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해안 약 1마일 밖에 닻을 내렸다. 비가 내리고 바람이 불어 30분을 기다려야 했고, 증기선은 작은 한국 배 두 척이 다가올 때까지 계속해서 매우 불안하게 흔들거리며 파도 위에서 요동쳤다. 우리는 작은 배 중 한 배에 짐을 실을 수 있었고, 거의 30분 동안 온몸이 비에 젖은 후에야 제주(Chai-joo)17) 외곽에 있는 어부의 허름한 집으로 우리의 짐을 옮길 수 있었다. 그 시각부터 우리의 고난은 시작되었다. 비는 7일간 밤낮으로 쉬지 않고 퍼부었다. 이 기나긴 시간 동안 우리는 방의 넓이가 6제곱피트(약 0.56㎡)18)에 불과하고 높이가 6피트(약 1.83m)도 안 되는 어두컴컴한 방에 갇혀있었다.

대한국을 여행하면서 겪는 여러 가지 난관이 있지만, 비가 끊임없이 내리는 며칠 동안 오두막의 작은 방에 갇혀있다는 것은 견뎌내기 쉽지 않은 일이었다.

1884년 전라도 관찰사 김성근과 육방, 통인 등의 모습
1884년 전라도 관찰사 김성근과 육방, 통인 등의 모습. 피터스 일행은 당시 대정현 현감을 두 번 만났다. ©Uni. of Wisconsin Milwaukee Library

사람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상상할 수 없겠지만, 누구든 같은 경험을 한다면 내 말을 쉽게 이해하게 될 것이다. 낮에는 너무 어두워서 책을 읽기조차 힘들었다. 이에 대한 보상 심리로 우리는 종종 밤에는 커다란 양초 5개를 동시에 켜놓았다. 우리는 비가 전혀 멈출 기미를 보이지 않아 절망에 빠진 나머지 어서 이 섬을 떠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다행스럽게도 8일째 되던 날(역주: 1899년 3월 2일), 비는 그치고 개이기 시작해 우리는 희망을 가질 수 있었다.

다음 날은 쨍하고 밝은 해를 볼 수 있게 되어, 우리는 깊은 진흙탕 길임에도 불구하고 바로 떠나고 싶었지만 일주일간 비가 너무 퍼부어 건너야 할 개울에 물이 불어 건널 수 없었다. 우리는 다음 날(역주: 하루를 더 기다려 3월 4일)을 기다려 섬을 한 바퀴 돌아보는 여행을 떠났다. 출발하기 전 우리는 말(馬)을 빌리려 했지만, 일 년 중 이 시기에는 말이 너무 약해서 탈 수 없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 사실을 부정하고 싶었다.

“제주 말(The Korean Pony)”을 타고 제주도를 여행하는 즐거움

길은 강원도의 험지보다 훨씬 다니기 어려운 상태로 변해, 내가 여태껏 가본 길 중 최악의 상황이라 다른 이름이 필요하지 않다면 ‘길’이라고 부르기 민망할 정도였다. 그것은 오로지 1피트(약 0.3m) 간격으로 서 있는 두 개의 돌담이라 부를 수 있으며, 모든 가능한 크기와 모양의 돌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여기저기 돌벽이 무너져 내려 길을 완전히 막고 있었다.

내린 비로 인해 빗물과 진흙이 돌 사이 공간을 가득 채워, 도로가 마르면 누군가는 그 길을 택할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돌 위를 밟으며 나아가야 했는데 여러 번 발이 돌 위에서 미끄러져 물웅덩이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땅바닥에서 잠시도 눈을 떼지 못한 채 걷다 보니 곧 현기증이 생겼고, 정오쯤 되자 나에게는 심한 두통이 몰려왔다.

길은 계속 오르막이어서 걷기 힘든 것이 당연했는데, 그 와중에 생긴 불편한 마음이 우리를 더 힘들게 했다. 4시간이나 걸었지만 6마일(약 9.7km)밖에 못 나아간 후, 우리는 오두막이 몇 채 있는 어떤 마을에 도착했다. 거기서 우리와 같이 간 일꾼들은 마을 사람들과 30여 분 동안 실랑이를 한 후에야 드디어 함께 간 일꾼들에게는 수수(기장)밥을, 우리에게는 쌀밥을 해주겠다고 동의했다.

1890년대 제주도 산지천 하류 건입포구
1890년대 제주도 산지천 하류 건입포구 ©제주기록문화연구소 하간

점심 식사 후 우리는 계속해서 길을 갔고 주변이 어둑해질 즈음에 또 다른 비슷한 몇 채의 오두막이 있는 마을에 도착했다. 우리는 출발 전에 섬 전체에 주막집이 없다는 말을 들었지만, 현과 현 사이에는 관에서 지은 관아 건물이 있으며 여행하는 관리들의 숙박을 위해 객사19)를 운용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나저나 13마일(약 21km)이 넘지 않는 여정이었지만 우리는 하루종일 걷기에 녹초가 되어, 사려 깊은 관아에서 관리하는 객사에서 지낼 수 있는 편안한 밤의 휴식을 갈망하고 있었다.

여러분들은 우리가 다음과 같은 집을 보며 느낀 바를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6제곱피트(약 0.56㎡, 미주 18. 참조)도 안 되는 방 넓이, 천장 높이는 5피트(약 1.5m)가 조금 넘고, 황토 흙벽이며, 거미줄이 쳐있고 연기로 그을린 검은 천장, 방바닥은 흙바닥, 3피트(약 0.9m) 크기로 잘 닫히지도 않는 문 등…. 방 한구석 기둥에는 곡물로 가득 찬 바구니들과 방의 1/3을 차지하고 있는 불결한 낡은 겨울옷, 버선, 낡은 밀짚 가방, 항아리 등등 많이 있었다. 그나마 이 방은 그 숙소에서 가장 괜찮은 집이었다. 그 옆으로 우리 방보다 상태가 좋지 않은 다른 방이 있었는데, 숙소 관리인이 이곳에 있던 그의 병든 아내를 다른 곳으로 보냈다. 함께 간 우리 한국인 일꾼들은 기온이 빙점 이하였지만 밖에서 저녁을 먹고 집 밖의 헛간에서 밤을 보내야 했다.

나는 관아를 위해 이 집을 지은 관리는 유배된 관리 중에 있다고 보이지 않고, 이 집을 지은 관리가 유배될 자격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낡은 버선들과 지저분한 벽 사이에 끼어 잠을 청했다. 나는 우리가 안내 일꾼들처럼 마당에서 잘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벼룩, 바퀴벌레 등은 우리에게 그리 심각하지는 않았지만, 아침이 일어나 보니 우리 온몸에서 그들의 많은 흔적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우리는 다음 날(역주: 3월 5일) 일찍 출발했다. 처음 30리 길은 매우 좋았다. 돌이 몇 개 밖에 없었고 가는 길은 내리막길이었다. 그러나 마지막 20리 길은 그 어떤 길보다 험했다.

내리막길이었기 때문에, 우리는 발을 내딛으며 날카로운 돌 표면 위에 강하게 부딪쳤고, 비록 우리의 눈은 신중하고 조심하며 바닥을 보며 내려왔지만, 우리는 계속해서 미끄러지고, 돌뿌리에 걸려 넘어지고, 돌과 부딪쳤다. 나아가는 길 내내 집이 한 채도 보이지 않았지만, 6시간 동안 속보로 이동한 끝에 우리는 대정(Tai-chang)20)에 도착했다.

1914년 제주 성내 관덕정 광장 오일장 풍경
1914년 제주 성내 관덕정 광장 오일장 풍경 ©제주기록문화연구소 하간

읍에 가까이 가면서 우리는 도로가 포장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 포장 상태는 우리가 진흙 길을 걷는 것이 더 나을법한 그런 상태였다. 피곤하고 배가 고파 지쳐서 마을에 도착한 우리는 팔다리를 펴고 먹을 것을 구할 수 있는 곳을 찾았지만, 우리에게 적합한 주막이나 집은 없다는 대답을 담담히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서 우리는 2개의 커다란 바위 위에 녹초가 되어 앉아서, 우리를 둘러싸고 쳐다보며 여러 가지 표정을 짓고 온갖 종류의 말을 쏟아내는 엄청난 군중과 말싸움을 하고 있었다. 30여 분 동안 그들과 성과 없는 논쟁을 벌인 후, 우리는 현감에게 가서 우리에게 숙소를 내어주도록 부탁하기로 했다. 우리는 연로하신 현감 몸이 아프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는 우리를 충심으로 대해주었다. 주사(Chusa)는 우리가 묵을 집을 찾기 위해 즉시 출발했다.

현감께서는 우리가 바로 방문하지 못한 일에 대해 미안하다고 했고, 주민의 무성의에 대해 사과했다. 사실은 그러한 조치가 우리가 방문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며, 그는 우리를 어떻게 대접해야 하는지 모르는 것처럼 보였다. 주사가 돌아오는 것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는 다과와 음료를 대접받았는데, 즉 쌀과자, 포멜로, 꿀, 위스키, 가루 설탕, 그리고 파이프 담배였다. 담배는 관아 하인이 장죽담뱃대에 조심스럽게 불을 붙여서 몇 모금 빤 후에 건네줬다. 오래지 않아 주사가 돌아와 우리를 숙소로 안내했다.

이 집 역시 단칸방이었으며, 이곳에서만 방에 두 개의 문이 있었는데 하나는 암소 축사로, 다른 하나는 마구간으로 통하는 문이 달려 있었다.

어쨌든 이 문의 용도는 신선한 공기를 순환시키는 목적을 가진 것은 아닌 것 같았다. 우리는 3일 동안 소와 말을 가까이 이웃으로 두고 함께 지냈다.

넷째 날(역주: 5일~7일까지 3일간 묵었으니 여행 넷째 날은 3월 8일) 오전에는 비가 내렸지만, 정오가 되자 개이기 시작해 우리는 출발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하늘이 마음을 바꾼 것처럼 보였고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빗속에서 약 10리를 걸어야만 했고, 숙소에 도착했을 때는 물에 흠뻑 젖어 있었다.

다음 날(역주: 3월 9일) 아침에는 밝은 햇살이 보였고, 우리는 계속해서 나아갔다. 저녁이 되어 우리가 쉴 수 있는 곳에 도착하기까지 지나온 거리는 70리였다. 길 상태가 좋아 오늘은 걷기 쉬운 날이었다. 그러나 이 구간에서, 우리는 그렇게 걸었지만 우리가 이곳에 도착하기 훨씬 전에 땅거미가 져버렸다. 한 시간 반 동안 우리는 좁은 돌길 위의 어둠 속을 걸어야 했으니, 우리가 이곳에 도착해 얼마나 행복했는지 쉽게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우리의 안쓰러운 발이 감수한 모든 생채기와 긁힘과 온갖 고난에도 불구하고, 숙소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목이 부러지지 않았음을 행운이라고 생각했다. <계속>

[미주]
17) 피터스가 기록한 친필 원본에는 “a fisherman hut in the city of Chai-joo or Choo-Song”이라고 기록해 당시 제주읍을 주성이라 불렀음을 알 수 있다. 피터스가 제주를 방문하기 6개월 전에 제주도를 방문한 프랑스계 미국인 샤이에 롱 한성주재 총영사 겸 서기관은 그의 제주도 여행기에 “켈파트 섬의 3대 주요 도시는 주성(州城: Chu-Song), 동남쪽에 있는 정의, 그리고 남서에 있는 대정이다”라고 기술했고, 주성의 인구는 25,000명, 다른 읍은 5,000명으로 설명했다. 제주견문록, 제주시우당도서관(2013), 91쪽에서 재인용.
18) 여기서 피터스가 방의 넓이를 6제곱피트로 기록한 것은 “a 6-foot square room, 단칸방”을 이렇게 표현한 것으로 여겨진다. 아무리 당시 제주도의 오두막이 좁았다 해도 1㎡도 안 되는 방은 없었을 것이다.
19) 객사(客舍): 고려·조선시대에 각 고을에 둔 관사. 지방마다 크기와 모양은 달랐지만 객사 건물 가운데 전대청(殿大廳)은 가장 중요한 공간으로, 국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를 모셔두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에 궁궐을 향해 절을 하였다. 원주사료총서 제14권, 동영중기(하), 269쪽
20) 1880년 간행된 ‘한불자전’에는 “대졍, TAI-TJYENG, 大靜, Quelpaërt(Tjyei-tjyou). 1 hyen-kam” 이렇게 설명되어 당시 제주와 대정의 영문, 불문 표기를 볼 수 있고, 현감이 주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에는 대정을 “제주특별자치도 서귀포시 서부를 관할하고 있던 옛 행정 구역”이라 정의.

리진만 선교사

역자: 리진만(우간다·인도네시아 선교사)
감수: 장서원 박사(서울대 천문우주연구센터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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