(dogmatik) 배타적인 기독교 패러다임으로는 더 이상 21세기의 종교다원주의시대에 살아남을 수 없을 것이라는 위기의식에 젖은 일련의 에큐메니스트들(ecumenists)이 ‘영성’을 그들의 종교보편화 운동에 사용하면서, 마치 종교다원주의의 대명사처럼 인식되어버렸습니다. 이런 분위기에서 교회에 도입된 영성이라는 용어가 정통 개신교인들에게 거부감을 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런 혐의에도 불구하고 이 용어의 함축성, 포괄성의 장점은 쉽게 이 용어를 종교다원주의자들에게 넘겨 줄 수 없게 합니다. 물론 이는 펠러마(W. H. Velema) 교수가 지적한 것처럼 “그 개념의 모호성으로 인해 각자 자기의 원하는 바를 이 단어 속에 집어넣을 수 있다”는 편의성 때문이 아니라, 신학은 물론 문화까지를 담아낼 수 있는 포괄성의 장점 때문입니다.

한 때 한국교회가 기독교에 ‘종교(religion)’라는 용어를 붙이는 문제가 이슈화 된 적이 있었습니다. 이는 불교나 유교, 샤머니즘 같은 민간 종교들이 오랫동안 공존해 온 상황에서, 기독교를 종교라 부름으로, 기독교 역시 그런 류의 하나로 간주되어, 기독교의 정체성이 훼손될 것이라는 염려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려와는 달리 그것은 오히려 기독교를 변증하는데 긍정적인 기여를 해주었습니다.

‘영성’ 이라는 용어가 사용상 어려움이 있지만, 신중하게 사용하기만 하면 오히려 내적으로는 신학논리 전개에 풍부한 언어적 상상력을 제공받을 수 있고, 대외적으로는 기독교를 변증해 내고, 종교다원주의로부터 기독교를 보호하는데 유용할 것으로 보입니다. (계속)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개혁신학포럼 대표)

* 이 글은 이경섭 목사가 쓴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2005년)’ 중에서 발췌한 것입니다. 이 목사의 저·역서는 <이신칭의, 값싼 은혜가 아닙니다(CLC)>, <개혁주의 신학과 신앙(CLC)>, <개혁주의 영성체험(도서출판 예루살렘)>, <현대 칭의론 논쟁(CLC, 공저)>, <개혁주의 교육학(CLC)>, <신학의 역사(CLC)>, <기독교신학 묵상집(CLC, 근간)> 등이 있습니다. 개인 블로그(https://blog.naver.com/PostList.nhn?blogId=byterian)도 운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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