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금주 박사
한국교회사학연구원 제266회 월례세미나에서 류금주 박사가 발표를 하고 있다. ©장지동 기자

한국교회사학연구원(권평 원장)이 8일 서울시 서대문구 소재 은진교회(김유준 담임)에서 제266회 월례세미나를 개최했다. 이날 류금주 박사(서울장신 교회사, 부원장)가 ‘한국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 로버트 토마스 목사의 한국 선교’라는 주제로 발표했다.

류 박사는 “세상에는 증인이 있고 변호사가 있다. 이 두 가지 중 증인이 더 강력하게 힘을 발휘한다. 일차적이기 때문”이라며 “변호는 이차적이다. 한국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 로버트 토마스(Robert J. Thomas, 1840.9.6~1866.9.5)가 우리에게 알려진 경로도 그러하다. 대개는 토마스에 대한 변호들에 그쳤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그에 대한 말들을 통해, 그러니까 한 번 걸러서, 우리는 토마스를 알고 있었다”고 했다.

이어 “그러나 토마스가 우리에게 직접 말을 하게 된 때가 온 것이다. 이 일은 2017년 12월, 한 해가 기울어가는 세모(歲暮)에 출판된 한 권의 책을 통해서 가능하게 되었다”며 “한국교회사학 연구의 대석학 민경배(閔庚培) 교수가 엮어 펴낸 「한국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 로버트 J. 토마스」인데 부제가 중요하다. 그 부제는 ‘그가 주고받은 편지들, 기록들’이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 민경배 교수는 논문에서, 그동안 한국에서 잘못 알려져 있던 한국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 로버트 토마스와 관계된 몇 가지 사실들을 우선 바로 잡았다”며 “토마스에 얽힌 오해 두 가지는 첫째, 그의 출신지와 둘째, 그의 출신대학에 관한 것이었다”고 했다.

그는 “로버트 제르메인 토마스는 1866년 9월 6일 평양 대동 강변에서 순교한 한국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라며 “1840년 9월 5일, 웨일즈 라드노(Radnor)주라야다(Rhayader)에서 부친 로버트 토마스와 모친 메리 로이드(Marry Lloyd)의 아들로 태어났다. 2남3녀 중 둘째 아들이었다. 1839년 라야다교회에 부임한 부친은 토마스가 8살이 되던 해 하노버 회중교회 목사로 이전했다”고 했다.

이어 “1856년 고등학교 졸업 후 은들(Oundle)에 있는 초등학교에서 반 년 가량 교편을 잡았던 토마스는 그해 런던대학교에 입학, 1859년까지 재학했다. 그리고 1857년 9월부터 일년 간 뉴칼레지(New College)에서 수학했다”며 “1960년 10월 다시 복교한 토마스는 1863년 5월 신학교육 과정을 다 마치기까지 선교사가 되기 위해 ‘유럽어를 대부분 익히고, 워타만 박사 아래서 의학을 18개월간 정성들여 배웠고, 그리고 도처에서 설교를 하며 그 재능이 경탄할 만한 정도라는 평가를 받기에 이르렀다”고 덧붙였다.

또 “선교사로서의 준비 시간의 확보와 휴학 때문에 교수들의 오해와 무례의 혐의와 반목도 불사했다. 1863년 5월 뉴칼레지를 졸업한 토마스는 런던선교회 파송 중국선교사로 임명되어 6월 4일 목사안수를 받았다”며 “얼마 뒤 캐롤라인 고드페리(Caroline Godfery) 양과 결혼한 그는 7월 21일 중국을 향해 떠나 12월 초 상해에 도착했다”고 했다.

그러나 “중국에 간 토마스는 인간적 불운에 휩싸였다”며 “상해에 도착한 이듬해 3월, 중국 생활 겨우 4개월 만에 그의 부인이 유산으로 사망했다. 게다가 선임 선교사 무어헤드(Wm. Muirhead)와 여러 이유로 갈등을 겪고 괴로워하던 나머지 급기야 런던선교회를 사임하게 되었다. 1864년 12월 8일부터 통역 연수관으로 취직한 지푸 소재의 중국 황립해상세관은 선교사 토마스의 일시적 피난처였다. 세관에 있으면서도 그는 상해가 아닌 다른 곳으로의 전직만 허락 된다면 언제든지 복직하겠다고 계속해서 밝히고 있었다. 그만큼 상해에서 겪은 그의 인간적 아픔은 컸다”고 했다.

류 박사는 “그는 8월 31일부로 세관을 사임했다. 그리고 오랜 시간 기다린 끝에 1865년 1월 초 런던선교회에서 복직을 허락 받았다. 그 자신도 경솔한 행동으로 후회하고 있었던 그의 사임에 얽힌 여러 가지 정황들과 그의 선임 선교사의 난폭하고 무례한 행동들이 그 어간 어느 정도 밝혀지고 있었다”며 “토마스의 예의 바름과 돈 문제를 처리하는 데에서 보인 신사다운 품격, 선교에 대한 강렬한 열정과 탁월한 언어 실력과, 성육신적인 선교 자세와, 상층과 하층의 중국인들과 스스럼없이 접촉하거나, 북경에 살던 소수민족이나 몽골과 한국과 러시아 등 중국 변경에도 시야를 돌리는 광활한 선교 신학이 도처 인정받고 증언 되고 있었다”고 했다.

이어 “토마스는 일찍이 스코틀랜드 국립성서공회와 연결되고 있었다. 윌리엄슨은 토마스에게 한문 성서를 여러 권 주어서 한국 서해안에서 반포하게 했다. 1865년 9월부터 거의 4개월여에 걸친 이 여행에서 토마스는 한국말도 배우고 지리도 익히고 한국에서의 성서 반포에 대한 확신과 개신교 선교 착수의 열의를 가지고 돌아왔다. 돌아와 있으면서, 한문과 한글을 읽을 줄 아는 한국인들에게 성서를 반포하며 복음을 전한다는 꿈을 자신의 사명으로 확신할 수 있었다”며 “그 자신이 서해안에 뿌렸던 성서, 그 책을 다시 얻을 수 없겠느냐는 북경을 찾은 어느 조선인 사절 단원의 말은 가톨릭이 이미 선교하고 있고 정교회 국가 러시아도 한국에 대한 관심이 점고 되고 있는 마당에 한국에서 개신교 선교 착수가 시급하다는 그의 사명의식을 불타오르게 했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그 이듬해 병인양요가 발생했을 때, 한국 개신교 선교 착수라는 토마스의 열정은 험난한 정세와 한국의 쇄국정책과 그로 인한 기독교 박해의 예민한 한국과 한국인들의 정서를 미처 생각할 여지가 없었다”며 “한국 최초의 개신교 순교 며칠 전, 그는 예수교는 인의와 충효를 모두 갖춘, 천하인민들이 다 즐겨 따를 만큼 선량한 종교요, 가톨릭과는 다름을 역설했다”고 했다.

그는 “그가 직접 주고받은 편지들, 기록들에서 만난 로버트 토마스에게는 뛰어난 달란트 두 가지가 있었다”며 “하나는 선교의 특장점인 ‘언어’이며, 또 다른 하나는 ‘그의 인간적 면모와 광활한 선교 시야”라고 했다.

이어 “언어는 토마스 선교의 특장점이자 그의 선교 여정을 전개한 통로였다. 언어에 대한 관심과 열정, 그리고 뛰어난 언어 실력이 그의 선교 여정을 관통하고 있었다”며 “중국과 중국어, 그를 통한 중국 선교에 대한 관심이 그의 신학교 시절에 있었던 한 때의 방황을 잠재웠다. 상해파송 선교사로 왔을 때에 그는 처음부터 상해지방어와 북경지방어를 함께 공부했다. 수도 북경에서 전도해야 중국 전역을 향해 선교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그의 선배선교사였던 상해위원회의 무어헤드와 갈등을 일으키고 다소 성급했던 선교사 사직까지 가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또한 “일시적인 선교회 탈퇴로 다시 복직을 타진하며 본부로부터의 처분을 기다리는 동안 토마스는 한국에 다녀갔다. 스코틀랜드성서공회 윌리엄슨에게서 성경을 받아가지고 한국에서 여러 달을 머물면서 한국인들의 배움에 대한 열망, 중국과 달리 전국에서 통용되는 한국어, 그리고 한국인들의 뛰어난 문자 해독률을 접하고 가슴이 뛰었다”며 “그래서 한국어로 성경을 번역하여 반포한다는 천부(天賦)의 사명이 자신에게 있음을 알고 그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한국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그러던 중 1866년 9월 5일, 제2차 한국선교 여행의 여정에서 그는 순교했다. 한국 최초의 개신교 순교자 로버트 토마스 목사의 순교였다”고 했다.

류 박사는 “토마스의 한국행은 또한 그의 광활한 선교시야에서 비롯되고 있었다”며 “토마스는 광활한 선교 시야를 가지고 있었다. 이것이 그의 인간적 면모와 어우러져 선교사로서 더할 나위 없는 인품과 자질로 그를 빛내고 있었다. 그는 선교 영역을 제한하지 않았다. 상층과 하층의 중국인들과 스스럼없이 어울리고, 세속직의 현장 세관에서도 선교사로 일할 수 있었던 그였다”고 했다.

이어 “상해로 파송된 그가 처음부터 줄곧 북경에 가고자 한 것도 그곳이 중국과 세계가 만나는 곳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라며 “토마스는 중심이 곧 바깥으로 나가는 최전선임을 통찰하고 있었다. 그래서 중국의 중심 북경에서 그는 결국 한국으로 향하게 되었다. 한국이 그의 필생(畢生)의, 천부의 사명지였던 것”이라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스코틀랜드 국립성서공회 파견원 자격으로 성경을 가득 싣고 와서 성경을 나누어주려다 순교한 토마스 목사, 그의 순교 이후 20년이 채 안 된 1885년 4월 5일 부활주일 아침 한국 개신교 최초의 상주 목사선교사 언더우드가 한국 땅을 밟았다”며 “그때 언더우드는 일본에서 한국인 크리스천 이수정이 번역한 ‘마가복음’을 품에 안고 있었다. 선교사가 선교하러 가면서 그 나라 말로 이미 번역된 성경을 가지고 들어가는 세계 선교사상 유례없는 일이 그렇게 전개되었던 것”이라고 했다.

그는 “성경, 그것은 순교자 토마스와 선교사 언더우드를 잇는 연결고리가 되고 있었다”며 “더욱 엄밀하게는 한국인의 성경 사랑, 그것이 이 두 선교사가 각각 다른 때에 한국의 문을 두드릴 때 그들의 가슴 속을 꼭 같은 감동으로 휘몰아치고 있었다”고 했다.

이어 “토마스는 자신이 제1차 한국 선교여행 당시 서해안에서 반포한 성경이 평양까지 흘러들어간 사실에 놀라서 한국 개신교 선교 착수의 불타는 사명감으로 다시 한국을 찾았었다”며 “언더우드는 말할 수 없는 벅찬 가슴으로 이수정 번역의 한글 쪽복음을 들고 한국에 왔는데, 그는 더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고 하나님의 은혜의 역사를 찬양할 수밖에 없었다. 서상륜이 이미만주에서 번역한 누가복음을 한국 여기 저기 뿌리고 다녔다는 사실을 발견했던 것이다. 이 누가복음은 요한복음과 함께 이수정의 마가복음보다 3년이나 앞선 1882년에 만주에서 번역되었다. 그리고 공교롭게도 이 한글 성경 번역에, 토마스의 경우와 같이, 중국 만주에서 활동하던 스코틀랜드 선교사들의 도움이 거기 있었다”고 덧붙였다.

아울러 “성경을 널리 퍼트리기 위해, 성서의 교리를 전하기 위해, 한국을 찾아와 순교한 개신교 선교사 로버트 토마스, 그의 꽃다운 순교의 피 위에 오늘 성경을 그 심장부에 둔 한국 교회가 의연하게 서 있다”고 했다.

한국교회사학연구원 제266회 월례세미나
한국교회사학연구원 제266회 월례세미나에 참석한 인사들이 단체사진을 찍고 있다. ©장지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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