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실 집사(탈북민, 방송인-이만갑 출연)
탈북민 이순실 집사(방송인-이만갑 출연) ©북한구원기도모임 유튜브 영상

매주 화요일 오전 10시에 진행되는 ‘탈북민센터 북한구원 화요모임’ 17일 모임에선 탈북 방송인 이순실 집사가 “나의 친정 아버지보다 더 좋은 하나님을 자랑하러 딸의 마음으로 나왔다”며 간증을 전했다.

이 집사는 “평양시 보통강 구역에서 태어나 인민학교 4학년까지 평양시민이라는 긍지를 갖고 살다가, 아버지가 군인이어서 황해북도 평산 2군단 사령부로 이사를 오게 되었다. 평양과 달리 시골로 오니 부모님의 교육이 달라졌다. 직업의 대물림으로 학교를 졸업하면 군대를 가야 했기에 아버지는 군대 가서 도둑질을 못 하면 사람질을 못한다며 도둑질을 가르쳤고, 어머니는 열한 명의 자식을 다 도둑놈으로 키웠다. 도둑질을 잘하면 사람질 할 수 있다고 칭찬하니 잘하는 일이라 생각했다”고 했다.

이어 “16살에 학교를 졸업하고 나의 꿈과 관계없이 인민군대에 가게 되었다. 가보니 내 키가 제일 큰 것을 보고 도둑질을 가르쳐준 어머니도 도둑이었다는 걸 깨달았다. 군단장 요리사였던 어머니는 군단장 몫으로 평양에서 내려온 좋은 음식들을 훔쳐다가 자식을 먹인 것이었다. 그런데 키가 크다 보니 개성 2군단 15사단 대덕산 처소로 가게 되었다. 대덕산은 김부자가 남한 처소를 시찰하는 곳인데, 북한 사람은 다 저렇게 예쁘고 키가 크다는 걸 남한에 보여주려고 보낸 것”이라고 했다.

이어 “1982년 군 복무를 시작했는데 85년이 되니 인민군대 식량이 줄어들고, 부족한 식량을 위에선 빼돌리니 영양실조가 환자가 많아졌다. 간호원 한 명당 환자 20~30명씩 붙여주면서 살려놓으면 최고 영예인 조선노동당원에 입당시켜주겠다고 했다. 이것을 위해 갈비뼈가 다 드러나 보이고 제대로 걷지 못하는 군인들을 살리려 해가 지면 도둑질을 해다가 먹였다. 여군들도 배가 고팠다. 이따금 새벽에 산에 올라 남조선에서 날아오는 적재물자를 수색해서 걷어와야 했다. 적재물자에 독약, 폭발물이 있다고 선전하니 무서워서 불태우거나 보위부에 바쳤는데, 배가 고프니까 적재물자에 있는 음식들을 주워 먹게 되었다. 군 복무 10년을 마치고 집에 가려는데 미제와 남조선 괴뢰가 쳐들어온다며 복무를 연장했다. 알고 보니 다음에 군대 올 아이들이 키도 작고 영양 상태가 안 좋아 우리를 남겨두려는 핑계였다”고 했다.

이 집사는 “11년의 복무가 끝나고 집에 돌아오니 부모님은 3년 전에 돌아가시고 집은 유리창까지 다 뽑혀나간 상태였다. 제대비를 가지고 장마당 가서 쌀이라도 사보려 했지만 쌀값이 올라 강냉이 가루를 사와 풀죽을 끓여 먹었다. 배가 고파 입고 온 군복에 제대 때 입고 온 팬티까지 다 팔아 빵 여섯 개와 바꿔 방랑 생활을 시작했다. 떠돌이 생활을 하면서 군대에서 했던 도둑질이 시작됐다. 이젠 사회인 신분이니 도둑질하다 잡히면 죽도록 매를 맞고, 수모와 천대를 받으며 걸어서 양강도 해산까지 갔다. 그곳엔 나보다 더 못 살고 한심한 사람들이 우글거려서 부끄럽지 않았다”고 했다.

그녀는 여덟 번이나 강제북송된 사연을 전하기도 했다. “전염병에 두 번이나 걸려 죽다 살아난 후 97년부터 중국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강을 건너가자마자 잡혀서 보위부에 끌려갔다. 여자 남자 할 것 없이 복도에 줄을 세우고 홀라당 벗겨서 검사하니 부끄럽고 수치스러웠다. 탈북자가 많아지자 수용할 곳이 없어 사냥개를 키우던 방에 수용되었다. 밤마다 벼룩, 빈대 등 벌레가 나와서 몸을 깨물었다. 16살짜리 여자애가 씻지도 못하고 더러운 손으로 몸을 긁어서 다리, 겨드랑이가 곪고 임파선염에 고열이 나더니 며칠 있다가 죽었다. 북한에서 태어난 죄로 배고픔 때문에 중국 건너가서 매 맞고 보위부에 잡혀 와 북한에서 또 매를 맞고 피지도 못한 16살의 작은 아이. 자국민을 때려 패고 총살하고 정치범수용소네 보내는 걸 보니 죽어도 중국 가서 죽겠다는 마음으로 갔다가 또 잡혀 오는 생활을 한 것”이라고 했다.

이어 “세 살 난 딸 아이를 먹이러 중국에 왔다가 잃어버렸다. 장마당에서 태어나 장마당에서 살다 보니 세 살 아이가 벌써 철이 들어 사람들 앞에서 배고프다고 난리를 치며 얻은 것으로 엄마를 벌어먹였다. 썩고 버려진 거라도 실컷 얻어먹자고 딸 아이를 배낭에 담아 야밤에 꽁꽁 언 압록강을 건넜다가 숨어있던 인신매매범에 잡혔다. 엄마와 떨어지지 않겠다고 엄마 손을 붙잡고 우는 아이를 어미가 보는 앞에서 값을 흥정했다. 그렇게 딸 아이는 중국 돈 2천 원, 저는 5천 원에 팔렸다. 어미가 보는 앞에서 새끼를 짐승 팔듯 파는 나라, 팔림 당하는 나라가 어디 있냐”며 울분을 토했다.

이 집사는 “팔려 간 곳에서 도망쳐 나와 빨간 십자가가 있는 곳을 찾았다. 그곳에 가면 잡히지 않게 보호해주고 먹을 것도 준다는 친지들의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렇게 찾아간 교회에서 나를 포함 탈북자 8명이 보호를 받았다. 6개월을 있다 보니 북한 전방에서 들었던 찬송가도 느끼고 기도하는 소리도 귀에 익었지만 함께한 탈북자들은 먹는 것 자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받아들이지 않았다. 있지도 않은 하나님을 보고 우리를 살려달라 하고, 기도하라고 하는 교인들을 정신병자 취급했다”고 했다.

이어 “목사님은 그런 우리를 위해 공안국에 사람을 심어 피신을 도왔다. 밤새 기도하며 배낭 여덟 개와 여비를 마련해주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면 누구를 통해서든 도와주실 거니 위험에 처하면 주님을 부르고, 기도하며 가라고 당부했다. 하지만 우리는 하나님이 없으니까 지켜주지 못하고 나가라고 하는 거라며 잡히면 죽을 생각으로 낚싯바늘, 쥐약을 사서 꽁꽁 감추고 길을 떠나 중국과 몽골의 국경지대에 도착했다. 사느냐 죽느냐의 갈림길에서 군인들을 피해 몽골 방향으로 뛰었지만 결국 군인에게 붙잡혔다. 북한 감옥에서 매 맞은 자리, 아물지 않은 피고름을 보여주며 살려달라고 빌었고, 군인들은 몽골로 가는 정확한 방향을 알려주며 빨리 가라고 했다. 그때는 목사님이 말씀하신 누구를 통해서든 도우시는 하나님을 몰랐다”고 했다.

이어 “몽골에 들어서자마자 안도의 숨을 쉬었다. 몽골에서 잡히면 한국에 갈 수 있는데 광야지대다 보니 군인들이 없었다. 사흘이 지나니 목구멍이 말라 죽을 것 같았다. 이제 마지막이라 생각하고 목사님이 하나님을 부르면 살려준다 했는데 속는 셈 치고 기도해보자고 여덟 명이 앉아 하나님 제발 우리 좀 살려달라고 눈물을 펑펑 쏟으며 기도했다. 기도하는 방법도 모르고 하나님 부를 줄도 몰랐지만 간절했다. 기도해도 아무 소식이 없어 죽는구나 했는데, 말을 탄 군인 세 명이 총을 들고 달려왔다. 우리 몸을 수색해보고 탈북자인 줄 알고 데려갔고, 그곳엔 탈북자 500명이 체육관에 모여 있었다”고 했다.

그는 “밤마다 30~40명씩 탈북자가 잡혀 오는데 한국엔 일주일에 다섯 명씩 밖에 못 보낸다. 사람은 넘쳐나고 넣을 데가 없어 우리는 게르로 보내졌다. 그곳엔 중국 조선족 교회에서 믿음 생활했던 집사님이 계셨다. 그분은 성경 지식, 찬송가도 알려주고 우리가 여기서 선을 행해야 한다며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이라고 알려줘서 아파하는 사람들에게 먼저 양보하고 먹을 것도 보내주며 선을 행했다. 그러자 군인들이 체육관에 있는 사람들은 패거리 싸움을 하니 게르에서 선을 행하는 사람들을 먼저 보내줘야 한다고 해서 게르의 인원을 싹 다 뽑아서 한국에 보냈다. 나보다 먼저 온 친구도 6개월 만에 한국에 왔다는데 40일 만에 한국에 오게 되었다”고 했다.

한국에 도착한 이순실 집사는 그동안 도망치고 고생하느라 잊고 있던 딸아이가 생각나 우울증으로 힘들어하던 중 몽골에서 하나님께 드렸던 기도가 생각났다. “이 사막에서 살려주면 한국에 계신 하나님을 내가 잘 믿겠다고 교회도 다니겠다고 기도했던 게 생각났다. 다음 날 집 근처 교회에 가서 의자에 앉아 눈을 감으니 몽골에서의 일들이 떠올랐다. 내가 마지막에 붙든 하나님이 대화와러 왔다는 게 느껴졌다. 몽골에서 나를 살려주신 하나님께 신세 갚으며 살겠다는 기도를 드렸다. 신세를 갚기 위해 교회에서 식당 봉사로 북한 음식을 만드니 교인들이 기뻐하고 목사님도 탈북자 자매님이라고 띄워주니 교회 가면 흥이 돋아났다”고 했다.

이 집사는 “북한은 3만 8천여 개 동상을 앞에 놓고 많은 사람을 감시하는 나라, 초상화·동상 앞에 절하고 충성을 맹세하는 나라, 우상숭배 때문에 주민들이 굶어 죽어도 눈 하나 꿈쩍하지 않는 나라이다. 왜 대한민국은 잘 먹고 잘 살고 북한은 암흑의 땅 지옥이 되었는지 이제 분간이 된다. 3만 5천 명 탈북자들 중 교회 생활, 믿음 생활 하는 사람은 다 잘됐다. 아닌 사람은 10년 되어도 정착을 못 하고 중국, 북한에 알게 모르게 건너갔다가 다시 또 넘어와서 한국 감방에 앉아 있는 사람도 많다. 모세의 광야 생활 같은 어려움과 고난의 길들을 다 체험하게 하시고 마지막에 딱 붙든 게 하나님 뿐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믿음 생활 외에는 그 무엇도 첫째로 안둔다”고 했다.

그러면서 “북한이 아닌 대한민국에 태어난 게 얼마나 큰 감사인가. 한 알의 가루가 바람에 날려 북한에 갈까봐 남편에게 죽으면 뼈를 뿌리지도 말라는 유언장을 남겼다. 꿈에도 가기 싫고 통일되어도 안 간다고 장담하며 살았다. 그런데 십 년이 되니까 이제서야 북한을 바라보며 기도하는 마음이 생긴다. 아직 원한, 미움, 분노, 증오밖에 쌓인 게 없다. 그래도 예수님께서 주신 마음 때문에 북한을 위해서 이제는 돌아서서 기도하게 되었다. 저 김 부자들 때문에 내가 천국의 땅에 왔다. 죽네 사네 해도 대한민국은 천국이다. 이렇게 잘 먹고 잘 사는 나라 축복받은 나라, 하나님께서 지켜주시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 집사는 “통일 문제는 미국 한국의 대통령과 김정은이 아무리 토론하고 머리 싸매도 못한다. 북한에서 41년 살아온 우리가 말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북한에 가기 전에는 절대 안 된다. 오직 하나님의 복음 통일만이 통일이다. 통일을 아무리 부르짖어도 기도 없는 통일은 안 된다. 북한을 위해서 이렇게 죽자 살자 기도하는데 하나님께서 왜 안 들어주시겠는가. 하나님께 전달되는 기도가 끓어 넘치는 교회가 되시고 내가 만난 하나님을 여러분도 만나서 축복을 함께 누리는 사람들이 되기 바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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