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병준 교수
정병준 교수 ©기독일보DB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가 6일 오후 2시 한국기독교역사학회 제390회 학술발표회를 온라인 줌으로 개최했다. 이날 주제발표는 홍민기(간세이가쿠인대, 한국기독교역사학회 기획이사) 박사가 ‘고양읍교회의 설립과 성격에 관한 연구’라는 주제로, 정병준(서울장신대 교회사) 교수가 ‘권세열(Francis Kinsler) 선교사의 생애와 한국교회에 남긴 공헌’이라는 주제로 각각 발제했다.

첫 번째 발제자로 나선 홍민기 박사는 “ 1897년 설립된 고양읍교회는 남감리회(Methodist Episcopal Church, South)의 첫 번째 조직교회인 역사적 상징성을 띠고 있다”며 “그러나 이에 비하여 그동안 한국기독교 역사 속에서 고양읍교회가 그리 비중 있게 다뤄진 적은 없었다. 이 교회에 관해서는 간단히 ‘남감리회의 첫 번째 조직교회’로 언급되는 경향이 짙을 뿐이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를 들 수 있다”고 했다.

이어 “먼저 고양 지역이 교파 선교부간 선교지역 분할협정으로 인하여 일찍이 장로교 선교구역으로 편성되었다는 점”이라며 “결국 기존 이 지역 남감리회 교인들 상당수가 자연스럽게 장로교인으로 변경될 수밖에 없었다. 때문에 남감리회 고양읍교회의 정체성과 자취를 찾아보기가 수월치 않았다. 환언하자면 남감리회 측 관점에서 이 교회의 역사는 단절되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라고 했다.

또 “둘째, 한국감리교회사(韓國監理敎會史) 속에서 남감리회 측 모교회(母敎會)의 상징적 지위는 서울 종교교회(宗橋敎會)가 갖고 있었기 때문”이라며 “사실 연대기적으로만 한정했을 때 고양읍교회가 남감리회의 모교회로 평가받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남감리회가 한국선교를 개시할 때 선교사들이 주목한 곳은 서울과 개성이었다. 이들은 처음부터 이 두 지역을 선교거점으로 삼고 각종 사업을 추진해 나갔다. 고양은 그저 두 거점을 오가는 길목에 위치한 작은 마을일뿐이었다. 1900년대 중반까지도 고양지역이 줄곧 서울구역(Seoul Circuit) 예하에 편성되어 있다는 사실이 이를 증명한다. 따라서 고양읍교회는 모교회적 지위와 위상을 얻기가 어려웠다”고 했다.

그리고 “셋째, 남감리회 역사가 그동안 윤치호(尹致昊)와 연계되어 해석, 서술되는 경향이 짙었기 때문”이라며 “실제 남감리회의 개척선교사들은 이른바 근대 지식인이며 당대 상류층이던 그를 통해 상당한 도움을 받았다. 윤치호가 한국기독교 역사는 물론, 구한말 한국사 연구에 있어서도 상당히 비중 있는 인물로 다뤄지고 있으니 일면 당연한 결과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고양지역에서의 윤치호 비중은 앞의 두 거점과 비교해 볼 때 상대적으로 그리 크지 않았다. 이처럼 역사적, 신학적, 선교학적, 지역적 차원 등의 이유로 인해 고양읍교회는 한국기독교 역사 속에서 많은 주목을 받지 못했다”고 했다.

아울러 “한국기독교 역사의 거시적 관점에서 볼 때 고양읍교회는 그저 작은 신앙공동체에 지나지 않을지 모른다. 또한 교계예양(Comity Agreement)으로 인한 역사적 단절로 인해 그 가치가 경감되어 보일수도 있다”며 “그러나 이같은 연구과정과 작업이 앞으로도 더욱 활성화된다면 한국기독교의 초기 역사는 보다 입체적으로 복원될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더하여 그 이해의 지평 또한 더욱 넓어질 수 있겠다”고 했다.

두 번째 발제를 맡은 정병준 교수는 “미국북장로교 선교사 권세열(權世烈, Francis Kinsler, 1904~1992)은 42년(1928~1970, 미국 체류 6년)을 한국 선교사로 살면서, 숭실전문 교수, 평양신학교와 장로회신학교(대학) 교수, 성경구락부 운동, 한국 전쟁 시기 전재민 구호와 목회자 가족 피난 및 구제, 군 선교 지원, 예장 총회(통합)로 선교사업이양, 저술 활동과 지도자 양성 등 많은 활동을 하면서 한국교회와 사회에 공헌했다”고 소개했다.

이어 “한국 교회사 연구에서 초대교회의 기초를 놓은 1세대 선교사들은 주목을 받았지만 비교적 근현대시대의 선교사는 그리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 중에 권세열은 식민지, 한국전쟁, 근대화의 시기를 한국에 살면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인물 중 하나”라며 “그는 만주와 몽골 선교를 목적으로 한국에 왔으나 만주 사변으로 인해 그의 선교활동은 예상치 않는 방향으로 전개됐다. 권세열은 한국장로교회의 성서 신학교육의 기초를 놓았고 지도자를 양성했다”고 덧붙였다.

그러면서 “그는 가난하고 소외된 어린이들을 위해 성경구락부 운동을 전개했다. 해방 이후에는 월남 기독교인들이 정착하도록 도왔고, 전쟁 시기에는 전재민 구호와 목회자 가족 피난과 보호에 앞장섰다”며 “그는 지속되는 한국 장로교 분열 과정에서 나름 최선의 방식을 찾으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에큐메니칼 선교 방침에 따른 선교 이양을 책임지고 수행했다. 그가 행했던 굵직한 선교 성과 중 어느 것도 예상하고 계획했던 것은 없었다”고 했다.

또 “권세열은 1962~1963년 연례선교보고서에서 ‘선교보고서를 쓸 때 내가 주님을 위해 했던 것을 말하고 싶은 유혹을 받는다. 하지만 나는 주님이 너를 위해 하신 것을 가서 말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기억한다’라고 적었다”며 “권세열과 같이 장기간 다방 면에서 선교적 업적을 남기는 선교사는 그리 흔하지 않다. 그의 삶과 공헌을 살펴볼 때 권세열 선교사의 개인적 탁월함 외에도 환경적인 특징이 발견된다”고 했다.

아울러 “권세열은 그를 지원하는 선교사 가족들이 있었던 것이 초기 평양 사역에 정착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며 “전쟁과 전후 복구 과정에서 프린스턴 신학교 동문 한경직, 윤하영, 옥호열 등의 우정관계가 선교활동을 하는데 큰 배경이 됐다. 그는 1950년대와 1960년대 총회신학교와 장로회신학대학에서 유일한 선교사 교수였다. 그가 평양신학교 교수 전통을 잇는 선교사였기 때문”이라고 했다.

한편 홍승표 교수(감신대 객원교수)와 권요한 교수(JOHN-FRANCIS KINSLER, 서울여대교수)가 각각 논찬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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