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ella 칼럼
©[KELLA(켈라)]

인류는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와 삶의 목적에 대해 고뇌한다. 더 가치 있는 일을 찾고자 함이다. 철학적 사고를 하는 이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 인간은 ‘영성(Spirituality)’을 가지고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영성’은 신령해 보이는 높은 차원의 가치를 좇으며, 그 속에서 절대자의 존재를 본능적으로 인식할 수 있다. 그리고 절대자의 존재를 마주했을 때, 인간은 스스로의 연약함과 죄의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반면에, 마르크스는 그런 자신의 모습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절대자를 거부했다. 인간이 절대자의 은혜로 살아가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절대자율’이라는 궁극적인 목표 위에, 자기 자신이 주인이 된 삶을 살아가기로 결정했다. 이것이 마르크스주의의 뿌리와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회‧문화 현상의 근원이다.

절대자(창조자)를 거부한 인간(피조물)은, 절대자로 인해 가질 수 있는 인간의 존재 의미와 목적, 그리고 완전한 행복을 인간 ‘스스로’ 채우려 한다. 하지만 더 나은 삶을 찾기 위한 인류의 도전은, 끔찍한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자신의 힘으로 답을 찾고자 했던 인간은, 자신의 문제의 책임을 타인에게 돌려 혁명(분쟁)을 일으킨다. 물질과 인간의 지식, 즉, 과학기술이 삶을 채워주는 인류의 해답이라 여기며 말이다. 초(超)유전자를 가진 신(新)인류를 창조하고자 시도하지만, 이것은 스스로를 ‘유전자에 의해 지배되는 꼭두각시’로 여기는 ‘아이러니’가 될 뿐이었다.

존재의 완전함을 찾기 위한 인간의 도전은 멈추지 않는다. 자기 자신이 인생의 모든 것(실존주의)이라 여기며 본능에 의해 살아가게 하였고, 인간에 대한 존재 이유나 초월적인 목적은 없다고 여기도록 만들었다. 그래서 구원도 없고, 인생의 특정한 답도 없다(염세주의)고 하여 인간을 허무한 존재로 만들었다. 인간은 ‘아메바’에서부터 ‘신적 존재’가 되는 과정에 있는 존재이기 때문에, 훈련(조화와 이해)을 통해 창조의 원천인 ‘우주정신’에 들어가는 것을 궁극적인 목표(뉴에이지)로 만들어 인간의 개별 고유성을 없애버리기도 했다.

이토록 수많은 답을 제시한 인간은 절대자의 곁을 떠난 후 계속 방황하고 있다. 마르크스는 ‘절대자율’이 존재의 ‘완전함(구원)’을 줄 수 있다고 했지만, ‘절대자율’은 도리어 인간의 삶을 파괴했다. 만족을 줄 것 같았지만, 더 큰 목마름만 남았다. 인간은 스스로를 완전하게 만들 수 있는 ‘어떤 것’을 찾지 못했다.

강헌구 교수의 ‘가슴 뛰는 삶’이라는 책에 늑대를 잡는 방법이 나온다. 피 묻은 칼날을 얼음에 얼려 세워두면, 늑대가 피 냄새를 맡고 칼이 들어있는 얼음을 핥는다고 한다. 얼음에 의해 감각이 둔감해져 버린 늑대는, 칼을 핥고 있는 것도 모르고 자신의 찢긴 혀에서 흐르는 피를 계속 핥다가 서서히 죽어간다고 한다.

우리에게도 이 늑대와 같은 어리석은 모습이 있다. 죽어가는 줄도 모르고, 갈기갈기 찢기는 줄도 모르고 순간의 채워짐을 쫓아가는 것이다. 그것이 나에게 좋지 않은 것임을 알아도 끊어내지 못한다. 이처럼 죄는 실체를 그대로 드러내고 우리에게 다가오지 않는다. 아주 매력적으로 포장되어 내게 가장 필요한 모습으로 다가온다.

우리는 어떻게 죄에서 해방될 수 있을까? 어떻게 ‘절대자율’과 같은 달콤함에 속지 않고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을까? 그것은 절대자(창조주)만이 우리(피조물)를 모든 문제와 죄로부터 구원하며, 우리의 존재와 목적을 깨닫게 한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누릴 수 있다. 인간이 스스로 답을 찾으려 하면 할수록 절대자의 존재는 좌절 안에서 더욱 선명해진다.

절대자의 초월적인 사랑으로 인해 인간은 영원히 죄와 사망으로부터 자유함을 얻게 된다. 하지만 여전히 우리는 유혹적인 피 냄새를 풍기는 세상에 있다. 속지 않을 수 있는 방법은 마르크스가 그토록 거부했던, 절대자의 은혜뿐이다. 피 묻은 칼을 피하기 위해 유혹에 속지 않을 힘과 능력이 필요하다.

우리의 일상 속에 마르크스로부터 시작된 수많은 구원론들이 ‘문화’라는 이름의 속임수로 존재하고 있다. 피 묻은 칼은 보지 않고, 피 냄새에 반응하도록 만들며, 서서히 우리의 혀를 무감각하게 만든다. 한 가지 예시를 들어본다면, 바로 ‘성해방 운동’이 이러한 것들이다. 현재 한국에서는 ‘성인지 감수성’이라는 말로 기존의 성과 가정의 질서를 없애며 모호한 개념의 무질서한 성 관념을 교육하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다. 이는 본질 자체에 대한 가치를 지키는 ‘생명 감수성’을 위협한다. 태아의 생명 유무를 논쟁거리로 만들고, 한 여성의 삶을 위협하는 낙태 이슈에 대해 가능성과 불가능성만을 이슈로 올리는 일원론적 태도를 취하며 말이다. ‘성해방’을 주장하는 자들은, 성적 자유를 구원의 방법으로 제시한다. 성에 대한 제약을 제거하면 대부분의 큰 사회악은 없어질 거라 말하면서 말이다. 이는 성‘해방’이 아니라 성‘방임’으로 보여진다. 자유를 얻는 것이 아닌 종의 멍에를 메게 한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우리가 스스로 섬길 자를 택하는(수24:15) 것이다. 진리의 기준이 없는 세상에서 흔들리지 않도록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 안에 나의 세계관을 뿌리를 내려야 한다. 그래서 나와 내 민족이 여호와 하나님만을 섬기는 것을 선택할 수 있도록 진리의 기준을 제시하는 자로 서야 한다.

그리스도를 택한 우리는 생명을 살리는 자이다. 구원 받은 우리는 모든 피조질서에 대한 그리스도의 회복을 명하는 능력을 부여받았다. 그것은 모든 만물에 대한 창조주의 다스림을 나타내는 일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의 복음을 증언하며, 한 영혼을 지키기 위해 나의 것을 내어놓는 믿음의 경주를 완주해야 한다(행20:24).

세상이 그들이 섬기는 신의 이름으로, 칼과 창과 단창으로 맞설 때,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가는 믿음이 필요하다. 우리의 능력과 소망은 오직 예수그리스도께 있다. 십자가의 능력은 우리를 죄에서 완전히 자유하게 했으며 승리하게 하셨다. 우리의 믿음의 승리는 그리스도의 영광으로 빛날 것이다.

무릇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마다 세상을 이기느니라 세상을 이기는 승리는 이것이니 우리의 믿음이니라(요일 5:4).

켈라

김성영 (그리스도의 계절 회원, KELLA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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